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
너는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감람으로 짠 순수한 기름을 등불을 위하여 네게로 가져오게 하고 끊이지 않게 등불을 켜되 아론과 그의 아들들로 회막 안 증거궤 앞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그 등불을 보살피게 하라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대대로 지킬 규례이니라
출애굽기 27:20-21
그가 반석을 쳐서 못물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
시편 114:8
곧 우리가 지켜야 할 것에 대하여, 그 의미가 새롭게 느껴지는 것이어서. “여호와여 주는 나의 등불이시니 여호와께서 나의 어둠을 밝히시리이다(삼하 22:29).” 항상 주를 모시고 사는 주의 임재의 삶이란 여느 일반적인 생활과는 확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이는 “순수한 기름을 등불을 위하여, 가져오게 하고, 끊이지 않게 등불을 켜되” 그 삶은 항상 주를 바라는 데 있었다. 등불을 밝히는 이유는 어둠을 물리치고 사물을 판단하고 그 길을 온전히 걷기 위함이니.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그 등불을 보살피게 하라.” 이를 맡은 자로 그 부르심에 합하여 사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날들이 아닐까?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대대로 지킬 규례이니라.” 영적으로 우리는 주의 백성이고, 이스라엘의 자손이면 분명한 이치다(출 27:20-21). 말씀은 곧 우리로 하여금 삶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을 돌이켜서 맛보아 알게 하신다.
“그가 반석을 쳐서 못물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시 114:8).” 엄연히 나의 지난날을 돌어보면 이와 같은, ‘하셨도다’를 고백할 수 있다. 2009학번으로 신대원을 다시 한 것이니 만으로 10년이 되는 시간이겠다. 나 같은 자를 부르시고 주 앞에 온전하게 하시려고 기어이 목사로 세워 앉히신 까닭을 이제는 분명히 알 수 있다.
“구름이 땅을 덮음 같이 내 백성 이스라엘을 치러 오리라 곡아 끝 날에 내가 너를 이끌어다가 내 땅을 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말미암아 이방 사람의 눈 앞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어 그들이 다 나를 알게 하려 함이라(겔 38:16).” 모든 게 다 그 기한이 있고 때와 시기가 있는 것이어서, 주께서 어찌 우리와 함께 하셨는가? 하는 부분은 산 증거가 되는 일이었다. 우상과 신주단지를 섬기며 살던 시절이 있었고, 이를 개의치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던 세월에도, 주는 긍휼하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오늘에 이르게 하신 것이니.
형님이 늙으신 노모의 일대기를 사진첩으로 작성하여 한 권의 책으로 만들었다. 예배 후에 지난날의 증거가 되는 사진들을 펼쳐보며 새삼 만감이 교차하는 것을 느꼈다. 마치 일부러 서로 맞춘 것처럼 함께 나눈 말씀의 본문도 전도서 3장이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전 3:1).” 주의 인도하심이 기이하였다. 나에게 선으로 갚으시는 주의 은총이 귀하였다. 형님도 자신들 가족이 대대로 섬겨오던 우상의 사슬에서 놓여난 것에 놀라워하였다.
‘그땐 그랬지’ 하는 식의 대화는 이어졌고 그 증인과 증거의 삶을 취합하여 사진첩으로 보는 그 일대기가 놀라울 따름이었다. 돌아보면 그 세월이 얼마나 무상하고 야속할 정도로 짧았는지. “나의 때가 얼마나 짧은지 기억하소서 주께서 모든 사람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시 89:47).” 이를 바로 아는 게 은총이었다. 늙으신 노모의 남은 생을 챙기면서 더욱 주를 바라는 마음이 복되었다. 그럴 수 있게 여기까지 인도하신 이의 자비하심에 대하여.
서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고, 입이 마르고 닳도록 증거하고 간증할 수 있는 세월이었다. 유독 성경을 더 알고자 하여 열심을 다하는 손위 처남에게 나는 성경통독 프로그램에 따른 성경공부 교재와 8개 언어로 번역을 해놓은 신약성서와 아시모프 바이블과 유진 피터슨의 신양 메시지를 선물로 싸주었다. 그것은 요즘 나의 달라진 태도 가운데 하나여서 가지고만 있는 책들을 여기저기 나누어줄 판이다. 정작 여러 번 읽게 되는 시집들과 몇 권의 신앙서적들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남달리 책 욕심이 강했고 조금은 심할 정도로 내 것에 대한 집착이 남달랐었다. 좋은 책이면 빌려보지 못하고 빚을 져서라도 사야하고, 내 것으로 삼아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며 손 떼를 묻히며 ‘사랑하는 흔적’으로 소중히 여기던 사람인데. 글쎄, 어떻게 이 마음을 표현해야 할까? 그 또한 사치고 자기만족에 연연해하는 모습이겠으니. 새삼 부질없다는 생각과 함께 뒤늦게(?) 책에 욕심을 내는 형님의 소유욕과 맞물렸던 것인지도 모른다.
올해는 책을 좀 훌훌 털어버리듯 나눠주고 필요한 사람에게 거저 가져가게 할 생각이었다. 마음이 알싸한 것은 그 또한 내 개인의 욕구와 욕망의 증거이지 않았던가? 악착같이 책을 소유하고 싶어 했다. 밥을 두 번 굶고 책을 한 권 샀다. 대학 땐 책 도둑은 도둑도 아니라는 자가당착에 빠져 종종 서점에서 갖고 싶은 책을 여러 번 훔쳐다보기도 했었다. 연애시절 아내가 망보고 내가 책을 들고 나오기도 했으니까! 물론 그 시절은 어느 정도 묵인 하에 걸려도 꾸지람 한 번 듣고 말면 되었다.
한 번은 주인이 내 윗옷 속에 감춘 책을 빼앗아 그 제목을 한참 보더니 뭐라 한 마디하고 그냥 주었던 기억도 난다. 그 모든 게 돌아보면 집착이었다. 명절 때나 공휴일이 되면 그때 읽을 소설과 시를 한두 권씩 샀으니까. 신기하게도 누구에게 빌려서는 보지 못했으니, 나는 유독 밑줄을 긋고 책갈피에 낙서하듯 뭐라 메모하는 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어서였다.
이를 감안하여 내 책을 가져가시라 했다. 철학을 공부하는 조카는 맹자와 장자를 가져도 되냐고 묻고는 챙겼다. 나는 형님이 소장용으로 만든 어머니의 사진첩이 더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는 데 놀라고 있었다. 한 사람의 일대기가 사진으로 이어지고 그 가족사가 몇 마디 말로 엮여진 것이었으니. 증거하였던 말씀과 연관되어 내게는 더 큰 은혜를 선사하였다.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시 94:11).” 맞아, 그땐 그랬었지!
그런 우리를 오늘에 돌이켜 이처럼 주를 바라며 의지하는 삶이 되게 하셨으니,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마 5:15).” 내게 더하신 주의 은혜가 귀하고 귀할 뿐이었다. 안 믿는 가정의 여성은 물론 저들 가족이 대대로 섬겨오던 우상의 진상은 또 어떠하고! 형님도 감회가 새로운지 어머니의 사진 곳곳에 주의 말씀을 첨가하여 그 은혜의 복된 손길의 좌표로 삼은 듯하였다.
은혜가 크다. “우리는 필경 죽으리니 땅에 쏟아진 물을 다시 담지 못함 같을 것이오나 하나님은 생명을 빼앗지 아니하시고 방책을 베푸사 내쫓긴 자가 하나님께 버린 자가 되지 아니하게 하시나이다(삼하 14:14).” 죽어 마땅한데 우리를 소멸하기를 기뻐하지 않으시고 다른 방책을 베푸사 우리로 버려진 바 되지 않게 하셨다! 이 말씀은 곧 내 말씀이고 우리를 향한 말씀이었다. 다들 어찌 들었는가 알 수 없으나 나는 증거하면서 몇 번을 울컥하였다.
곧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계21:23).” 한데 우린 얼마나 어두운 데서 나름의 빛을 추구하며 살아왔는지. 돌이켜 지금 철학을 공부하며 나름의 가치를 추구하는 철학도 조카아이에게,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하는 말씀이 들려지고 새겨져 어느 훗날 주 앞에서 나와 같이 고백하게 하실 것을 믿는다.
오늘에 이르러 나에게는 그 말씀이 빛이어서,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나로 하여금 주 앞에 온전히 세우시기까지 결코 그 수고와 노력을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잠 6:23).” 그 말씀이 말씀으로만 있어 들려지고 마는 소리가 아니라 삶이 되고 우리의 남은 생이 되어 우리의 복된 날을 이루어가기를.
다시 묵상하여,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마 5:15).” 나는 한 게 없는데 나로 저 가정과 인연이 닿게 하시고, 내가 빛이 아니라 나로 비추게 하시는 이의 뜻에 따라 한평생을 같이 해오면서 은연중에 하나님도 또한 저들 자신의 생활을 어찌 주도하고 이끌어 가시는가에 대해, 형님도 어머니도 더는 이를 부정하지 못하는 자리에 이르렀으니. 우리가 함께 모여 주의 제단 앞에 예배와 경배를 올릴 줄이야.
나아가 이제는 그 등불을 밝혀 꺼지지 않게 하는 귀한 사명을 부여받은 것이었으니. “내게 말하던 천사가 다시 와서 나를 깨우니 마치 자는 사람이 잠에서 깨어난 것 같더라(슥 4:1).” 돌아보면 꿈만 같다. 내 안의 아집과 고집을 무너뜨리신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7).” 이것이 오늘 우리의 고백이 되고 간증이 되는 것에 놀라웠다.
성경을 더욱 알고자 하는 형님의 열망이 주 앞에 귀히 쓰일 것을 믿는다. 여전히 외면하고 부정하고 멀리하면서도 곁을 맴도는 조카아이의 쓰임에도 확신이 있다. 이는 모두 주가 이루시는 일이었다. 나를 어떻게 여기까지 놓으셨는지! 항상 그 증거가 내게는 있다. 고로 “땅이여 너는 주 앞 곧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시 114:7).” 전혀 그럴 리 없고 그럴 수 없다고 여기던 불가능한 인생이 주 앞에 은총을 받은 실제적인 예의 근거로 사는 삶이었으니.
“그가 반석을 쳐서 못물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