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그 소제물 중에서 기념할 것을 가져다가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레위기 2:9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시편 127:1
모든 일이 느닷없는 법이다. 난데없고 당황스럽기까지 하면서. 어쩐다? 마음이 조금은 어려웠고, 신경이 쓰이는 건 사실이어서 가슴이 답답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저녁에 가정예배로 둘러앉아 함께 읽은 말씀의 위로라니!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었느니라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니라(민 15:41).” 종일 끙, 하고 있던 마음을 단박에 녹여주시는 말씀이었다. 하물며 교회이지 않나!
앞서 로이드 존스 목사의 사도행전 강의 설교를 읽고 있었다. 교회에 대한 저의 인식에 나는 전적으로 동감하였다. 건물도 아니고 어느 지엽적인 무엇도 아니다. 더 들어가, 우리가 하려는 모든 행위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노년에 아브라함에게 던져진 느닷없음은 ‘떠나라’는 것이었고, 모세 앞의 떨기나무는 주의 백성을 출애굽시키라는 것이었다. 저들이 구상하고 모의하고 계획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 내용을 읽고 있을 때 사장이 건너왔다. 저는 솔직하게 그 건물을 얼마에 담보로 자금을 융통하고 있는지, 대출 갱신기한이 되어 새로 심사를 받는데 교회가 들어가 있어 난처하게 됐다는 것이다. 간판이나 베너에서 ‘교회’ 글자를 좀 치우면 안 되는가, 하고 물었다. 그러시라하고 ‘글방’만 남겨두고 치웠다. 사진을 찍고 혹시 평가원이 나오면 그러자고 했다. 그리고 한참을 지나 교회법인 등록이 돼 있어 안 된다는 것이다. 어쨌든 20% 상환을 하게 됐다나.
문제는 그게 일 년에 한 번씩 이뤄지는데 그때마다 교회가 있으면 그때도 또 20%를 상환해야 한다고 했다. 내가 어찌 해줄까? 교회 주소지를 집으로 돌리면 되겠다 싶어서 소속된 교회 연합회에 문의했다. 무방하단다. 한데 이미 집에서 아내가 개인과외교습소로 사업장(?) 신고를 하고 세무등록이 돼 있는 것이니, 그럼 한 주소지로 두 사업장을 낼 수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럼 그걸 폐업신고를 해야 한다는 소린데. 일이 좀 난감하게 되었다.
사장을 불러 그러하면 우리가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게 낫겠나? 물었다. 정 그렇다면 그럴 수도 있다는 걸 미리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한데 저이의 마음은 가상하여 교회가 나가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다. 나가도 같은 지역이나 같은 건물로 알아봐야 할 터인데, 무엇보다 주인이 붙드는 일이라 저의 처지도 난감하였다. 어떻게 방법을 찾아보겠다는 저이의 말에 나는 힘내시라, 하고. 어찌 그리 태연한가, 내 모습이 되레 이상하였다. 저의 말처럼 교회가 나가면 신용등급이 올라 되레 서업 자금을 더 끌어 쓸 수 있다고 하면서. 그러니 어쩐다?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출 6:7).” 그럼 어떻게 해? 하고 아내가 물었다. 정 안 되면 세무서에 등록된 교회 등록을 없애면 되고. 그게 뭐 그리 중요하겠나! 내가 그리 의연한 사람은 아닌데 정작 일이 터졌을 땐 어디서 이런 여유가 생기는지 모르겠다.
하나님이 하시지 않는 우리의 모든 수고는 허사다. 교회를 인위적으로 꾸미고 의미를 부여하여 장소와 건물에 연연해하는 것이야 말로 우습다. 정 안되면 집에서 드리면 되고, 이럴 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하는 말씀의 의미가 크게 와 닿는다. 오히려 마음 졸이고 주인이 나가라 할까 신경을 써야 하는데 도리어 주인은 우리가 그럼 나간다고 할까봐 나서서 마음을 쓰니까.
‘되어지는’ 일은 천지차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29-30).” 느닷없는 일이 없을 수는 없겠으나 일어나는 일 중에 괜한 일이란 또한 없는 법이다. 하물며 교회이지 않나! 결코 교회로 손해 보게 하시지 않을 것을, 나는 주인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이리저리 모색하고 은행에 가서 상담을 하고 어찌 마음을 졸이는지는 모르겠으나 되레 나를 안심시켜 목사님은 신경 쓸 거 없다면서 위하니, 나는 저의 마음씀을 주가 축복하시기를 기도하였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다. 우리는 신을 찾아가지 않는다. 우리가 애쓰고 수고하여 이루어가는 교회도 예배도 종교도 실상은 모두 가짜다. 보면 항상 하나님이 먼저 시작하신다. 앞서 묵상하였던 히브리서에 등장하는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 같이 체험한 공통점이다. 노아는 죄악된 세상을 한탄하며 더 나은 세상을 꿈꾸고 구상하느라 방주를 지은 게 아니다. 아브라함은 더 늙기 전에 삶의 보람을 찾고자하여 길을 나선 게 아니다. 모세가 언제 출애굽을 계획했던가?
다 하나님이 시작한 일이다. 나야말로 내가 언제 목사가 되어 한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사역을 감당하겠다고 나섰던가? 모세가 주저하며 자꾸 변명으로 지연했던 것처럼 나 또한 안 할 수 있으면 안 하겠다고 그 먼 길을 돌고 돌았던 사람이라. 이제 와서 교회 이름을 지우고 글방만 남겨야 하든, 장소가 이보다 못한 곳으로 옮겨가고 아예 집으로 들어가야 하든. 물론 마음은 어렵지만, 주의 멍에는 쉽고 그 짐은 가볍다. 여태 살아오면서 목사로 사는 게 가장 쉬웠다. 한 영혼을 품고 씨름하는 게 그래도 가장 가벼운 일이었다.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돈을 굴리고 여기서 빼서 저기로 옮겨 사업을 하는 사람이라, 사장의 초췌한 얼굴에 오히려 위로를 주고 싶었다. 커피를 한 잔 내려주고, 수고하시라 인사를 건네면서. 저는 죽었다 깨어나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랄 줄도 바라지도 않을 것이어서 그게 참 신기한 노릇이다. 그리 난처한 상황이면 우리가 나가는 게 나을 텐데, 안 그러시길. 그러지 마시라. 다른 길을 찾아보겠다. 너무 마음 쓰지 마시라. 오히려 저가 나를 붙들고 위로하는 것이었으니 것도 참 신기하였다.
결코 우리는 ‘알지 못하는 신에게’ 기도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행 17:23).” 저들이 알 수 없는, 나의 하나님은 엄연한 실제다. 먼저 일하신다. 혼자 시작하셨고 여기까지 이끄셨다. ‘하나님의 전’은 다만 이곳이다. 나를 두시는 자리다. 저 건물 몇 호실도, 어떤 위치의 장소나 그 건물의 소유도 아니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창 28:17).” 저가 누웠던 자리가 교회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출 3:2).” 이런 광경을 나도 숱하게 목격하지 않았던가? 처음 글방에서 예배를 시작할 때, 교회를 인천으로 옮길 때도 그때마다의 느닷없는 손길을 나는 생생히 기억한다. 3000개의 교회 중에서 300개 교회로 출이고, 300개 교회에서 3개 교회를 추리고, 3개 교회에서 우리 교회가 선정되었다면서, 인천으로 옮기고 난 뒤 교회 연합회에서 100만원을 헌금으로 후원할 때도 나는 다만 어리둥절하였을 뿐이다.
그걸 교회연합회 신문에 기고하고 인터뷰해서 교회를 알릴 기회도 주겠다는 걸 한사코 사양했던 것도,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3).” 보니까 그 불은 내가 붙인 것도 아니고 내가 끌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두어 번 사양을 하자 전화를 한 연합회 직원인가 담당자가 되레 나의 거절을 어이없어 하면서 남들은 오히려 돈을 주고 신문 지면을 사서 조금이라도 크게 광고를 하려 하는 판에 '공짜로' 이 얼마나 좋은 기회냐, 하며 설득을 하였을 정도였으니.
나도 잘 모르겠다. 내가 어떻게 모색하여 출애굽을 계획하였다면, 또는 노년에 제2의 인생을 꿈꾸며 가나안을 향해 떠나기로 한 것이라면, 뭐라도 좀 어떻게 해서 좋은 방향을 모색하고 더 나은 길을 찾았어야 마땅할 텐데. 나는 가끔 내가 왜 이런 일로 싸워야 하는지 오히려 그걸 잘 모르겠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4).” 말씀으로 족한 것이어서, 예배 처소가 어디면 어떻고 그마저 여의치 않아 내가 누웠던 자리여도 감사할 따름이다.
그럼 어떡해? 하는 아내의 질문에 나도 딱히 뭐라 할 말이 없어서 그냥 주의 이름을 부르자, 하고 말해주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행 2:21).” 그러니 이 일이 어찌된 일인가?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12).” 또한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건 없어? 하고 약사아이가 우려 섞인 목소리로 물었을 때도, 기도나 해! 하고 말해주는 것 말고는 딱히. 나도 내가 태평한 이유를 알다가도 모르겠다. 당장 또 쫓겨나듯 이사를 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다만 우리는, “그 소제물 중에서 기념할 것을 가져다가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레 2:9).” 저의 향기라.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고후 2:15).” 이 냄새는 같은데 맡는 사람은 다르다.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16).” 그러니까 말이다.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부르시고 시작하신 이가 이끄시고 붙드실 일이다. 교회 글자가 들어간 베너 간판을 모두 치우는데 나보다 주인이 더 죄송해하고 미안해하였다. 괜찮다고 하는데도 송구해하는데 더는 뭐라 할 수도 없고. 행정상으로 어떤 교회냐가 중요한가 아니라 교회 그 자체로 은행평가원은 교회를 골칫덩이로 여겨 이율을 올리거나 상환을 독촉하는 일이었는데, 것도 어지간히 이해가 되는 일이기도 하였다. 어쩌겠나? 어쩔 수 없는!
그럴 때 우리에겐 말씀이 있지 않던가?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시 127:1).” 우리 수고는 다 헛되다. 내가 주를 위해, 교회를 위해, 하나님을 위해 무얼 한다고 하는 모든 수고는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이 세우시고 하나님이 지키셔야 한다. 다만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레 2:13).”
변질되지 말자. 맛을 내자.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골 4:6).” 이 또한 주가 그리 인도하실 것을 믿으니,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 127:2).” 고로 우리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5).” 아멘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