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 우환을 그의 앞에 진술하는도다

전봉석 2019. 2. 27. 07:06

 

 

 

제사장은 그 피를 회막 문 여호와의 제단에 뿌리고 그 기름을 불살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할 것이라

레위기 17:6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내가 내 원통함을 그의 앞에 토로하며 내 우환을 그의 앞에 진술하는도다

시편 142:1-2

 

 

함부로 여겨 주를 온전히 바라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이를 주 앞에 가져와 그 제단에 뿌리고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는 삶. 기도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것이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2:42).” 먼저 가르침을 받고 교제하고 떡을 떼는 일 뒤에 기도가 있다. 기도 없는 가르침과 기도 없는 교제와 기도 없는 성찬은 무의미하다.

 

기도하게 하시려고,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11:6).” 때론 그 하나님의 섭리가 기묘하시다. 내 생각으론 이게 나을 것 같은데 하나님은 저렇게 행하신다. 저리 행하실까 하였더니 이대로 두신다. 주로 인하여 실족한다는 말씀이 실은 나의 바람이 항상 우선하였다는 것을 느낀다. 그럴 때 기도란 아무리 기도해도 들어주시지 않을 것을 두고 나의 마음이 바뀌게 하는 것이다.

 

, 그래서 지혜자는 말하였구나!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29:18).” 이 더디고 무료한 시간 중에 주께서 숨기신 뜻을 바라고 의지하는 데 있어, “공의는 나라를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14:34).” 주의 성품을 의지하는 일. 어떠하시든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자하심을. 그러하여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25:2).” 살펴 그 뜻을 헤아리게 하시려고.

 

그리스도인이면,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요일 3:14).” 내게 두신 어떤 마음으로 이를 증명한다. 가령 요즘은 나의 하루 일과가 아이의 퇴근으로 정돈이 된다. 오늘 하루는 어땠는지, 혹시 무슨 일은 없었는지, 말씀 묵상하고 기도 생활하기를 격려하면서. 아이와 카톡을 하거나 통화를 하고나면 하루가 다 지난 것 같다. 내 안에 두신 이 마음으로 알거니와.’ 종종 내게 두시는 것이 낯설기도 하다.

 

상대적으로 더는 가까이 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도,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후 6:14-16).” 그 구분이 명확해지는 것이다.

 

결코 내가 누구보다 낫다는 의미가 아니라 부족하고 연약하기 그지없어 오히려 미안하고 송구할 따름이어서. 그럼에도 주의 은혜다.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1:3).” 하루에도 수골백번을 싸운다. 나는 여전하여서 나를 나로 섬기려는 의지는 항상 먼저 나의 의를 도모하게 한다. 무슨 일을 두고, 어떤 이를 생각하면서 그것을 판단하고 이뤄가는 일에 있어.

 

생각은 많고 마음은 앞서지만 몸은 여의치 않고 그러므로 오는 의기소침함과의 싸움이라니! 철저하게 혼자 있을 때 말씀이, 독서가, 기도를, 그 외에 달리 할 게 없어서 말이다. 어떠하든 주가 주도하고 계신다는 확신이 나를 붙드신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의 바람을 제어하는 일이란,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

 

돌아보면 모든 게 남과 비교하고 저들처럼 이뤄가지 못하는 데 따른 열패감이었다. 주를 바라는 마음도 실은 나 좋을 대로 구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그렇게 생각을 도모하다보면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3:20).” 마음을 어디에 둬야 할지를 알게 하신다. 혼자 두시는 하루의 일과가 너무 단조로웠다. 이대로 있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그럼에도 묵묵히 또 정해진 시간에 따라, 습관을 좇아 글방에 가고 책을 펼치고 묵상 글을 되새기며, 특히 봄이 오면서는 로이드 존스 목사의 사도행전 강해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셈이다. 조금 더디게 천천히 옮겨 적기도 하면서 나는 저의 설교에 전적으로 마음을 기울이고 싶어 한다. 왜냐하면 무의식적으로도 우린 얼마나 세상 것에서 주의 선하심을 논하고는 하는지. 오히려 우리의 열심이 우리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헤아리지 못하게 한다는 사실에 크게 공감한다.

 

차라리 하나님을 부정하고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보다 더 무섭고 어리석은 일은, 이만하면 됐겠다고 여기는 나의 기준이다. 자기만족이다. 기독신문을 읽다보면 한 번 쥔 명예와 권세를 놓지 못해 바동거리는 목사나 저를 중심으로 군무를 이루듯 떼를 지어 부화뇌동하는 꼴이라니! 누굴 지목하여 어느 교회가 그렇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라, 내 안에도 여전히 나는 지지를 원한다. 주목 받는 생을 원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주목 받는 생이고 싶어 한다.

 

어느 당의 전당대회를 보면서도 사람의 사람됨이 참으로 악랄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한 몸 불사르게 내어주는 시대의 부름 같겠으나 그리하여 물불 안 가리고 엉기고 섞여 그 밥에 그 나물이 되어버리는. 그런 점에서 나를 쳐 복종하게 하는 이 일이 얼마나 더 귀하고 다급한 일인지를 생각한다. 마치 천년만년 누릴 영화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처럼 온통 자기들끼리의 군무라. 군락이라. 그 수고가 억측 같다.

 

그 안에 모든 시기와 교만과 분노와 탐심과 게으름과 정욕과 위선이 한데 뒤섞여 죄의 덩어리를 이루는 것 같다. 그러는 우리에게 말씀은 생소할 정도로 도전적이게 들린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요일 3:14).” 서로 반목과 불화를 일삼아 지지층을 확대해보려 하지만, 본래 지지층이란 안개와 같은 것이다. 짙게 내려앉았을 땐 당장 한 치 앞도 구분할 수 없게 온통 그것으로 끝장이 날 것 같다.

 

들어앉아 책이나 읽고 자기 몸이나 애써 건사하는 주제여서 내가 뭐라 말할 것은 없다 해도, 저들은 그 본심에 있는 어리석음은 구분할 수 있겠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14:1).” 결국 우리가 붙든 믿음은 믿음이 아니다. 내가 바라고 의지하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었었다. 그저 그럴 가치도 자격도 안 되는 내게 거저주시는 게 믿음이었다. 내 수고가 이뤄내는 게 아닌 것이다.

 

이를 붙들고 의지하게 하심도 은혜뿐이라. 참예하게 하시고 연합하게 하신다. 그러기 위해 겸손의 자리로 내몰고는 하시는데 그때가 곧 기도할 때라. 가르침을 받고 말씀 가운데 세우시는 것. 교제하며 떡을 떼는 일은 모두 참예다. 기도로써 이를 이루게 하신다.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고전 11:25).” 기념한다는 것은 상기하여 그 의미를 잃지 않음으로 삶이 되게 하시려는 데 있다.

 

이를 제사장은 그 피를 회막 문 여호와의 제단에 뿌리고 그 기름을 불살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할 것이라(17:6).” 주 앞에 성결! “그 날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있는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14:20).” 이 모든 게 참예를 원한다. 기도 없는 가르침이 허사이고 기도 없이 교제가 헛되며 기도 없이 떡을 떼는 행위는 요식적일 뿐이다.

 

하여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내가 내 원통함을 그의 앞에 토로하며 내 우환을 그의 앞에 진술하는도다(142:1-2).” 기도란 있는 그대로 주 앞에 서는 일. 이는 결국 주의 뜻을 헤아려 아는 데 있다. “하늘의 높음과 땅의 깊음 같이 왕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25:3).”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리는 데 있어 주목 받는 생으로는 어림없지 않겠나?

 

늘 아이들에게 말해주곤 하는 것처럼 혼자 있지 않고 어찌 책을 읽겠으며 외롭지 않고서야 어찌 글을 쓸 수 있겠나? 더는 내가 어쩔 수 없는 것에 대하여는 주께 내어두리고 나는 다만 소리 내어 주께 부르짖을 뿐. ‘내 우환을 그의 앞에 진술하는도다.’ 다른 이 누구? 어떤 일 무엇? 아무 것도 나를 알아주지 못하는 것이어서 나조차 나를 다 알지 못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내 영이 내 속에서 상할 때에도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 내가 가는 길에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올무를 숨겼나이다(142:3).”

 

다만 주는 나의 피난처, 나의 분깃이시라.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