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출애굽기 33:14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
시편 119:50
늘 되새기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오늘 주를 바라는 것은 주께서 먼저 바라셨기 때문이다. 어떻게 될까? 하는 게 중요하지 않은 것은 어떠하든 그 모든 상황을 주께서 함께 하실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믿음의 사람들은 그럴 수 있었을까? ‘보이는 것이 나타난 것으로 된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그래서 다들 미리 알려고 하지 않았던가보다. 어떻게 먼저 대책을 세웠던 이도 없었다.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 갈 수 있었던 것은 거기가 어디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디든 하나님이 앞서 함께 가신다는 데 있었다.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래서 더는 안달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명절 앞두고 회사에서 준 선물이 많았던가보다. 공장에 같이 일하는 이가 아이를 집으로 태워다주었다. 그리고 교회로 오는 덴 피곤하기도 하고 꾀도 났을 테고. 기껏 기다리고 있는데 한 시를 넘겨 아이가 그런 상황을 말하며 못 오겠다고 하였다. 공연히 심통난 사람처럼 마음이 먼저 서운했다. 어쩔 수 없지, 하고 통화를 끊고는 갑자기 밀려드는 허전함으로 몸도 마음도 물에 젖은 종이처럼 볼품이 없어졌다. 명절을 앞두고 왁자한 사람들이 어려웠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든 달라질 것은 없다. 병적인 나의 조바심이나 불안증도 또는 누구에 대한 기대와 막연한 바람도 기어이 그 모든 것은 부질없는 것이어서, 안달하면 할수록 나는 힘에 겨워 몸서리칠 따름이다. 한데 이 또한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것이어서, 이 숱한 어쩔 수 없음에 대하여 주께 돌린다. 어디로 어떻게 가는지 알 수 없어도 누가 함께 하는지는 분명하여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출 33:14).” 그렇지,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시 119:50).”
말씀이 그대로 내 이야기가 될 때 위로를 얻는다. 누가 알아주길, 누군가 동행할 수 있길, 함께 하였으면, 저는 어떠한가? 바라는 마음은 영락없이 무너지곤 하였으니. 사람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저도 저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일 테니까. 다만 “주를 경외하는 자들이 나를 보고 기뻐하는 것은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는 까닭이니이다(74).” 우리가 서로 이해하고 서로를 기뻐할 수 있는 동력은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기 때문이라는 것.
비록 ‘이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 사는 사람이라.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히 11:13).” 이 땅에서는 이를 억울하다 생각하지만 믿음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주를 경외함으로 견뎌낼 수 있는 일이었다. 어떠하든, 어떠하다 한들. 아, 온유함이란 어린아이처럼 엄마만 찾는 것이겠구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눅 18:17).” 이는 다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답이 된다. 엄마만 있으면 되는 아이처럼 하나님만 있으면 되는 사람들이었다. 히브리서 11장의 사람들은 모두 그러하여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곧 사는 날 동안 그들이 딛고 가는 땅은 모두 저의 것이었다.
이러저러해서 아이가 오지 못한다는 말에 왜 그처럼 서운해 했을까? 하고 생각하다보니 그렇듯 멀어지고 또 가까워지는 원리가 세상의 속성이라. 은연중에 멀리하는 마음이 있고 이를 이겨내는 믿음이 아니면 불현듯 가까워지는 마음이라. 그렇게 교회를 멀리하고 하나님을 떠나다 또 소스라치게 폭풍우 가운데서 주의 음성을 듣게 되는 일이었으니! 아뿔싸,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시 119:92).”
고난이 득이 되면서 독이 될 수도 있다. 내가 아는 주변의 몇몇 이들은 그래서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간다. 저에게 고난이란 하나님도 별 볼일 없는 존재로 만들었다. 자신들이 바라는 것을 접지 않는 동안에는 이를 해결하려 들지 그 폭풍우 속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는 법이다. 그때까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떤 어려움 가운데 처할지, 이내 그 폭풍우를 뚫고 가야 하는 게 인생이었으니. 누군 그래서 주를 찬송하고 누군 그래서 주를 더욱 멀리하고.
나는 요즘 마치 새로운 것을 깨닫는 것 같다. 빛의 아버지로 계신 하나님을 알기까지 어둠의 구렁에 있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17).” 그걸 알기까지, 온갖 어쩔 수 없는 것들로부터 시달려야 하는 게 인생이었으니. 늘 변하여 채근하고 발목잡고 사람을 들들 볶는 인연들 속에서,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8).” 이를 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는 자,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 3:14).” 결코 변개가 없으신 분, 그러므로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3:5).” 우리의 다른 수단의 대명사 돈이 늘 훼방하는 세상에서. 다들 돈 때문에 교회를 떠나고 주를 멀리하는 것이다.
어떤 노파심이 또는 조바심이라 해도 좋다. 아이를 또 그냥 두지 않으려는 것을 느낀다. 보면 그 수가 다 뻔하다. 번번이 나는 망연자실할 뿐 정작 내가 아이의 마음을 붙들 수도 없고 돌이킬 수도 없고 어루만질 수도 없는 것이어서,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의 입의 교훈들을 내가 지키리이다(시 119:88).” 나조차 살 수가 없어 주의 인자하심을 바란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하나님보다 강한 것은 없다. 하나님과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다.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여전히 내 안에 두시는 아이들의 정체는 그래서 결코 유령이 아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이 놀라운 사실 앞에 흔들리지 않기를.
오직 우리에게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나를 외롭게 두시는 이도, 이를 힘겨워하여 때론 지치고 우울감에 시달릴 때도. 아,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나는 이와 같은 성경의 역설을 사랑한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2).” 수많은 저 믿음의 선친들이 비록 약속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해도, 저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였다. 그것으로 소망을 얻기까지,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3-4).”
도대체 어떤 정신 나간 사람이 환난을 기뻐하고 즐거워하겠나? 폭풍우를 개의치 않고 살 수 있겠나? 한데 그럼 그럴수록 그 가운데서 소망을 붙든 것이니, 저들에게 더하시는 믿음으로,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5).” 그런 마음이었구나. 나만 그러는 게 아니라 다들 그러는 마음들이 있었구나.
그래서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6).” 내가 아직 죄악 중에 있을 때, 허물과 죄로 죽어 있을 때, 아무런 소망도 없고 더는 그 영혼이 소생할 가망도 없다고 여겨졌을 때. 아, 그러니 누가 우리를 대적할 수 있을까?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8:31).” 모든 게 주의 영광이라.
오늘 이와 같은 말씀이 나로 살게 하신다. “내가 주의 법도들을 영원히 잊지 아니하오니 주께서 이것들 때문에 나를 살게 하심이니이다(시 119:93).” 그러므로 “나는 주의 것이오니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의 법도들만을 찾았나이다(94).” 그래서 더욱 주를 바라고 의지하게 하시려고. “내가 주의 증거들을 늘 읊조리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나으며 주의 법도들을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나으니이다(99-100).”
고로 나 역시 모세와 같이 기도한다.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 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출 33:15).” 이에 주님이 이 아침 답하신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1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