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일곱째 날에 일을 마치고 쉬었음이니라 하라
출애굽기 31:16-17
이 날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시편 118:24
기준이 없으면 표류하게 된다. 푯대를 향해 달려 나간 믿음의 사람들은 그래서 말씀을 붙들고 섰다. 안식일은 표징이고 상징이면서 실제이다. 쉼이 없는 생활로 인해 우리의 영혼은 황폐해진다. 그 시간에 게임을 하고 늘어지게 잠을 자는 것으로 쉰다고 하는 세대에게 ‘지켜서, 영원한 언약으로 삼으라.’는 말씀은 불편하기까지 하다. 그렇듯 마음이 주춤거릴 때 우리 마음에 푯말을 세우는 것이 오늘 시편의 말씀이다. 이 날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렇듯 우리가 선택한 게 아니라 선택하신 날이고, 우리가 세운 날이 아니라 세우신 날이다. 내가 하나님을 바란 게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바라셨다. 결코 우리의 선택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단지 안 믿는 사람들보다 좀 더 나은 삶을 살라는 것이 아니었다. 저들은 우리의 표준이 될 수 없다.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4).” 그게 누구라도,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고 지혜이다. 우리의 어떤 행위로나 수고로 얻어진 것이 아니다. 아,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9).” 그래서 이 귀한 걸 나 같이 보잘것없는 ‘질그릇’에 담으셨던 것이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새롭게 귀한 것 같다. 아이들이 들떠서 그런가, 글쓰기를 싫어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을 필사하게 하였다. 마침 중딩 아이가 용돈을 많이 받았다며 과자를 사서 아이들과 나누어 먹었다. 성경을 암송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한 녀석은 너무 거짓말을 태연하게 해서 돌려보냈다. 자신도 그것을 아는지 순순히 공부방으로 갔다.
괜히 우울하고 힘이 드는 하루였다. 모름지기 우울한 날이 있을 수 있고 즐거운 날이 있을 수도 있다. 우울할 땐 우울하면 되고 즐거울 땐 기뻐하면 된다.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 2:3).” 때론 나의 고통이 아이들을 헤아려 그 마음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2).” 우리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의 성품으로 답을 찾아야 한다.
그렇게 둠으로 설교 원고를 작성하였고, 아이들을 마주하였고, 주를 바라는 마음은 간절하였다. 곧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시 118:6).” 오늘 이 말씀이 절실하게 와 닿기 위해서는 내 편이 아무도 없다고 느껴지는, 우울한 날이다. 혼자 있지 않고 어찌 책을 읽겠으며 외롭지 않고 어떻게 설교 원고를 작성할 수 있겠나! 역설적이게도 하나님이 내 편이 되심을 아는 때는 내 편이 아무도 없다고 느껴질 때였다.
곧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7).” 그런 중에 아이가 마음을 열고 툭, 던진 자기의 마음이 서로의 위로를 필요로 하는 것이고. 내가 해줄 수 없는 것에 대하여는 다만 마음에 담아 주의 이름을 부르는 수밖에. 엄마가 2주간 외국으로 출장을 갔고, 그러는 동안 외할머니와 단둘이 설을 맞아야 하는. 우울한데 싫지 않고 차라리 그게 낫다는 아이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남자어른을 경계하고 싫어하면서도 그리 끌리고 마음을 두는 아이의 생활을 경계하였다. 모 학원은 온통 남자아이들이 사범도 코치도 남자들이라, 카톡을 하며 새근새근 웃는 얼굴이 마음이 걸렸다. 더는 뭐라 할 수 없는 지점에서 나는 주의 이름을 부른다. 공장에서 같이 일하는 형이 교회를 다니지 않아도 잘 대해주어 고마울 따름이고, 두 살 위 어느 누나를 짝사랑하면서 설레는 마음을 주체할 길 없으니. 한참 그럴 때고 한참 그럴 때여서 내가 뭐라 끼어들 자리가 없어 주의 이름을 부른다.
모르겠다. 나만 그런가? 자꾸 나에게는 더는 내가 어쩔 수 없는 경계에만 서게 된다. 전화라도 해봐야 하는데 전화조차 한들 소용없는 사이와 뭐라 말해주고 그건 아닌 것 같다고 해줘야 하는데 만나는 것조차 어려워지는 사이에서.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들과 미련한 것들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전 1:17).” 내가 기를 쓰고 마음을 기울인다 해도 소용이 없을 것 같은 것들에 대하여.
우리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일곱째 날에 일을 마치고 쉬었음이니라.” 하시는 말씀 앞에서 이해를 도모한다. 곧 내가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 더는 어쩔 수 없는 지점에서마다 결국 나는 어쩔 수 없음을 여실히 느끼면 느낄수록, “이 날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이라.”는 데 안도할 따름이다. 주가 계시지 않나! 내가 애쓰고 수고하는 것 같으나 실은 ‘그 일’을 내게 두시는 까닭은 나로 인함이었으니,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나로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도록.
그래서 기쁨은 마지막에 쓰는 카드다. 만사의 종착지에서 낼 수 있는 최종적인 안식의 마음이다. 이를 바울은 주 안에 있을 때로 규정하였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그럴 수 있는 건 주 안에서이다. 내가 추구하고 도모하여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여겨 '항상'에 방점을 찍고 인위적인 노력의 결실로 보는 경향이 많은 것 같다. 그게 아닌 것이다. 그래야 한다고 억지웃음을 말하려던 게 아니다. 분명히 우울한 그리스도인도 있고 유쾌한 그리스도인도 있다. 천성이 밝은 사람도 있고 천성이 어두운 사람도 있다.
여기서 우린 '항상'에 앞서 어떠하든 ‘주 안에서’의 일로써, 기쁨이란 우리가 어느 훗날 영원히 누릴 안식의 대명사로 쓰인다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것을 잠깐씩이나마 맛볼 수 있는 게 주가 정하신 날을 지킬 때이고, 매순간 더는 어쩔 수 없다고 느끼며 더는 힘에 겨워서 주의 이름을 부를 때의 안도감과도 흡사하다. 흔히 말하길 포기할 때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는 것과 비슷하다. 물론 이를 보다 성경적인 용어로 바꾼다면 순응이 되겠다.
어떻게 노아는 지치지 않고 120년의 긴 세월을 그처럼 한 가지 일에 매진하며 기뻐할 수 있었을까? 아브라함은 어찌 갈 바를 알지도 못하면서도 떠났고 그 길을 갈 수 있었을까? 자신을 포기할 때 말씀을 붙든다. 내가 어떻게 뭐라도 좀 해야 할 것 같을 때는 알 수 없는 마음이었다. 더는 아이에게 뭐라 해줄 말도 없고, 어찌 다가갈 수도 없고, 붙들어 세울 수도 없는 지점에서 내 수고를 포기하고, 내 의지를 포기하고, 내 안에 일던 안달하던 심정을 포기할 때 비로소 얻는, 안식 같은 쉼.
오늘 말씀이 그리 여겨진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고 하시는 덴 그저 한 날의 행사로 그리 취하라는 게 아니셨다. 이내 우리가 들어갈 영원한 안식의 기쁨을 알게 하시려고, 이를 맛보아 더욱 훈련이 되게 하시려고, 그래서 때론 더욱 강력한 포기를 경험하게 하시는가보았다. 거기에 따르는 게 기다림이다. 내가 저 아이 앞에서 더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심정으로 섰을 때, 주의 이름을 부르고 난 뒤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일이 있었으니, 기다림이다.
노아는 그 긴 세월을 기다림을 벗 삼아 방주를 지었던 게 아닐까? 아브라함의 노정은 말할 것도 없고. 비로소 내게 주신 이삭을 모리아 산에 올라 바치라고 하실 때도 크게 동요하지 않고 평안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의 성품으로만이 풀 수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내가 한 게 없는데 우리 아이들을 이만큼 반듯하게 키워주시고, 오늘의 교회에 ‘나 같은 사람’을 목사로 세워 그 자리를 지키게 하시는 것에 대하여도, 이 모두는 ‘만나’였다.
나는 새삼 나의 <만나 항아리>가 어떤지, 그 안에 담긴 갓씨 같기도 하고 꿀송이 같기도 한, 주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을 이제는 밤새도록 이야기해줄 수 있다. 심통난 사람처럼 뚱하니 말도 없고 시무룩하였던 며칠 동안 나는 그래서 그저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었다. 달리 더 좋은 게 없다. 다른 방도가 없다. 나의 포기는 더욱 주를 바라게 하는 자리가 되어주었다. 더는 어쩔 수 없다는 게, 묵묵히 기다림을 지탱할 수 있는 힘이 되어주는 것이다!
이내 하나님이 하신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마 6:25).” 이 말씀보다 막연하고 이 말씀보다 구체적이고 이 말씀보다 확실한 게 또 있을까? 말이 좋아 그렇지 뭐라도 해야 할 거 아닌가? 하고 '쉼' 없이, 주어진 '안식일'을 포기하면서까지 애쓰고 있을 때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말씀이다. 그러다 결국 두 손 들고 주 앞에 설 때에야 비로소 내게 두신, 이 놀라운 ‘만나 항아리’가 언제나 가득하였음을 확인하고 기뻐한다.
그래서 더는 내 의지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본(本)을 보이신 그 길, ‘아론의 싹 난 지팡이’를 짚고 걷는 것이다. 다른 걸 의지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는 걸 잘 안다. 그 어떤 친구도 가족도 일도 결과도 이에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만이! 결국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7).” 그 놀라운 사실은 내가 포기하는 자리에서 펼쳐지는 기가막힌 역설이었다.
이내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시 118:22).” 그 터,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엡 2:20).” 결국 나는 요즘 점점 늘어가는, 어쩔 수 없음 앞에서 좌절하고 실망하다 그래서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 비로소 안식을 얻는다. “이 날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24).”
그러므로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28).” 결코 변함이 없는 한 가지 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29).” 그러므로 “너는 나를 밀쳐 넘어뜨리려 하였으나 여호와께서는 나를 도우셨도다(13).” 곧 “여호와는 나의 능력과 찬송이시요 또 나의 구원이 되셨도다(14).” 이는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8-9).”
그러므로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2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