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하여 보상해 주시리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
레위기 13:1, 46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보상해 주시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오니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
시편 138:8
어떤 일 앞에서 속수무책일 때, 그 병 있는 날 동안은 혼자 두심으로 함께 하신다. 주가 나를 위해 보상하실 것이다. 주의 인자하심은 영원하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나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모든 문제는 부정하나 부정한 것 뒤에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신 성품이 숨겨져 있다. 어떤 문제를 두고 가만히 주를 바라는 게 지혜이다. 지혜란 주를 경외함으로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아는 일이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롬 6:22).” 그런데 나병에 들고 옴이 붙고 부스럼이 생기고 대머리가 되는 이 모든 우여곡절은 엄밀하게 말해 그리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곧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안다는 것,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의 도로 죄인들을 교훈하시리로다(시 25:8).”
그리하여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분별함으로 그 가운데 희락이 있다. 어찌 설명할 수는 없으나 얽매여서 그것과 함께 함몰되지는 않는 것이다. 곧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셨다. “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그가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그가 주게 하시지만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전 2:26).”
너무 그럴 거 없다. 너무 슬퍼할 것도 없고 너무 좋아할 것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너무 속속들이 전부를 알려고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 사정을 들어보고 어디서부터 원인이 무엇인가 아는 것이 도움이 되는 게 아니다. 그 내력이 어떠한지, 유전적으로 어떤 계통발생을 겪었는지 굳이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누구를 대하고 생각하는 일에서 이와 같은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마치 심리 분석을 하듯 그 주된 원인을 찾아 저의 속살을 까뒤집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우선 모든 문제는 부정하다. 죄 때문이다. 스스로 죄인인 것을 고백하고 인정하면서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앞에 나올 수 있는 게 복이다. 저가 회개의 차원에서 아뢰고 고하며 토해내는 것이야 그럴 수 있지만 그걸 부러 끄집어내고, 그것을 뒤져서 원인을 찾아가는 따위의 심리치료 과정이 죄 사함은 아니다.
두루뭉수리하게 엮어서 죄가 아니라 '그 죄', 결국은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여기서 출발하여 우리는 서로 주의 이름으로,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1:12).” 그래서 누구더러 자꾸 교회에 오라고 할 거 없다. 어디에 나가라고 할 것도 아니다. 내가 할 일이 아니었다. 또는 지난 주일에 왜 안 왔는지, 요즘은 왜 오지도 않는지 비난할 것도 없다.
교회에 가지 않고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고, 가끔씩 교회에 가면서 그리스도인이라 하기에는 좀 의심스럽다. 사회 활동을 하듯 친교와 신분 상승을 위해 교회를 가는 정신 빠진 그리스도인은 없다. 그런 생각을 갖고 고집하던 때가 있었다. 굳이 교회를 갈 필요도 애써 주를 구하지 않아도, 나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식의 어줍은 논리로 그리 굴며 세상을 벗하고 지낼 때였다. 이는 병든 것이다. 부정한 것이다. 그러할 때 혼자 두신다.
모든 복음의 기초는 하나님이 이르신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우리가 찾아 구하여 얻은 게 아니다. 하나님이 이르시고, 찾아오시고, 먼저 일하신다. 오늘도 우리 안의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신다.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병 없는 육신은 없겠으나 우리 영혼은 병에서 나음을 입은 터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 이는 분리다. 세상과의 거리둠이 필요하다. 너무 밀착된 모든 것으로부터의 떨어뜨림이다.
영혼이 나음을 입었음으로 우리는 우리가 병든 것도 안다.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이성복 시인의 표현처럼 그런 날에 살고 있다. 한데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우리가 나음을 입은 나음은 결국 엄청난 값을 물고 나은 나음이다.
우리로 세상과 분리시키는 까닭은 소위 말해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 어떤 이와 곁을 같이 하고 사는가를 보면 안다. 누구와 자주 어울리고 저들과 어떤 일에 힘써 수고하는가를 보면 안다. 이것을 나는 여실히 느낀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공통된 부분이기도 하다. 전에 즐기던 사람과 사랑과 사안을 더는 바라지 않는 것이다. 더는 싫은 것이다. 엄연히 같이 할 수 없는 게 있다. 아이가 자라면 더는 어린아이적의 일을 버린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 그럴 때면 문득 분리가 극한 외로움으로 엄습할 때도 있다. 억울하고 소외되는 느낌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나만 굳이 이러고 살아야 하나, 싶은 금단증상 같은! 이 또한 말이 쉽지 우리가 이룰 수 있는 게 아니겠다.
그래서 우리가 함께 한다는 것, 모이기에 힘쓰는 까닭은 그것이었다. 곧 서로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3).” 이는 역으로 끊임없는 분리를 경험하는 일이다. 전에 즐기던 것들로부터의 해방이다. “이는 갇힌 자의 탄식을 들으시며 죽이기로 정한 자를 해방하사(시 102:20).” 결국 우리들로 하여금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 6:18).” 의를 힘써 지키는 삶이 되게 하신 것이다.
어디가 아프다. 마음이 쓰인다. 혼자 힘들다. 누굴 그리워한다. 무엇이 서운하다. 이 모든 고달픔이 전에는 그게 전부였는데 이제는 다만 그러려니 놓아두고 적당히 내버려둘 필요도 있다는 것을 느낀다. 너무 얽매일 거 없다. 안 아프고 마음이 안 쓰이며 살 수는 없는 노릇이고, 누굴 그리워하고 무엇에 의해 서운해 하는 일도 어쩔 수 없는 것이겠으나. 어쩔 수 없는 것에 대하여 더는 너무 애쓰지 않는 게 좋다.
왜?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전 1:30-31).”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이다. 예전의 내가 개조되고 조금 손봐서 어디 수선한 성품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었다. 이제는,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빌 3:7).”
더는 그것을 귀히 여겨 애지중지하지 않는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8-9).” 심지어 가족이나 친구나 내 목숨까지 잃어버린다 해도!
이는 이제 바로 아는 것이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롬 7:18).” 내 모든 것으로는 선을 이룰 수 없다. 내가 수고하고 애쓴다고 될 게 아니다. 하물며 누구더러 오라마라, 비난할 거 없다. 저도 어쩔 수 없는 일이겠으니, 다만 주의 긍휼하심 앞에 저가 아뢸 수 없는 것을 대신하여 내가 고하는 게 일이 되었다. 왜냐하면 저도 저의 죄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제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함을 내가 이제는 안다. 들들 볶는 내 안의 안달복달에 대하여도 그러려니 더는 자꾸 끌려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버려둠으로 나는 다만 주를 아는 지식을 가장 고상하게 여긴다. 주의 인자하심은 나의 생명보다 귀하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시 63:3).” 곧 자신을 죽여서라도 나를 살리시는 인자하심이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이와 같은 말씀을 기본전제로 오늘 말씀을 다시 읽을 때 우리가 병든 것은 모두 죄 때문이다. 부정한 것이다. 이를 온전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분리시키신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
결국 우리로 마음이 청결하게 하시려고, 비로소 남은 이야기는 하나님을 볼 것임이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그리하여 우리로 이 소망을 가지게 하신 것이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3).” 말씀 붙들자. 주만 바라자. 세상 그 무엇도 구원을 이룰 수 없다. 자식도 가정도 나 자신으로도 아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갖게 하시려고.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레 13:1, 46).” 고로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보상해 주시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오니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시 138:8).” 아뢰고 구하여 붙드는 것이다.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신들 앞에서 주께 찬송하리이다(1).”
왜냐하면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내 영혼에 힘을 주어 나를 강하게 하셨나이다(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