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거룩하라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레위기 19:2
여호와는 나의 사랑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산성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방패이시니 내가 그에게 피하였고 그가 내 백성을 내게 복종하게 하셨나이다
시편 144:2
거룩이란, 헛것을 향하지 않고 나를 위한 신상을 만들지 않는 것이다. 오직 나의 하나님 여호와만을 의뢰하는 것. “너희는 헛된 것들에게로 향하지 말며 너희를 위하여 신상들을 부어 만들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 19:4).” 그런데 우린 모두 헛것이고 지나가는 그림자 같을 뿐이다.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시 144:4).”
다시 말하면 우리로서는 거룩을 도모할 수 없다. 거룩하라, 하시는 말씀은 도무지 거룩할 수 없음을 뼈저리게 통감하며 주의 도우심만을 바라는 것이다. 하찮고 보잘것없는 존재로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알아 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기에 그를 생각하시나이까(3).” 주의 긍휼하심 앞에 몸 둘 바를 몰라 하는 일이 거룩이다. 한 마디로 자신의 무지와 무능력을 한탄하며 주의 긍휼하심만을 바라는 일이다.
오늘 말씀은 이를 붙들게 하신다. “여호와는 나의 사랑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산성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방패이시니 내가 그에게 피하였고 그가 내 백성을 내게 복종하게 하셨나이다(2).” 결국은 내가 어떻게 하려는 모든 수고가 우상이 되었다. 나의 수고 나의 노력은 물론 그 애쓰고 수고하여 쥐고 놓지 않으려는 모든 게 숭배이다. 내가 지키려는 가치와 기준이 나의 거룩을 훼손한다. 그래서 하나님만을 바라고자 하는 마음은 점점 묘연해지는 것이다.
내 안에 이는 죄의식이 나로 하나님보다 내 기준을 더 섬기게 하고, 누구에 대한 경멸과 조소가 내 곁에 두신 하나님을 뜻을 의심하게 하는 것이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 그럼에도 우린 거룩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이다. 이를 오늘 본문은 간단명료하게 정돈하였다.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3).”
부모를 경외하는 일은 안 보이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장 표면적인 표현이다. 그 안 보이는 하나님을 우리가 의식하는 가장 귀한 증표는 안식일을 지키는 일이다. 어쩌면 우리들로 하여금 사사로이 여겨도 될 것 같은 이 둘이 가장 근본적인 삶의 푯대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를 안 가거나 가끔 가거나 굳이 의식적으로 교회를 다녀야 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자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또한 부모를 공경할 줄 모르면서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할 길이 없다.
오늘 본문은 그럼에도 우리의 그릇된 삶의 모습을 그대로 비춰주는 것 같다. 다른 짐승을 교접하여 새로운 종을 생산하고, 같은 밭에 다른 씨를 뿌려 더 많은 수확을 거두려하고, 밭모퉁이에 떨어뜨리는 이삭 한 줌 없이 인색하고, 몸에 문신을 하고 무늬를 새기며, 이웃을 억압하고 품꾼의 삯을 미루고, 거짓 맹세를 일삼고 스스로 원수를 갚으려 들며, 다른 여인과 동침함은 물론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는다. 술법에 호의적이고 딸을 창녀로 팔아넘긴다.
이 모든 행태는 말씀이 무너져서이다. “내 안식일을 지키고 내 성소를 귀히 여기라 나는 여호와이니라(30).”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한 신접한 자나 박수를 따를 뿐이다. 어른을 공경할 줄 모르고 거류민을 능멸한다.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함이 무게나 길이를 속이는 일처럼 가벼운 게 되었고, 공평한 저울추와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힌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는 모두 “너희는 내 모든 규례와 내 모든 법도를 지켜 행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37).” 하는 말씀을 경홀히 여기면서부터이다.
쉽지는 않지만. 그러기가 어렵지만. 그럼에도, 하면서 우리의 마음을 다시 주께 향하게 하는 일.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삶에 우여곡절을 치워주시지 않는다. 굴곡이 있고 더러는 웅덩이에 빠져봐야 비로소 악, 소리 내며 주를 바란다. 주의 도우심이 아니면 견딜 수 없고 이겨낼 수 없음을 확인한다. 내가 어떻게 해볼 수 있다고 여기던 것들이 모두 허상인 것을 알게 된다.
주님은,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눅 8:10).” 우리에게 허락된 비밀. 이를 잃지 않고 보존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지혜를 연마해야 한다. 잘 벼리고 간수하여야 그 연장은 유용하다. 이번 주일에 증거할 말씀을 붙들고 한 주간을 씨름하면서 정리한 내용이다.
일일이 저들을 탓하고 뭐라 할 거 없다. “함정을 파는 자는 거기에 빠질 것이요 담을 허는 자는 뱀에게 물리리라 돌들을 떠내는 자는 그로 말미암아 상할 것이요 나무들을 쪼개는 자는 그로 말미암아 위험을 당하리라(전 10:8-9).” 우리는 다만 그 모순된 삶의 정체를 안다. 당나라 사관 오긍(670-749)이 쓴 정치토론집 <정관정묘>에서 저는 말했다. ‘역사를 아는 자는 결코 무너지는 담장 밑에 서지 않는다.’
하다못해 우리의 경험이 우리에게 교훈을 더한다. 말씀을 무시하고 자신의 경험을 우선하는 이를 보면 가소롭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겠나? 어찌 내가 애쓰지 않고 얽매이지 않고 살 수 있을까? 항상 보면 우리의 지나친 몰입이 정작 그 문제의 핵심을 보지 못하게 한다. 안달복달 내 안에 이는 조바심을 나는 이겨낼 재간이 없다. 하여,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우리가 연마해야 할 지혜의 단서는 기도였다. 기도는 하나님의 지성소로 들어가는 일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 10:19-22).” 하나님과의 교제다. 찬양이다. 거룩하신 아버지여! 하고 주의 거룩하심 앞에 서는 것이다.
예수께서 기도하셨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 17:11).” 결국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 그 기도의 핵심은 우리로 거룩하신 아버지 앞에 나아올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십사 하는 것이었다. 항상 보면 기도는 신기하게도 무슨 일이 터졌을 때 절실해진다. 어찌할꼬! 할 때, 주님! 하고 그 앞에 불려 나온다.
그 영혼이 찔린다는 것이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행 2:37).” 곧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우리는 두려운 마음으로 ‘어찌할꼬?’ 하며 가르침을 바라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42).” 즉 우리의 기도는 가르침에 귀 기울이는 것으로 이는 단지 지식을 전달하는 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었다.
하나님과 나, 나와 너, 너와 우리, 우리 모든 주의 성도들의 교제다. 우리는 함께 떡을 뗀다. 어떤 문제, 어려움을 서로 토설하고 주께 기도를 부탁한다. 주 앞에 나와 우리는 성급히 자신의 요구를 간구하게 되지만 기도는 신기하게도 하면 할수록 정작 내가 아뢰려고 했던 나의 간구는 소멸된다. 주의 거룩하심만을 구한다.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고 나라에 임하옵시고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나의 삶 가운데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라게 된다.
내 요구와 간청만 늘어놓는 기도는 칭얼거림이다. 떼쓰는 아이 같다. 성숙하지 못하다. 기도를 하면 할수록 나의 요구는 사라지고 하나님의 요구만을 듣고 싶어한다. 정작 내가 할 말이 있어 주 앞에 나아온 줄 알았는데 자꾸자꾸 주의 말씀만 듣고 싶어진다. 주의 마음을 바라는 일이다. 나야말로 늘 아이들을 상대하면서 정말이지 내 안에 이는 싫증과 신물 나는 짜증스러움을 견뎌내기 어렵다. 생각 같아서는 욕을 퍼붓고 쫓아내어 다시는 얼신도 못하게 하고 싶다. 그 와중에 주의 마음을 되새긴다.
나를 대하실 때 주의 마음이 얼마나 속이 터지실까?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도를 벼리는 일이다. 우리의 지혜의 연장을 연마해야 한다. 왜냐하면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엡 6:11).” 가만히 보고 있으면 이게 그러니까 어쩌다 그리 된 일이 아니다. 무슨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 실은 저 아이를 불쌍히 여겨서가 아니다. 우리의 아량을 베풀려는 게 아니다.
오직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그 나라가 임하시기를.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오늘 나의 이 지긋지긋한 현실에도 이루어지시기를. 결국 오늘 우리의 싸움은 단순한 응근과 끈기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12).” 영적인 싸움인 것이다.
저 아이 하나를 마주하는 일. 그 일련의 사태를 예의 주시하는 일. 그리고 그 일에 참예하여 떡을 떼는 일.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성도의 삶이라면 우리의 살과 피도 뜯기고 부어져야 하는 일이어서, 우리가 지고 가는 자기 십자가는 그저 고달픈 자기 인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내가 저 아이를 대하는 일, 그 일에 개입하고 용서하고 수용하는 일은 단지 저 아이를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정도의 선의가 아니다. 하나님 때문이다.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세세토록 무궁히 아버지께 영원히 있기를. 곧 주의 마음으로 한 영혼을 대하는 일이란 엄청나고 신비로는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이라!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그렇듯 말씀을 준비하며 여러 번 되새기고 입에 머금고 있음으로 나의 영혼을 그처럼 사랑하시고 위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다. 지금은 거울을 보는 일처럼 희미할 뿐이지만,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전 1:3).” 오늘 시인은 고하였다.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알아 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기에 그를 생각하시나이까(시 144:3).” 내가 뭐라고 날 이처럼 귀히 여기시는지!
“여호와여 주의 하늘을 드리우고 강림하시며 산들에 접촉하사 연기를 내게 하소서(5).” 오직 주의 영광이 이 땅에 가득하기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