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전봉석 2019. 2. 18. 06:50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명령하신 모든 일을 준행하니라

레위기 8:36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편 133:1

 

 

 

함께 하는 일이 얼마나 귀한가. 아이는 아이를 따르고, 아이는 아이를 마다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생각하고 위해주는 것이 귀하였다. 생전 말도 잘 못하고 자기 의사표시도 잘 않던 녀석이 아이의 말에 고분고분 답하고 뭐라 먼저 챙기면서. 서로에게 서로가 있어 감사한 일이겠구나 생각하였다. 전에 다니던 청년부 시간에 가려면 점심만 먹고 서둘러야 하는데, 그냥 뒷자리에 있다 누구와도 친하지 못하고 그동안 그러했음을 아이가 처음으로 말하였다.

 

하긴 자신을 감추고 서로 경계하며 지내는 것과 서로 다 알고 먼저 마음을 쓰는 일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교회란 오늘 시편의 말씀으로 정의할 수 있다. “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 133:1).” 함께 하는 것이 하나님의 취지에도 맞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 2:18).” 서로는 서로에게 필요하였다.

 

아내와 딸애가 필리핀에 가는 바람에 아이들과만 예배를 드렸다. 같이 점심을 먹고, 같이 에베소서로 성경공부를 하고, 같이 탁구를 치고 당구를 치고, 아이는 내친김에 노래방에 가고 싶어 해서 코인노래방에 잠깐 들렀다. 모처럼 신나서 활기찬 아이의 모습에 새삼 주께 바라였다. 하나님은 불가능의 주인이시다. 고통과 슬픔에 관여하신다. 기쁨을 함께 하시고 우리들로 하여금 자랑할 게 무엇인지 알게 하신다.

 

아는 만큼 더 많이 누리는 게 천국이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마 13:11-12).” 모르니 점점 더 알려고 하지 않고 앎으로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 것이다. 한정된 삶 가운데서 무한한 영생을 누릴 수 있는 맛이 연합함이었다. 이는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 133:2-3).”

 

우리로 왕 같은 제사장을 삼으시고 이에 그 위임식을 거행한다. 성막 앞에 모인다(레 8:1-5). 물로 씻는다(6). 예복을 입는다(7-9). 기름을 부으신다(10-12). 속죄제와 번제와 위임제를 드린다(14-29). 하나님과 교제의 음식을 나눈다(31-32). 이를 칠일동안 성막 안에서 머문다(33-36). 이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명령하신 모든 일을 준행하니라(36).”

 

교회를 두시고 우리로 나아오게 하시는 이유였다. 곧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행 2:46).” 그리하여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5).” 우리가 가까이 할 사이와 멀리 할 사이를 구분하는 척도를 얻는다. 다음은 물로 씻고 예복을 입는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5).” 곧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고전 6:11).” 이로써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고후 5:2).”

 

이처럼 말씀을 따라가다 보면,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4).” 우리의 ‘죽을 것’이 생명으로 덧입는 바가 되는 것이다. 참으로 오늘 이 장막에 있는 일은 잠깐이나 이것으로 영생의 맛을 느끼고 사모하게 되는 것이다. 왜 우리가 말씀을 상고해야 하는지,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벧전 1:10-11).”

 

이로써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12).” 오늘 우리를 서로에게 두시고 서로로 서로를 위하고 마음 쓰며 함께 하게 하시는 것이 그 때문이었다. 문득 천국을 떠올렸고 천국의 모형으로 ‘너와 나’가 같이 있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아이가 아이를 그처럼 따르고 서로 위하는 게 보기 좋았다.

 

결국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게 아니다. 이 즐거움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맛보아 알게 하시고자 하는 거였다. 비록 두 아이뿐이지만 나는 머리로 스쳐가는 아이와 아이, 사람과 사람을 생각하였다. 더 크고 융성하여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모임도 있겠으나 우리로 예배하게 하시는 이가 우리와 함께 음식을 나누며 교제하시는 것이다.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행 20:11).”

 

그렇게 또 서로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 예수의 살과 피가 되어 부어지고 찢겨지며 먹이고 먹히고 사는 삶이 일상이었다. 이는 정해진 날수 동안의 일이다. 우리는 이 장막에서 떠나기까지니,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벧후 1:13).” 서로가 그처럼 생각나게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서 있으나 내가 항상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12).”

 

이로써 우리는 넉넉히 받는다.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11).” 겨우 두 아이를 두고 너무 호들갑을 떠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수천수만보다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신다는 데 나는 늘 마음을 붙든다. 이런저런 여건과 사정에 대하여는 자꾸 끌려갈 필요 없다. 모든 문제 너머에는 하나님이 계신다. 하나님의 성품으로 우린 우리에게 처한 오늘의 문제를 이해할 일이다.

 

시편 107편의 찬송이 그런 것이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1).” 결국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나훔 1:7).” 우리로 주께 피할 수 있는 자로 삼으신 것이 복이고 은총인 것이다. 믿음이 종종 추상적이고 너무 애매하다는 아이의 말에 이쪽에 와 있는 그 자체로 증거가 되는 것을 알려주었다. 본문은 그리 정의하였다.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쪽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쪽에 있느니라(전 10:2).” 이는 우파냐 좌파냐, 어느 당이냐, 어느 쪽이냐 하는 따위의 구분이 아니다. 확연히 다른 서로의 존재의 의미다.

 

가장 귀한 확신이 무엇일까? 내가 주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는 것.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욜 2:32).” 이를 베드로는 증거하였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행 2:21).” 바울도 증언하였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

 

단지 인용이 아니다. 그리 여겨지고 마땅히 바라는, 왜 그런지 설명하기 어려운 알 수 없는 마음이었다. 우리가 여기에 모였다는 것, 함께 말씀을 듣고 주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를 하고 찬송을 올려드릴 수 있다는 것.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딤후 2:19).”

 

불행이 우리를 불행하게 할 수 없다는 원리다. 나는 이 부분을 공들여 설명하였다. “명령을 지키는 자는 불행을 알지 못하리라 지혜자의 마음은 때와 판단을 분변하나니(전 8:5).” 살면서 불행한 일을 겪지 않을 수는 없고 그것을 보장하느라 교회를 다니고 예수를 믿는 게 결코 아니라, 불행이 온다 해도 그 불행이 우리를 불행하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 믿음의 신비다. 약속을 붙들고 그 약속을 좇아 살았으나 약속을 보지 못하고 죽으면서도 약속을 저버리지 않은 수많은 믿음의 선친들 모습과도 같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히 11:13).” 곧 이 땅에서의 어떤 상황이나 근거를 결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이는 모형이다. 잠깐 맛보는 영생의 맛일 뿐이다. 행여 그 맛조차 못 보고 죽는다 해도, 비록 가나안을 향해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였으나 정작 자신은 들어가지 못한 모세였다고 해도. 이 땅에서의 결실은 모두 거울과 같을 뿐이다.

 

아이들과 같이 말씀을 나누고 식사를 하고 함께 하는 시간이 충분하여서 무엇에 대해 슬프거나 노여워할 이유가 없었다. 일찍 잠자리에 들고 또 이처럼 아침에 말씀 앞에 앉히시고,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우리를 이끄시고 인도하심이 귀한 것이다.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행 2:23).” 나의 수고와 애씀의 결실이 아니었다. 돌아보면 내가 한 게 아니었다.

 

그러므로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시 16: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