그의 영광은 하늘보다 높으시도다
너는 성막을 만들되 가늘게 꼰 베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로 그룹을 정교하게 수 놓은 열 폭의 휘장을 만들지니, 그 휘장을 갈고리 아래에 늘어뜨린 후에 증거궤를 그 휘장 안에 들여놓으라 그 휘장이 너희를 위하여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리라
출애굽기 26:1, 33
여호와는 모든 나라보다 높으시며 그의 영광은 하늘보다 높으시도다
시편 113:4
일과 쉼의 경계가 없다. 속된 것과 성결한 것의 구분이 모호하여졌다. 좋아하는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이 한데 혼용되었고 우리의 열심이 성실함으로 이해되는 판국이다. 옳고 그름은 명확하지 않아서 죄를 죄로 여기기보다 그럴 수 있는, 어쩔 수 없는, 다들 그러고 사는 정도의 면제부를 더하고 있다. 우린 누구도 때와 시기를 알 수 없으니 되는 일의 결과를 짐작할 따름이다.
이와 같은 모호함이 우리 영혼을 갈등하게 한다. 그저 맡겨두면 그릇된 길로 가게 돼 있다. “그대는 분노하지 않도록 조심하며 많은 뇌물이 그대를 그릇된 길로 가게 할까 조심하라(욥 36:18).” 아이는 수줍은 듯 입을 열었다. 저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어요! 두 살 많아요. 누나예요. 좋아요. 아이의 들뜬 마음은 숨길 수 없어 싱글벙글 웃음으로 배어났고, 슬그머니 저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언제부터? 말해놓고 보면 나의 질문은 항상 우문이 된다.
나는 아이의 시간이 너무 벅찬 게 늘 마음에 걸린다. 일하는 시간이 너무 길다. 하루 일과가 온통 사로잡혀가는 형국이라, ‘남들 다 그러고 살아!’ 라고 하면 뭐라 할 말이 없어진다. 그러니 점점 성경 읽을 시간이 없다. 이를 필사하며 옮겨 적던 시간은 사라졌다. 일기도 쓰려고 하지 않는다. 성경공부를 와서도 자꾸 피곤하다는 소리만 한다. 그러면서 ‘안 믿는 회사 형’과 어울리는 시간을 좇고, 누구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꽉 채워졌다. 같이 점심 먹고 성경 읽고 얼추 한 시간만에 돌아간 것 같다.
마음이 어려워졌다. 일하는 시간을 어떤 이처럼 오후 근무만 하면 안 될까? 비록 수입은 그만큼 줄겠으나 오전에는 와서 같이 성경공부도 하고 일기도 쓰고 수학, 영어 좀 뭔가 자기계발을 위해서도 그게 낫지 않겠나? 넌지시 물으면 아이는 도리질이다. 슬쩍 누구에게 말했더니, 다들 그러고 산다며 일축한다. 아이 스스로도 괜찮다고 하면서 오히려 그렇게 말하는 나를 이상하게 여긴다. 우리는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다고 하질 않는다. 아픈 거 아니냐고 물으면 모욕적으로 듣는다.
손에 움켜쥐고 있던 모래가 빠져나가는 기분이랄까. 아이가 돌아가고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마음만 어려웠다. 아이엄마에게 일러볼까 하다 것도 내가 나설 문제가 아닌가싶어 그저 마음만 졸일 뿐이다. 점점 아이의 횡설수설은 늘고 자기고집은 세져서 뭐라 이르는 소리를 참견으로 듣는 듯하여 것도 조심스럽다. 그러니 행여 아이가 받을 상처와 그 엄청난 변화를 염려한다. 단적인 예로 피곤한 몸을 쉬는 게 노래방을 가는 것이다. ‘그 형’에 대한 끌림으로 온통 마음이 간다. 누가 좋아져 싱글벙글 저 혼자 들떠 좋아 죽겠다. 언제부터야? 어제부터요!
물론 모든 게 다 때가 있겠으나, 나의 어려운 마음은 고스란히 나 혼자만의 몫이 되었다. 하라, 하지마라의 문제가 아니고 다만 주의 성품을 의지할 따름이다. “내가 해 아래에서 한 가지 불행한 일이 있는 것을 보았나니 이는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이라(전 6:1).” 그런 게 어디 뜻대로 되는 일이던가? “어떤 사람은 그의 영혼이 바라는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하나님께서 그가 그것을 누리도록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2).”
그런 점에서도 우리의 귀한 축복은 우리의 연약함인데, 아이도 아이엄마도 스스로 이겨낼 수 있는 정도의 문제로만 여길 뿐. 다들 그러고 사는 거죠, 뭐! 하는 식의 응대 앞에 나는 뭐라 할 말이 없다. 그렇게 “그가 비록 천 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행복을 보지 못하면 마침내 다 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 아니냐(6).” 두려움은 마땅한 일이 전혀 마땅한 결과로 돌아오지 않는 게 세상이어서. 이를 어찌 말로써 설명하고 설득하여 알려줄 수 있는 문제이겠나!
그저 나의 염려가 너무 앞서가는 것으로 별 거 아니었으면 좋겠다. 한데 아이의 감정이 너무 상승된 것도 마음에 걸리고, 그 기대와 나름의 열심이 조만간 저의 뒤통수를 칠 때의 아찔함에 대하여. 말이 많아진 아이인데 나는 그 말을 더 못 알아듣고 있었고, 좋아서 싱글벙글하는데 나는 오히려 염려에 사로잡히고 있었으며, 피곤하다는 이유로 기껏 왔다가 성경공부를 안 하고 갔으면 하는 태도여서. 그러니 알아듣게 설명한다고 될 일도 아닌 것 같고, 아이엄마에게 알려 함께 무얼 의논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혼자 속 끓이는 내게 아내는 그저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만 하니.
우리의 삶은 온전할 수 없는 것인가? 오늘 말씀은 그 구분에서, 성별하여 그 쓰임과 목적을 엄격히 하시는 본문의 세세한 내용을 통해. “너는 성막을 만들되 가늘게 꼰 베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로 그룹을 정교하게 수 놓은 열 폭의 휘장을 만들지니, 그 휘장을 갈고리 아래에 늘어뜨린 후에 증거궤를 그 휘장 안에 들여놓으라 그 휘장이 너희를 위하여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리라(출 26:1, 33).” 그 확신은 분명한데 이를 어찌 전달하고 가르쳐야 할까?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시 27:4).” 어떻게 그러고 사냐고? 이 모든 게 일장춘몽과 같아서,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73:2-3).” 우리는 모두 어쩔 수 없는 사람이라,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는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20).” 슬그머니 들어오는 마음을 어쩌면 좋을까!
한참 또 그럴 때여서 아, 젊음과 청춘은 얼마나 위태로운가! 뭘 해도 다 괜찮고 좋을 것 같은 때에,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전 12:1-2).” 이런 소릴 백날 들려주어도 어림없다. 돌이켜 저가 주의 영광을 보는 길밖에.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110:3).”
뭐라 좀 이르는 소린데 아이는 벌써, 하지 말라는 소리로 듣는지 얼른 화제를 바꾼다. 더는 말하지 않는 아이에게 나는 한 가지 들려주고 싶은 말,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73:25).” 이를 어찌 알게 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17).” 그 어마 무시한 종말에 대하여 기어이 젊음을 탕진하고 청년의 때를 다 흘려보낸 뒤에야 한탄하며 돌이켜 깨닫는 건 아닐까 하여!
한참 그럴 때인 거 알고, 다들 그 나이 땐 그러고 산다는 것도 알지만. 그래서 더 아이라서, 너여서, 다름 아닌 그게 너여서 마음이 쓰이고 아팠다. 구분하고 구별하지 않고는 혼재되고 혼용되어 혼탁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디가 어딘지 알 길이 없어져 그저 남들처럼 사는 게 상책일 줄 안다. 애써 주가 세우신 방책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 것인가! “우리는 필경 죽으리니 땅에 쏟아진 물을 다시 담지 못함 같을 것이오나 하나님은 생명을 빼앗지 아니하시고 방책을 베푸사 내쫓긴 자가 하나님께 버린 자가 되지 아니하게 하시나이다(삼하 14:14).”
아이가 돌아가고 더욱 주의 긍휼하심 앞에 엎드렸다. 주의 선하심을 의지하였다, 그리 두시는 데 따른 엄연한 의와 진리가 있을 것을 신뢰하였다. 아니면 이제 내가 지레 애간장이 타서 살 수가 없을 것이니. “여호와는 모든 나라보다 높으시며 그의 영광은 하늘보다 높으시도다(시 113:4).” 오늘 말씀이 위로다. 그러니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1).” 저는 선하시며 인자하시고 긍휼이 많으시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대상 16:33).” 그러므로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시 113:2).” 곧 “해 돋는 데에서부터 해 지는 데에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3).” 주만 바라고 의뢰하는 수밖에! “여호와는 모든 나라보다 높으시며 그의 영광은 하늘보다 높으시도다(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