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

전봉석 2019. 2. 7. 07:07

 

 

 

거룩한 관유와 향품으로 정결한 향을 만들었으되 향을 만드는 법대로 하였더라

출애굽기 37:29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

시편 122:9

 

 

단 하나도 같은 게 없는 지문처럼 각 사람마다 그 형질과 기질이 다르다. 저마다 저도 어쩔 수 없는 게 각기 다른 성질이고 형태이다.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로 모여서 향기를 내는가 하는 것을 주목하게 하는 게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 이야기가 아닐까?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때론 마음이 상하고 그래서 누구에게는 상처가 되기도 하지만 정작 그러는 자신도 자신을 어쩔 수 없는 것이었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14).” 본향에 들어가기 전까지 버릴 수도 벗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같은 말이라도 왜 저렇게 하나 싶게, 남의 말에는 예민하고 자기 말에는 둔감한 법이어서. 사는 데 있어 상처 없이 사는 삶이 어디 있겠나. 내가 말해놓고도 그게 아닌데 발끈한 뒤에 후회가 밀려드는 게 어디 한두 번인가.

 

차를 가져다 타기로 했는데, 수리비가 너무 들어 돌려주었더니, 뭐라 해서, 그냥 죄송하다고 했다는, 아들애의 카톡 내용에 그저 잘했다 하고 말해주었다. 되레 상대의 기질이나 성질 때문에 자신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도 된다. 때론 사는 게 지옥이라, 그 속이 속이 아니어서,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막 9:49).” 무슨 일로 통화하다 그것이 너였다는 데 주의를 환기시켰다. 나도 다를 바 없이 우리는 다들 그러하여서 그럴 수밖에 없는.

 

“그 내장과 그 정강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가져다가 제단 위에서 불살라 번제를 드릴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레 1:13).” 그러니 날마다 제사라. 우리 삶이 드려져야 하는 덴 그 고약한 냄새 때문이기도 하겠다. 결국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고후 2:15).”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 5:2).”

 

같은 말이라도 서로 아, 다르고 어, 다른 것인데. “그 때에 썩은 냄새가 향기를 대신하고 노끈이 띠를 대신하고 대머리가 숱한 머리털을 대신하고 굵은 베 옷이 화려한 옷을 대신하고 수치스러운 흔적이 아름다움을 대신할 것이며(사 3:24).” 우리의 고약한 심보는 자신도 주체할 수 없는 일이어서, 날마다 저지레하듯 그 모양 그대로 주 앞에 서는 것이 묵상이고 참회이다. 후회와 또 수치가 밀려들지만 항상 지나서 엎지르고 난 뒤였으니, 누구보다 내가 그런 사람이지 않던가.

 

내 방식대로는 안 된다. 한다고 하는데 의지로는 이겨낼 수 있는 게 아니라. “거룩한 관유와 향품으로 정결한 향을 만들었으되 향을 만드는 법대로 하였더라(출 37:29).” 그것을 ‘만드는 법대로’ 해야 하는 것으로, 우리에게 기념하게 하신 두 번째 특징이 ‘아론의 싹 난 지팡이’였다. 그렇듯 본을 보이신 대로, 내 안에 얼마나 많은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이 있던가. 내가 알아서 해, 나도 알아, 하는 식의 태도가 늘 고약한 것이어서.

 

그럼에도 부대끼고 서로 보듬고 이해하고 품고 사는 게 가족이듯이 ‘선생이 되기보다 양육하는 자’가 되라는 이번 설의 설교 말씀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마 23:8).” 그러게. 은연중에 몸에 밴 습성 중 하나가 자꾸 훈계질이다. 남에 대해서는 어쩜 그리도 말을 잘 하는지, 정작 자신을 향한 소리는 들으려 하지 않는 것이니.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약 3:1).”

 

말씀 앞에서 막연하였던 뉘우침이나 부끄러움이 아이와 있으면서 ‘유쾌한 회개’가 된다. 여덟 시도 안 돼, 10시까지 갈까요? 하고 문자가 오더니 정작 아홉 시를 조금 넘겨 복도 저만치서부터 목사님, 하고 부르며 들어오는 것이다. 세뱃돈 받은 것도 있고, 지갑이 두둑하여 뭐 맛있는 걸 점심으로 먹자며 마음부터 들떠 있었다. 일기부터 쓰게 하고, 같이 시편을 읽고 이를 한두 구절 필사를 하게 한 뒤 두서없이 대화가 오가는 동안, 어디가 부족하다는 건 그 절실함을 무기로 삼는 것이란 생각을 하였다.

 

그런 아이의 어떤 간절함을 나는 사랑한다. 나의 열등의식이나 괜한 피해망상이 도리어 더욱 주를 바라고 의지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을 항상 아이를 통해 깨닫게 하신다. 아내와 딸애는 서울 외가에 갔고 나는 아이와 시간을 보냈다. 녀석이 심심해해서 모처럼 같이 코인노래방에도 갔다. 그러는 것, 그리 마음 쓰고 그만큼의 자리를 내어주는 일은 딱 그 자리를 비워놓는 것이어서 고약한 냄새를 풍기지 않아도 된다.

 

마치 어린아이 앞에서는 누구나 무장해제가 되는 것처럼. 영혼이 맑다는 것은 흠과 티가 없이 산다는 소리가 아니라 거짓과 꾸밈이 없는 정직함으로 빚어지는 모양이었다. 그러려면 본을 따라야 한다.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히 8:5).” 나는 어느 쪽이냐의 문제가 아니다.

 

어느 쪽이든,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사 30:21).” 바른 길을 알고 그리로 가려 하는 데는 내성적이든 외형적이든 기질과는 상관없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른 길이니 이리로 가라.’ 하고 성경이 본을 보이는 것,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5).” 그러려니 이해하고 또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내가 헤아림을 받는 일이었으니.

 

말처럼 쉽지 않으니 나로 자꾸 결핍을 느끼게 하신다. 아이를 보고 아이의 순수함이 아이의 병약함에서 나오는 것임을 감사히 여기게 하신다. 어떤 경우도 스스로 순수할 수가 없는 게 사람이다. 내가 나를 봐도 안다. 나보다 모나고 고집스럽고 자기밖에 모르는 위인이 또 있을까? 내가 어릴 때부터 아는 선생님은 지금도 여전히 까칠한 사람이야! 하고 누가 말해줄 때면 의아하다. 그리 여겨질 게 뭐 있나싶다가도 모질게 외면하고 거리를 두고 그만큼 차가운 사람으로 살고 있었구나, 하는 걸.

 

때로는 터무니없이 대꾸도 않고 말 수를 없이하면서 혼자 끙끙거리는 고약한 심보였다. 오늘 말씀에서 나는 그 정해진 법대로 하라는 말씀이 귀에 꽂혔다. 기준이 모호하면 자기가 늘 바르게 가는 줄 안다. 남의 차선을 넘나들면서도 다른 차들이 왜 자꾸 빵빵거리는지 자신은 모른다. 아,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예수를 알자. 예수만 붙들자. 예수로 살자.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 1:16).”

 

그저 나의 소극적인 태도는 말을 말자, 외면하자, 그러려니 덮어두자, 상종을 말자 하는 식이었는데 정작 그러느라 자신이 외로운 법이다. 곁에 남아날 사람이 없다. “의인의 열매는 생명 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잠 11:30).” 나의 모난 자아가 나도 어쩌지 못하는 것이어서, 애통해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 9:19).” 그렇구나.

 

섬김이란 말로 되는 게 아니다. 실천으로 이뤄질 게 아니다. 오후께 아이가 돌아가고 혼자 집에 있으면서 숨이 턱, 막힐 정도의 어떤 고독감에 짓눌리면서 생각하였다. 나는 나로 나를 어찌할 수 없으니, 주여 나를 도우소서. “여호와여 멀리 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시 22:19).” 아뢸 수 있고 고할 수 있는 통회하는 마음이 복이었다. 그게 뭔지, 왜 그래야 하는지 그걸 모르고 사는 게 두려운 일이었다.

 

그러므로 “여호와여 은총을 베푸사 나를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40:13).” 오직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121:2).” 어제 묵상하였던 말씀이 그 모든 의미의 열쇠였다. 나의 도움은 오직 하나, 나를 지으신 하나님 여호와뿐이시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은 한 걸음 더 딛고 나아가게 하신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122:9).” 마음이 상할 때, 저로 인하여 내가 상처를 받았다고 여겨질 때.

 

저도 어쩔 수 없는 저의 일에 대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나의 헤아림을 얻고자함이었다. 그래서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122:1).” 함께 하는 발걸음이 복인 것이다. 서로 성가시고 부대끼고 때론 그것으로 상처를 받고 살지만, 그러니 우리 같이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그만큼 이해하고 또 마음을 다할 수 있는 것이 기쁨이었다. 아이의 그런 부분을 더욱 안쓰러워하면서도 귀하게 여길 수 있는 비결.

 

“네 성 안에는 평안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함이 있을지어다(7).” 그러는 동안 그래야 내 속이 편하다. 꾸미지 말고 더하지 말자. 누가 누굴 뭐라 하겠나. 상처는 정작 더 나은 방어를 깨닫게 한다. 그리하여 “내가 내 형제와 친구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에 평안이 있을지어다(8).” 왜 자꾸 남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 그 중보가 결국은 내게 바라는 주의 인자하심을 구하는 일이었으니.

 

곧 들어갈 우리의 본향을 향하여,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