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이것으로 회막 문 기둥 받침과 놋 제단과 놋 그물과 제단의 모든 기구를 만들었으며 뜰 주위의 기둥 받침과 그 휘장 문의 기둥 받침이며 성막의 모든 말뚝과 뜰 주위의 모든 말뚝을 만들었더라
출애굽기 38:30-31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시편 123:1
‘이것으로’ 각각이 모아 바쳐 ‘만들었으며 만들었더라.’ 모두의 열정과 성의는 각각 그 필요에 따른 합을 모아 계산한 것이겠다. “이것으로 회막 문 기둥 받침과 놋 제단과 놋 그물과 제단의 모든 기구를 만들었으며 뜰 주위의 기둥 받침과 그 휘장 문의 기둥 받침이며 성막의 모든 말뚝과 뜰 주위의 모든 말뚝을 만들었더라(출 38:30-31).” 우리가 주를 바라는 것인지, 주가 우리를 바라시는 것인지. 내가 주의 일을 하는 것인지 주께서 우리로 주의 일을 하게 하시는 것인지.
아무튼 전혀 다른 세계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구별된 자로 사는 그리스도인의 경우이다. 그리 여겨지고 들려져 자신을 모아 그 중심을 다하는 삶이겠다. 아이가 제대 후 다시 블러그에 묵상글을 올렸다. 말씀을 읽고 서너 줄 가량 자신의 마음을 다지고 말씀을 붙들어 새롭게 각오하는 내용에 가슴이 뭉클하였다. 주가 이끄신다. 내가 하는 일이 아니었다. 풀어놓아 그 마음을 아뢸 때 주가 선도하심을 체험할 수 있다. 저마다의 무게는 다르겠으나 그 삶 가운데 운행하시는 하나님을 뵈옵는 일은 하나다.
그저 육신의 생각에 갇혀 사는 자들의 삶의 표준과는 엄연히 다른 것이다. 누가 설 연휴를 어찌 지냈는지, 손자 손녀들까지 하여 저들과 보낸 시간을 너스레떨 듯 이야기할 때의 어떤 허망함에 대하여. 그것으로 족하다며 그저 먹고 사는 문제로 다들 그럭저럭한 게 인생의 즐거움이라고 하니, 뭐라 거들 말이 없어 그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또 누구는 퇴직을 앞두고 신학을 공부해볼까, 신학을 공부하면 아예 목사안수까지 받아야 할까, 그리 묻더라고.
우리는 다들 저마다의 시선으로 그의 앞뜰을 밟고 산다. 사는 날 동안 생의 보람과 즐거움을 최선으로 삼으니, 되레 하나님께 대한 열의와 열정이 우리로 하여금 그릇 된 길로 행하게 하는 오만함의 숨은 얼굴일 수도 있다. 부르심은 엄연히 부르심이다. 그럴 때 뭐라 해줘야 해? 하고 아내가 물었을 때 나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퇴직하고 뭘 할까 고심 중이고 그러는 중에 신학을 공부할까, 그래서 목사가 될까, 한다는 저의 마음의 출처를 나는 사실 알지 못한다.
고등학교 때 친구 중에 하나가 뜬금없이 이제 신학을 시작했는데, 하와이? 그 어디로 훌쩍 선교를 나갔다가 생활해 보니 ‘목사 타이틀’이 절실하였다고 하며 귀국하여 신학을 공부하고 있으니. 솔직히 나는 저의 열심에 대하여도 뭐라 할 말이 없다. 물론 그럼에도 그 모든 일을 선으로 이루어 가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알지만, 그런저런 동기와 목적이 그러한 마음에 대하여는, 나는 사실 잘 모르겠다.
한데 한 가지 특징들이 있다면 그것을 의욕이라고 해야 할지 어떤 열심이라고 봐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모세오경을 원어로 암기를 해야 한다느니, 어디 가서 오로라를 봐야 하는데 오로라는 하나님의 에너지라느니. 목사 직함이 무슨 일을 추진하는데 용이하다고 여겨 뒤늦게 자원하여(?) 신학을 한다는 친구나 퇴직 후 무얼 할까, 하는 궁리 가운데 하나로 신학을 공부하고 내친김에 목사까지 될까, 한다는 말에 나는 그저 쩝, 할 말이 없을 따름이다.
내가 아는 부르심이란 그게 그저 낭만적인 게 아니어서. 저항이 하도 만만치 않아, 오죽하니 불안장애로라도 꿇어앉혀 두실까 싶을 정도인데. 감히 정의하자면 부르심이란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고후 6:17-18).” 내가 아는 내 곁의 제대로 된(?) 목회자는 다들 그런데.
그래서 나는 열심이 충만한 사람들의 신앙을 의심한다. 자기 수고에 연연해하며 자부심을 갖고 애쓰는 사람을 신뢰하지 못한다. 하나님을 빙자하여 저의 열심을 다하는 그 일들을 보고 있으면 위태롭기만 하다. 차라리 나는 오도 가도 못하는 이의 엉거주춤한 사투를 사랑한다. 주 앞에 엎드려 쩔쩔매는 이의 간절함이 귀할 따름이다.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시 123:1).” 안 그러고는 살 수가 없어서. 내가 무슨 일을 맡아 잘 준행하기는커녕 자꾸 망치고만 있는 것 같아서.
몸 둘 바를 모르겠고 그저 매순간이 송구할 따름인데, 누가 우리를 부러워한다고. 하나님이 두시는 평안과 안정은 감추려 해도 감출 수 없는, 등경 위에 둔 등불과 같아서. 그런 소리를 들을 때면 우쭐하는 게 아니라 되레 더 민망하고 면구스러워 고개를 들 수 없는 일이었으니. 내가 아이들을 잘 키운 게 아니라 잘 자라준 일이어서 그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할밖에. 달리 어떤 말로도 할 말이 없게 만드는, 오늘의 내 모습이 제일 부럽다나!
분명한 건, ‘그들 중에서 따로 있어’ 더는 부정한 것을 추구하지 못하게 하시는, 주의 강권하심을 몸과 마음으로 확신하기는 한다. 모든 게 힘에 부쳐 내가 주를 바라는 마음이,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2).” 간절하게 하시는 이의 구별되게 하심이 귀한 것은 사실이다. 또한 이와 같은 믿음으로 주를 기쁘시게 한다는 데도 확신한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그저 주의 이끄심을 믿을 뿐이지 지금의 현실을 좋아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명절 연휴 동안 긴장하고 경직된 몸으로 있어서 그런가, 어제는 온 몸이 다 아팠다. 급기야 왼쪽 어깨가 결려 목을 가눌 수도, 눕기도 어렵다. 허리가 아파 30분 이상 한 자리에 앉아 있기도 힘들다.
누구에게 안부를 묻거나 전하지도 않았다. 열등의식 때문이든, 먼저 연락하고 안부를 묻고 뭐라 오지랖 있게 구는 게 어렵다. 그래서 외롭고 고독한 마음에 대해서는 구구하게 말하기도 싫고. 이를 두고 누구는 나의 ‘사회성 결여’라고 하는데 이에 충분히 동의한다. 온갖 지질함의 총체적 난국이라 해도 할 수 없고. 이 사명이 귀하지만, 안 해도 되고 안 할 수만 있으면 지금이라도 안 했으면 좋겠다. 난 고작 그 정도일 뿐이어서.
그러니 하는 것도 없는 사람이 이런 소릴 하면 우스갯소리밖에 안 되지만. 나는 종종 내 몸 하나 건사하는 일에도 힘에 부친다. 주 앞에서 이는 어떤 어려움에 대하여는,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은혜를 베푸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시 123:3).” 조심스럽지만 이런 마음도 있다. 나는 이제 사람들의 멸시나 동정에 크게 마음을 두지는 않는다. 물론 기분이 좋지는 않지만 그래서 무시당하는 게 오히려 낫다고 느껴질 때도 많다. 주목 받지 않고 인사 받지 못하는 주제가 오히려 감사하다.
“안일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영혼에 넘치나이다(4).” 그래서 더욱 주를 바라게 된다면 너무 억지스러울까? 그래서 나는 ‘목사’를 낭만적으로 생각하는 이들의 꿈과 열심에 대해서는 뭐라 할 말이 없다. 옳고 그름의 문제로 생각하는 게 아니다. 그런 마음과 맹랑한 소원도 주께서 사용하실 것을 믿는다. 어떠하든 선으로 인도하실 주의 선하심을 믿는 것이지 저들의 의도를 선하게 여기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두렵고 무섭고 한심하다. 목사나 될까 한다니!
나는 그런 점에서 아이의 짤막한 고백이 귀하였다. 점점 안이해지는 마음을 어찌할 수 없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결국 우리로 넉넉히 이기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신 것이지 우리의 열심도, 근사한 각오도, 어떤 거창한 포부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 저의 올무가 되지 않을까?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 그 이김은 나의 낮아짐에서부터였다. 다른 말로는 어쩔 수 없는, 지질함으로.
때론 억지춘향이처럼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그저 그냥 행할 따름이다. 여기 두셨으니 여기가 좋아서가 아니라 여기에 두신 까닭으로, 이 몸이 좋아서가 아니라 이 몸으로 가게 하시니까! 그래서 누가 나를 부러워한다는 말이 종종 좋게만 여겨지지 않는 것은 저들의 거들먹거리는 판단 때문이다. 성령을 돈 주고 사려 했던 누구처럼 주의 열심을 자기 열심으로 사려 하는, 어리석음이 중첩되는 까닭이다. 내가 모난 사람이어서 그런가? 믿음이 중요하나 믿음이 중요한 건 하나님과 나를 잇는 통로일 뿐이다.
결국은 하나님과의 관계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 5:45).” 주가 행하신다. 내가 무얼 남보다 잘했더니 이리 된 게 아니다. 내가 우쭐할 아무 것도 없다. 여전히 도망치고 싶은 마음도 있어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요 8:42).”
마찬가지로 우리가 스스로 여기 있는 게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로 여기 두신 것이다. 저 짜증나는 아이를 마주하게 하시고, 또 똑같은 일로 싫증나고 넌덜머리나는 일에 관여하게 하심으로. 우리 곁에 두시는 저 한 영혼을 위해. 어쩌면 우리가 참 싫어하고 꼴 보기 싫고 미워할 수밖에 없는, 아이나 아이엄마를 상대하게 하심으로. 기도할 줄 모르는 저 아이를 대신하여 주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아이엄마의 돼먹잖은 성질머리를 상대하면서. 그러라고, 잠자코 도망치지 말고 그러라고. 때론 힘겨운 육신으로, 불안에 떠는 정서로, 늘 회의하는 마음으로.
그러니, 그리하여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시 123: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