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10:8-11, 행 2:37, 42 / 무딘 연장을 벼리자
20190303 주일
전도서 10:8-11, 행 2:37, 42
무딘 연장을 벼리자
전 10:8 함정을 파는 자는 거기에 빠질 것이요 담을 허는 자는 뱀에게 물리리라
10:9 돌들을 떠내는 자는 그로 말미암아 상할 것이요 나무들을 쪼개는 자는 그로 말미암아 위험을 당하리라
10:10 철 연장이 무디어졌는데도 날을 갈지 아니하면 힘이 더 드느니라 오직 지혜는 성공하기에 유익하니라
10:11 주술을 베풀기 전에 뱀에게 물렸으면 술객은 소용이 없느니라
행 2: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2: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들어가는 말
종종 우리는 우리가 책임질 수 없는 문제에까지 개입하게 된다. 누구에 대해, 어떤 문제에 대해, 이를 두고 옳고 그름을 따지고, 덜 나쁜 쪽과 더 나쁜 쪽을 구분하여 ‘너는 어느 쪽이냐?’ 다그치듯 묻는다. 최선이 아니면 차선을 선택하려 하고, 이 정도라도 해야 한다는 식의 기준을 세우려한다. 그런 점에서 분명히 할 것은, 우리로 세상 사람들보다 그래도 좀 나은 삶을 살라고 구원하신 게 아니다.
그래도 교회를 다니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면 저들보단 좀 나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기준으로 선을 도모하고 참고 견디는 것을 신앙의 표준으로 삼으려 할 때가 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이에 대한 우리의 처신을 바로 정리하였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즉 그 기준을 믿음의 분량 이상으로 잡는 것은 모두 자기 우상이다.
우리는 결코 세상의 기준에 따라 판단하고 움직이는 사람들이 아니다. 저들보다 좀 더 나은 삶이 우리의 목표가 아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2).” 이를 수천 년 전 저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따르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 너희는 내 법도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 18:3-4).”
오직 우리는, 보다 나은 쪽을 선택하여 모든 사람이 이로운 쪽을 합리적으로 선택하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법도와 규례를 따를 뿐이다. 이는 이 세상이 얼마나 불의의 위험요소가 많은지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굳이 이렇고 저런 사람들의 일과 직업에 관여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려면 우선적으로 우리가 우리에게 맡기신 연장, 지혜를 연마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운다. 결국 가타부타 자꾸 세상 일에 감 놔라 배 놔라 할 거 없다.
그러느니 우린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에게 맡기신 지혜, 하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하신 은혜, 그 놀라운 하나님의 비밀을 벼리고 다져야 한다. 무뎌지지 않도록 늘 깨어있어야 한다. 본문을 중심으로 성경 곳곳에서 이를 강조하는 부분들을 살펴볼 것이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세상에서, 우리로 죽음을 목전에 두고 살며, 잔칫집보다 초상집에서 배우라는 전도서의 가르침은 예수님의 엄중한 경고의 말씀과 마주한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 17:32).” 반드시 더는 돌이킬 수 없는 때가 올 것이다!
1. 저들 일은 저들에게 맡겨두자.
“함정을 파는 자는 거기에 빠질 것이요 담을 허는 자는 뱀에게 물리리라 돌들을 떠내는 자는 그로 말미암아 상할 것이요 나무들을 쪼개는 자는 그로 말미암아 위험을 당하리라(8-9).”
우리는 이 땅에서 잘 사는 게 목적이 아니다. 저들 안 믿는 사람들보다 좀 더 나은 삶을 사는 게 목적이 아니다. 오늘 우리에게 지혜의 말씀은 이를 주목하게 하신다. 지혜서는 우리 일상과 밀접하다. 격언이나 속담이 살면서 그 삶을 통해 얻은 지혜이듯, 살아봐야 알겠다고 하는 삶보다 어리석은 것도 없다. 어른이 아이보다 나은 것은 먼저 산 자의 경험이 유용하기 때문이다. 이를 가지고 교훈한다.
당나라 사관 오긍(670-749)이 쓴 정치토론집 <정관정묘>에서 저는 말하였다. ‘역사를 아는 자는 결코 무너지는 담장 밑에 서지 않는다.’ 즉 과거의 일이 과거의 일로만 그치는 게 아니라는 소리다. 이를 잘 살펴 자신의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지혜다. 주님은 기도로 가르치셨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 6:13).” 살면서 사느라 드는 시험에 대하여 주의 도우심을 구하고 바라는 게 지혜이다.
그럼 우린 어떨 때 기도할까? 단지 오늘의 사정과 형편을 아뢰는 게 기도의 주요한 간구가 아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구한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늘 감사로 시작한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곧 우리에게 기도란, ‘하나님이 계신 자리-지성소’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 10:19-22).” 곧 기도란 하나님과의 교제다. 찬양이다. 거룩하신 아버지여! 하고 부르는 경배다. 주의 거룩하심 앞에 서는 일이다. 예수님은 기도하셨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 17:11).”
여기서 우리의 반응은, 찔린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행 2:37).”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서면 우리는 먼저 두려운 마음으로 찔려 외친다. ‘우리가 어찌할꼬!’ 그러면 사도의 가르침을 구한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42).” 이 가르침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가르침이 아니다. 교제다. 하나님과 나 사이, 나와 너 사이, 너와 우리 사이, 곧 성도의 교제는 함께 떡을 떼는 일이다.
여기서 떡을 뗀다는 것은 주의 성찬에 참예하는 것이다. 주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일이다.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눅 22:19).” 오늘 우리가 주일을 지켜 이 자리에 나온 것은 예수님의 살을 먹기 위함이다. 저는 말씀이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요 1:14). 이를 위해 우리는 오로지 기도에 힘쓸 따름이다.
그런데 다른 부류의 사람들도 있다. 즉 저들도 찔리기는 찔렸는데,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7:54).” 곧 마음에 찔려 앙갚음을 꾀하는 것이다. 좀 더 들여다보면 우리의 수치심이다. 열등감이고 피해의식이다. 당장 어떤 보복을 할 수 없어 마음에 담아두는 마음이다. ‘이를 갊’이다. 어디 두고 보자, 하는 것이다. 그러니 원통하고 괴로워서 열심을 다한다. 함정을 파고 담을 헌다. 돌을 떠내고 나무를 쪼갠다. 나름 수고하고 애써 어느 훗날에 억울함을 토로한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 7:22).”
그래서 바울은 우리에게 영적으로 무장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엡 6:11).” 결국 일련의 감정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 싸움은 굳건히 마음먹는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12).” 다시 말해 오늘 우리의 다툼은 영적인 전쟁인 것이다.
베드로는 더욱 직설적으로 언급한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8-9).” 곧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일은 스스로 고난을 당하는 일에 주저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즉 별 거 아닌 일에 우린 예민하다. 남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일에 우리는 과민대응을 하듯 과민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3).”
이는 결국 우리에게 두신 이 비밀의 놀라운 지혜를 연마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살전 5:6).” 지혜란 그렇게 뚝딱, 생성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말씀을 좇아 산다고 하지만 우리의 믿음이 저절로 자라고 성장하는 게 아니다. 그러니 자꾸 남에게 눈을 돌린다. 저들이 어떤지 저들 일에 관여하고 훈계하고 나서서 비난하고 정죄하고 심판하려 든다. 그러나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2. 지혜의 연마가 필요하다.
“함정을 파는 자는 거기에 빠질 것이요 담을 허는 자는 뱀에게 물리리라 돌들을 떠내는 자는 그로 말미암아 상할 것이요 나무들을 쪼개는 자는 그로 말미암아 위험을 당하리라(8-9).”
전도서에서 말하는 지혜의 유익은 무엇일까? 먼저는 우리로 이 땅에서의 모든 수고가 헛되고 헛되다는 것을 알게 한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1:3).” 우리 인류가 점점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그 근거를 무엇이라 하는가? 스스로들 위안을 삼고 위로를 얻으려 하는 것이 예전보다 나아진 삶이라 할 텐데 과연 그런가? 어떤 것을 말함인가? 편리함? 윤택함? 풍요로움? 그러나 실제 인류 역사상 매 시대는 시대마다 전 시대에 비해 나아진 것으로 자평하여 왔다. 그래서? 사람들이 좀 더 사람다워졌는가?
지혜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누누이 강조하였다. 오히려 지혜는 우리로 ‘모든 소산’이 공평할 뿐이라고 일깨운다. “땅의 소산물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있나니 왕도 밭의 소산을 받느니라(5:9).” 상대적으로 느끼는 박탈감이나 절망감은 어떤 의미에서 행복의 주축이 아니다. 고로 왕이 왕의 왕이 된다 해도 그 욕구는 동일한 것이다. 결국 모든 사람은 똑같이 땅의 소산물로 살아갈 뿐이다. 얼마나 고급스런 음식과 훌륭한 집에서 멋지게 사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설령 누구보다 풍요로운 삶을 살았다 해도 저나 나나 삼시세끼 땅의 소산으로 먹고, 싸고, 누워 자고, 일하다가 땅의 소산으로 돌아갈 따름이다.
우리는 이를 아는 사람들이다. 곧 우리 지혜의 유익은 빛과 같아서, “내가 보니 지혜가 우매보다 뛰어남이 빛이 어둠보다 뛰어남 같도다(2:13).” 이를 앎으로 아는 자의 품에는 언제든 천국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아브라함의 품이 되었듯이!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눅 16:22).” 우리의 품에 천국이 있다.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눅 8:10).”
고로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우리는 더는 이제 어둠으로 다니지 않는다. 공교롭게도 우리 사회의 모든 퇴폐는 어둠으로 다닌다. 현란한 조명과 야시시하고 음침한 공간에서 어둠에 묻혀 쾌락을 즐긴다. ‘물뽕’을 맞고 ‘풍선가스’를 흡입하며 혼합한 술을 마시며 서로 뒤엉켜 난리도 아니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마 24:6).” 우리가 가는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곧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우리의 수고가 얼마나 헛된지를 알게 한다. 그러니 “함정을 파는 자는 거기에 빠질 것이요 담을 허는 자는 뱀에게 물리리라.” 저들은 저들 일로 인해 저들이 행한 대로 드러날 것이다. 곧 모든 나중은 심판이 따를 뿐이다. 또한 “돌들을 떠내는 자는 그로 말미암아 상할 것이요 나무들을 쪼개는 자는 그로 말미암아 위험을 당하리라.” 언제 어떤 일이 우리에게 닥칠지 모른다. 미연에 방지하고 여러 경우의 수를 예측하여 방비한다고 하지만! 전도서는 이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어떤 사람은 그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다하여 수고하였어도 그가 얻은 것을 수고하지 아니한 자에게 그의 몫으로 넘겨주리니 이것도 헛된 것이며 큰 악이로다(전 2:21).” 엄연히 세상은 불공평할 뿐이다. 불공평한 세상에서 공평을 구하고 찾는 일만큼 헛된 수고가 또 있을까? “내가 또 본즉 사람이 모든 수고와 모든 재주로 말미암아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4:4).” 나름 우리의 수고와 공로로 열심을 다해 이룬 성공은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기 일쑤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성공인가? 어떤 의미에서 성공인가?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5:10).” 이 모든 게 헛될 뿐인데, 다만 “명령을 지키는 자는 불행을 알지 못하리라 지혜자의 마음은 때와 판단을 분변하나니(8:5).” 우리가 저들과 다른 분명한 차이다. 곧 우리는 말씀을 따를 뿐이다. 그리하여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놓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11:6).” 다만 우리의 충실함은 의연하고 무던할 뿐이다.
3. 우리의 무딘 연장을 벼리자.
“철 연장이 무디어졌는데도 날을 갈지 아니하면 힘이 더 드느니라 오직 지혜는 성공하기에 유익하니라 주술을 베풀기 전에 뱀에게 물렸으면 술객은 소용이 없느니라(10-11).”
그러니 우리의 지혜는 그 어떤 것보다 값지다.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잠 3:14).” 다시 말해서 그 어떤 것으로도 이를 대신할 수는 없다. 결국 “진리를 사되 팔지는 말며 지혜와 훈계와 명철도 그리할지니라(23:23).” 결국 지혜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기심을 받기를 원하는 것이다. 우리는 간구한다. 우리의 기도는 이것이 시작이고 끝이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곧 우리는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을 때, 감사한다. 말씀을 듣고 그 마음이 찔려서 간구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 이에 감사로 찬송과 경배를 올려드린다. 그러므로 우리의 간구는 우리의 무지와 무능력과 무책임함을 주께 아뢰고 고할 따름이다. 어리석고 보잘것없는 자신을 인정하고 고할 때,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그리하여 우리의 간구는 우리의 지혜를 벼린다. 주를 경외하는 마음을 담금질한다. 참 어리석은 일이지만, 우리는 어떤 어려움이 아니면 자주 기도하기를 잃는다. 무슨 일이 터져야 부랴부랴 주의 이름을 부른다. 주의 긍휼하심을 구한다. 하여 나의 요구만 잔뜩 늘어놓기 시작한다. 꼬인 일이 잘 풀리기를, 어떤 어려움이 극복되길, 우리의 건강을 회복시켜주시기를. 요구와 요구를 부르짖다보면 비로소 들리는 것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아, 그랬구나! 내가 주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구나! 통회와 자복의 애통함이 드려지게 된다. 기도는 그렇게 내 말만 하다 어느 순간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된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된다. 곧 우리가 우리의 지혜를 벼리는 일, 이를 연마하는 것이 기도였다. 더는 가난한 심령으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어느 순간 나의 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었다. 거듭남이란 이렇듯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우리의 무지와 무능을 깨닫고 주의 도우심과 긍휼하심을 구하고 바라는 것이었다.
나오는 말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행 2:37, 42).”
말씀을 맺으며 오늘 말씀을 다시 읽어보자. “철 연장이 무디어졌는데도 날을 갈지 아니하면 힘이 더 드느니라.” 종종 우리가 왜 안 믿는 사람들보다 더 힘이 드는가 했더니!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보다 더 황폐하고 처량한 삶을 사는 까닭이 있었다. 자신이 나름 한다고 하고 믿는다고 믿는 그 수고와 애씀 때문이었다. 무딘 도끼로 나무를 패니 나무는 꺾이지 않고 종일토록 힘만 드는 것이어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게 왜 그처럼 힘들었는지, 오늘 본문은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하면, “오직 지혜는 성공하기에 유익하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혜다. 지혜란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곧 우리의 성공은 오직 하나,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과 같이 영광을 누리는 찬송과 경배의 영생이었다. 이 땅에서 저들보다 좀 나은 삶을 사는 게 아니었다. 그러니 오늘 본문의 말씀은 상당히 은유적이다. “주술을 베풀기 전에 뱀에게 물렸으면 술객은 소용이 없느니라(11).” 나름 한다고 하는 신앙인데 그 기도와 헌신이, 봉사와 희생이 그러다 뱀에 물리면 무슨 소용이겠나?
베드로 사도의 강한 어조의 가르침을 다시 들어보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8-9).” 그러므로 우리의 무뎌진 연장을 벼리자. 우리가 대항할 수 있는 연장은 기도뿐이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막 9:29).” 마음에 찔려, 말씀의 가르침을 받고,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고, 오로지 기도에 힘써 우리 영혼의 연장을 벼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