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
출애굽기 40:38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
시편 125:2
앞으로 어떻게 될지, 장차 무슨 일이 생길지, 우리가 미래를 어떻게 책임지는 게 아니다. 그건 우리에게 두신 일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가라, 하시는 이의 뜻을 따라 그와 동행하는 것일 뿐. 정작 미래는 그가 예비하셨다! 그것이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붙들고 나아갔던 확신이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히 11:13).”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는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고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도 환영하며 사는 외국인이고 나그네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더하신다. 지혜란 주를 경외함이고, 지식이란 하나님을 아는 영생이며, 희락이란 하나님과 같이 웃는 웃음이다. 가령 아흔한 살의 사라가 웃었고 이를 보며 아브라함도 웃었다. 그 웃음을 하나님은 나무라시기보다 함께 웃으심으로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게 하였다. 이삭은 웃음이다.
토요일 오전은 그렇게 금세 지나갔다. 아이가 들뜬 기분으로 12시도 안 돼 왔다. 먼저 일기를 쓰고, 같이 점심을 시켜먹고, 성경공부를 한 뒤, 카페에 내려가 책을 읽었다. 그러고 싶어요, 할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면 그리 하려고 한다. 외롭죠, 저는 친구가 없잖아요, 하는 말이 명징하게 가슴을 울렸다.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시 70:4).” 아이가 옮겨 적은 말씀이 오묘하게도 나의 마음을 울렸다.
웃음과 울음은 같은 맥락의 의미다. 웃다보면 눈물이 다 난다. 예수님이 친구 나사로가 죽어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 11:35).” 단지 이를 불쌍히 여겨 동정하고 슬퍼하는 마음으로 읽어야 할까? 나는 그 눈물이 희락의 웃음과 같다고 생각한다. 곧 저의 부활을 알고 계심으로 믿기지 않는 바로 그 장래의 일을 행하심에 있어, 먼저 아브라함과 사라의 웃음과 같이 아직 잘 모르지만 그럼에도 믿어지는, 웃음이다.
저들이 믿을 것을 아는 하나님의 웃음이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인데 믿어야 하는 일이 아니라 믿기지 않는데도 믿어지는 웃음이었다. 희락이란 세상에서 볼 때 난해하고 천상에서 볼 땐 단순하여 서로가 통하는 웃음이다. 그러니까 나는 종종 아이의 엉뚱하고 횡설수설하는 말 가운데 있으면 아이의 고백이 말도 안 돼서 웃다가 그 순수한 고백으로 마음이 명징하여서져서 웃는다. 웃음은 웃다가 눈물까지 나고 주체할 길이 없어서 숨이 넘어갈 것 같다.
숨이 넘어간 친구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예수님의 눈물은 단지 불쌍하고 서러워서 우신 것이 아니다. 아무도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영광에 의한 저의 부활을 아시고 박장대소한 뒤에 저절로 흘러내리는 웃음 같은 아니 눈물 같은. 단지 우리가 불쌍해서 시도하시는 구원이라면 그렇게까지 할 게 아니었다. 신이 사람이 되기까지, 대신 죽어 부활을 이루기까지, 그렇듯 낮고 천해지실 이유가 단지 우리를 불쌍히 여겨서란 말인가!
예수님의 눈물은 그 근원이 희락이다. 약속의 씨, 이삭이다. 웃음이다. 아이와 같이 있으면 단지 저 애를 동정해서 마음이 저미고 가슴이 울렁거리는 정도로는 사랑할 수 없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런 게 아니었다. 내가 ‘이런 애’랑 지금 뭘 하고 있는 것인가? 하고 웃는 어이없는 웃음도 아니다. 그 고백,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시 70:4).” 하는 말씀을 필사하고 감응하는.
의롭다는 말, 혼자라는 말에 숨이 턱, 막히는 것처럼 가슴이 찡하다가도 다음에 이어지는 웃음 같은. 종종 아이와 같이 있다 보면 웃음의 출처를 알 수 없다. 별 것도 아닌 일에 저절로 풋, 하고 터진 웃음이 나중에는 눈물이 쏙, 빠질 정도로 배를 움켜쥐고 웃어젖히는 것이다. 아,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깊이가 그 위에 가득한데 이를 해결하는 방도는,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창 1:3).” 이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하시는 말씀과 같은 맥락의 것이다.
쉼이란 수고 뒤에 이어지는 것이고 웃음이란 슬픔 뒤에 따르는 희락이다. 아이가 무심결에 표현한 외롭다, 혼자다, 하는 말에 가슴이 먹먹하였다가 순간 그것으로 주를 찾고,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것이구나! 생각하면서. 이것과 저것이 이어졌고 저것과 이것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사로의 죽음은 단지 죽음으로 끝나는 죽음이 아니었고 그 앞에서 예수님의 눈물은 단지 슬픔으로 슬픔을 견디지 못해 흘리시는 눈물로 그치는 게 아니었다. 어떤 환희다. 당장은 뚜렷하게 알 수 없어도.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나는 설명할 길이 없다. 다만 그리 여겨지고 믿어지는 것은, 장차 어찌 될지 알 수 없으면서도 무작정 길을 나섰던 아브라함의 확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에 대한 분명한 증거 같은. 내가 왜 이 아이와 이러고 있는 게 좋은가? 웃다보면 안다.
종종 아이와 웃어젖힐 때 아내와 딸애가 덩달아 웃으면서 하는 말,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창 21:6).” 곧 하나님이 우리로 함께 웃게 하신다. 결국은 동행이다. 동조다. 참여다. 그 뚜렷한 구분은,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출 40:38).”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수면 위로 운행하신다는 것.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2).” 분명히 약을 더 올려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게 한다는데, 토파민이 어떻고 감정이 어떻고 하는 아이의 설명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오전에 병원에 들러 석 주치 약을 탔는데, 어떻데? 하는 나의 물음에 장황하게 설명이 이어지고, 결국은 똑같거나 더 나빠졌다는 소린데, 아무래도 상관없는.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수면 위에 운행하시는!
우리의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깊음은 ‘거기 계셨더라면’ 하는 하나님 부재의 증거다. 저들은 알고 있었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 11:21).” 이는 이중적인 의미다. ‘~하였더라면’ 하는 변명의 의미이면서 동시에 주님의 부재가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에 대한 고백이다.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32).”
저 아이가 교회에 와서 같이 웃을 수 있는 우리 웃음의 출처는 희락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웃음이다. 그리 맛보아 앎으로 다음의 모든 사실들, 약을 더 올렸대요. 상태가 나빠져서가 아니라 좋아지게 하려고요. 뇌에서 도파민을 유지시켜주고 감정을 억제하며, 이어지는 아이의 말에 슬픔이 웃음이 되는 어떤 변화 같은. 흑암이 공허가 혼돈을 전혀 개의치 않아도 되는, 사라의 웃음 같은. 그 웃음은 어이없어서 웃는 웃음이지만 믿을 수 없는 천사의 말이 믿어져서이다.
그 웃음은 아브라함에게 또한 천사에게 옮겨져, 저들이 믿을 수 있겠나싶었는데 믿어서 웃는 천사의 웃음이고. 이 말씀을 곧이곧대로 믿어도 되나싶은데 그게 그냥 의심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리 믿어져서 웃는 사라의 웃음이었다. 하나님은 이를 나무라지 않으셨고 도리어 그 증거를 이삭이라 이름 지어 저의 이름의 뜻이 웃음이라 하였으니. 아이가 돌아가고 비로소 뭔가 확실히 맞아떨어지는 어떤 이해가 있었으니, 우리에게 주시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은 하나였다.
곧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시 125:2).” 우리를 두르시는 하나님의 웃음 같은 확신이었다. 한 날 안에 이 많은 비밀들이 들어있었다. 환희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 1:4).” 이로써 웃을 수 있는 웃음이었다.
이로써 우리가 우리의 눈으로 보았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시 125: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