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

전봉석 2019. 2. 26. 07:12

 

 

 

이 날에 너희를 위하여 속죄하여 너희를 정결하게 하리니 너희의 모든 죄에서 너희가 여호와 앞에 정결하리라

레위기 16:30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 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하지 아니할지라 그들의 재난 중에도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

시편 141:5

 

 

사연 없는 가슴이 어디 있겠나. 저마다 가슴에 묻고 사는 이야기로 힘에 겨워 지칠 때, 우리는 그것으로 주를 바라고 위하여 주께 아뢸 수 있다. 그것으로 우리 마음을 혼미하게 할 수는 없으니,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4).” 다른 그 무엇으로 위로를 삼으려는 모든 것이 헛되다.

 

유난히 무슨 점집이 늘고 생경하고 음침하던 기운은 마치 활력 있고 유쾌한 놀이처럼 우리 생활에 스며들었다. 언제 글방 같은 층에 버젓이 타로점집이 생겼는가했더니 그걸 또 수강료를 받고 가르치는 모양이었다. 커피전문점 가운데 신점, 운수, 관상을 봐주는 곳이 생겼는가 하면 버젓이 아이들 사이에서 앞날을 예언하는 무슨 놀이가 유튜브를 통해 아름아름 인기를 끌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이 세상 풍조이며 공중에 권세 잡은 이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2:2).” 가슴에 사무친 이야기는 우리로 주를 바라게 하지만 또한 세상 풍조를 따르는 데 있어 원 없이, 한 없이이끌리기도 한다. 왜 그럴까? 스스로 무엇을 하려 할 때, 어떻게 해서 자신이 주인이 된 세상을 살면서 지고 가야 하는 무게만큼의 헛손질인 것 같다.

 

우리와 다른 것은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될지, 장래 일을 염려하며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아브라함과 같이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 함께 행하시는 이의 말씀을 좇아 나아가는 게 우리들이다. 이 복음의 능력이 하나님의 능력이다.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1:6).” 다를 바 없던 우리를 부르셨고 세우셨고 이끄신다. 그리하여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8:2).”

 

그것의 증거는 내 안에 주를 바라는 마음을 두셨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3-4).” 그래서 우리의 유일한 소망은 그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잃지 않고 사는 일이었다.

 

어떠하든 주를 바라게 하심으로 더는,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13:5).” 돈이란 내가 유용하게 여기는 세상의 여러 가치 기준이다. 그것으로 우린 소외감도 느끼고 자괴감에 들기도 하여, 의기소침해하면서 우울해하기도 한다. 이러할 때 족한 줄 안다는 게 얼마나 큰 감사인지!

 

이를 새삼 알게 하시려고 나를 며칠 외따롭게 두셨던가. 입을 굳게 다물고 할 말을 잃게 하심으로,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나는 주를 바란다. 이 모든 허점투성이인 나 자신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려고,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9).” 말씀을 의지하게 하시는가보았다.

 

월요일 한 날 어딜 좀 갈까 하는 마음과 어디라도 갔으면 하는 마음을 다 접고 글방에 들어앉아 책을 읽었다. 종종 나는 이야기가 있는 내용의 영화를 좋아한다. 최근에 <내 마음을 벗어난 시간><당신을 오랫동안 사랑했어요>를 보았다. 이혼과 퇴직과 전 아내의 죽음으로 8년간 노숙자로 살던 이가 그 사이에서 낳아 외면하였던 딸애를 찾아가 용서를 구하는 이야기와 불치병에 걸린 어린 자식의 고통을 보다 못해 살해하고 15년간 교도소에 있던 끔찍한 침묵 가운데 출소한 모정을 그린 이야기나.

 

개인적으로 나는 사연이 짙은 영화를 좋아한다. 판타지나 선정적인 오락물을 싫어한다. 영화는 이야기다. 책으로 읽는 것과 달리 오랜 여운을 남기기도 한다. 이와 같은 가슴에 서린 이야기를 한 편 보고 나면, 우리가 지고 살아야 하는 어떤 슬픔의 무게를 공감한다. 사연 없는 가슴이 어디 있겠으며 가슴에 묻지 않은 이야기가 어디 있겠나? 다들 저마다의 무늬가 성향을 이루고 기질이 되어 삶을 헤쳐 나가는 무기가 된다.

 

그래서 유난히 낙천적인 아이는 늘 우울한 아이와 무늬가 닮았다. 말이 앞서고 과장된 사람은 정의감에 불타며 마치 불의에 맞서는 이와 닮았다. 서로는 그 가슴에 자신만의 이야기를 묻고 살지만 얼굴의 표정처럼 감추려야 감출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어쩌면 내가 선호하는 영화 취향이 내 안의 슬픔과 맞닿아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도 모르게 울컥하여 눈물을 흘리기도 하면서. 표현되는 모든 이야기는 단지 그 내면의 표정을 보여줄 뿐이다.

 

우리는 물론 성경대로 살 수 없다. 살려고 하면 할수록 나의 한계만 여실히 드러날 뿐이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9-10).” 이를 알고 누구를 비난하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정작 그게 나였다.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없음을 말씀 앞에서 고백한다. 그러니 더욱 주를 바랄밖에. 우리가 자유로워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8:36).” 다른 방법 없다. ‘저런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을 때 더욱 확실해지는 것은,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이 얼마나 끔찍한가를 다시금 깨달을 뿐이다. 나도 저들과 다를 게 없다. 내 안에 묻고 사는 이야기도 구구하기는 마찬가지다. 누구에게 말을 한들. 어찌 해소하려 무슨 유익을 구한들.

 

하나님이 없는 세상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깊음 위에 가득할 뿐이다. 그 위로 하나님이 운행하셔야 한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1:2).” 그 해결점은 빛이 있으라 하심이다.’ 그들이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그들의 팔이 그들을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주의 팔과 주의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그들을 기뻐하신 까닭이니이다(44:3).”

 

구구절절 나의 마음을 풀어놓을 생각은 없다. 이는 마치 마하엘 엔데의 끝없는 이야기같다. 내 이야기인지 이야기 속의 나인지. 전에 같으면 친구를 만나 하소연하고, 어떤 위로를 위해 여행을 떠나고, 글을 쓰고, 시를 짓고 그것으로 위로를 얻으려 하겠으나. 종종 누가 왜 글을 쓰지 않는지, 왜 더 이상 시를 쓰지 않는지 물으면 그저 나는 배시시 웃고 만다. 그런들?! 그럴 시간에 나는 묵상을 하고 묵상 글을 쓴다. 설교 본문을 찾고 그 내용의 이끄심을 따른다.

 

종종 그게 그러고 있는 나 자신도 이해하기 어렵다. 실은 조금 외로웠고, 어디라도 갔으면 했던 게, 누구라도 만났으면 하였던 게, 특히 월요일이면 이는 어떤 허전함 같은 공허 때문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래서 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의 사도행전 강해집 2, <담대한 기독교>를 새로 주문하였다. 읽고 사유하고 묵상한다. 듣고 깨닫고 되새긴다. 보고 느끼고 슬퍼한다. 나로 하여금 가장 예민하게 주를 바랄 수 있는 자리에 둔다.

 

이 날에 너희를 위하여 속죄하여 너희를 정결하게 하리니 너희의 모든 죄에서 너희가 여호와 앞에 정결하리라(16:30).” 억지로라도 그럴 필요가 있다. 이는 명령이시다. 결국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 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하지 아니할지라 그들의 재난 중에도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141:5).” 내게 두시는 오늘의 모든 환경과 여건과 가슴 속에 묻고 사는 이야기까지도 주가 아신다. 이루어 가시는 주님의 세계에 가장 적합하다.

 

누구에게 주목 받지 못하는 생이어서 종종 감사하다. “이는 너희에게 안식일 중의 안식일인즉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할지니 영원히 지킬 규례라(16:31).” 스스로 괴롭게 한다는 것을 그리 둠으로써 더욱 주의 긍휼하심을 바랄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왜냐하면 다들 나름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심지어는 타로점을 보는 데 그치지 않고 돈을 내고 배우려고 하는 것이겠다. 그런들, 모든 문제란 하나님과 나 사이에 금이 간 틈새다. 하나님과의 단절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뾰루지 같다.

 

어쩔 것인가? 이 복음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1:16).” 결국 하나님 없이 사는 다수의 삶이 겉으로는 그럴듯하고 홀가분하여 자유로울 것 같으나 영화는 단적으로 그런 속엣 이야기를 들려준다. 책에 담은 사람과 사람의 신호도 그러하다. 우리는 그런 그 속에서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의 비참한 현실을 목격할 뿐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속히 내게 오시옵소서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내 음성에 귀를 기울이소서(141:1).” 우리에겐 이와 같은 절규가 복이었다.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 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2).” 그리하여 내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 죄악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악을 행하지 말게 하시며 그들의 진수성찬을 먹지 말게 하소서(4).”

 

다만 주 여호와여 내 눈이 주께 향하며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 영혼을 빈궁한 대로 버려 두지 마옵소서(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