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너는 그를 거룩히 여기라 그는 네 하나님의 음식을 드림이니라 너는 그를 거룩히 여기라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나 여호와는 거룩함이니라
레위기 21:8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시편 146:1-2
직분을 감당할 때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지 못하면 그 쓰임은 온전할 수 없다. 우리의 거룩은 온전히 주를 찬양하는 일이다. 살아서 사는 동안에 주를 찬양함이 죽어서 주의 나라에 들어가 누리게 될 영광의 예행이다. 이번에 치러진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을 보며 인상적이었던 것은 각국 정상에 대한 의전이었다. 카펫이 깔리고 팡파르가 울리고 축하사절단이 예를 갖추며 서로의 격식과 존중을 행하는 일이 눈길을 끌었다.
“너는 그를 거룩히 여기라 그는 네 하나님의 음식을 드림이니라 너는 그를 거룩히 여기라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나 여호와는 거룩함이니라(레 21:8).” 우리가 서로를 어찌 여기는가 하는 일은 곧 하나님께 대한 예다. 존중과 존경의 찬양이다. ‘그는 네 하나님의 음식을 드림이니라.’ 그러므로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갈 6:6).” 저가 아니라 저가 속한 그 국가에 대한 예의다.
우리가 서로에 대한 관심과 호의와 선의의 모든 것은 단지 저를 향한 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었다. 저를 지으신, 저의 ‘국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예의와 법도를 다하는 일인 것이다. 그러니 서로의 전후사정을 어찌 다 알겠나. 다만 저 하나하나가 하나님을 대신하는 존재로서 내 앞에 보내심을 입은 자로 여기는 것은 궁극적으로 ‘너는 그를 거룩히 여기라.’ 하는 말씀과 마주하게 한다. 왜냐하면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나 여호와는 거룩함이니라.’ 하는 말씀 앞에 무릎 꿇는 것이다.
시간이 다 됐는데도 아이가 오지 않았다. 나는 아이가 전날에 쉬고 토요일에는 출근을 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는 오전에 정신과와 피부과 두 곳 병원을 다녀오느라 토요일 출근을 하지 못했다. 그런 걸 모르고 좀 더 기다려보다 문자를 했다. 어디니? 아직 퇴근 안 했니? 그러자 집이에요! 하는 답이 돌아왔다. 전후사정을 알 수 없으니, 순간 어이가 없기도 해서, 그럼 연락을 좀 주지! 하고 답을 하고는 돌아앉았다. 그럼 쉬고 내일 보자. 하고 답을 한 것은 나의 고약한 마음이고, 지금 가고 있어요! 하고 뒤미처 연락이 온 것은 나를 돌이켜 세우심이다.
항상 앞서는 마음이 순간적으로 서운한 생각을 가지게 한 것이다. 한 시 넘어 두 시가 다 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는데! 하는 나의 수고에 따른 스스로의 보상이었다. 그럼 여느 아이 같으면 귀찮아서라도(?) 네, 하고 안 왔을 텐데 아이는 화들짝 놀라 서둘러 집을 나온 것이다. 그런저런 전후사정을 듣고, 더욱이 엄마와 말씨름하듯 자기고집을 부렸던 일을 들려주는데. 아이에 대한 나의 이해와 존중이 참으로 한심하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어찌 이 모양인지! 아무도 알지 못할 부끄러움으로 아이에게 미안하고 하나님께 죄송하였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시 24:3).” 누군들 주의 뜻을 다 알까? 다 알 수 없으니 그럼 느긋하니 의연하면 좋으련만. 금세 괘씸한 생각이 들고 뚱하니 그럼 내일 보자, 하고 답을 보내고 마는. 나의 얄팍한 마음이 그저 부끄럽기만 하였다.
같이 늦은 점심을 먹고 아이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성경공부를 하고 함께 손을 잡은 일. 내 중심에 진실함을 더하시기를.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51:6).” 아무도 모를 내 속을 까뒤집으면 혐오감만 들 것이다. 어찌나 안달을 부리고 그로 인한 속단이 앞뒤분간 없이 이뤄지는지. 그러면서 스스로 일러 내가 이만큼 했는데, 하는 어떤 기준과 나름 내세우는 공치사는 언제나 나를 좌지우지하는 것이어서.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소서.
나는 본래 어리석은 자라.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5).”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를 주도하려 드는 죄악된 속성을 주께 아뢴다. 누군들 덜 하여 누군들 좀 나을까? “우리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욥 9:33).” 그런 우리를 서로에게 두시고 이와 같이 거룩을 감당하게 하시는 일이었으니.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11:7).” 나는 아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도무지 무슨 말인가, 헤아리다 주를 본다. 이런 말을 해주는 게, 이런 시간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나싶어서!
그런데 오늘 아침, 그게 다 나를 위한 것이었음을 다시금 마주하게 하시는 것이다. “너는 그를 거룩히 여기라 그는 네 하나님의 음식을 드림이니라.” 그러니 “너는 그를 거룩히 여기라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나 여호와는 거룩함이니라.” 같이 성경을 읽고 이를 아이에게 설명하고, 질문을 받고, 횡설수설 엉뚱한 이야기를! 어찌 내가 나의 지혜로 아이보다는 낫다고 여기고 있었던가?
저 아이가 나를 존경함과 내가 저 아이를 존중함이 서로의 하나님께 대한 예의를 갖추는 일이 아니겠나? 아무리 한심하고 답답해도, 저를 한 나라의 정상으로 예우하고 대접함으로 격을 갖춰서 예포를 쏘고 팡파르를 울려 환영하는 일이었으니!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시 146:1-2).” 내가 살아서 죽기 전까지는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 하나님께 향해 어찌 찬양할 수 있을까?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하고, 그 감정의 기복을 스스로는 조절할 수 없어서 말도 의식도 온전하지 못한, 아이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온다. 내 곁에 두시는 것이다. ‘너는 그를 거룩히 여기라.’ 그를 공경하고 거룩히 여김은 저에게 향하신 하나님을 경외함이었다. 그러려니 하고 무시하고 치부하고 깔보는 따위의 모든 언사는 그래서 하나님이 싫어하신다.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마 18:5).” 어제는 미처 몰랐는데, 이 아침 말씀 앞에 세우신다. 대충 여기고 함부로 대해도 되는 영혼은 없다.
두 정상이 만나고 저들을 경호하며 예식을 치르는 것을 보면서, 강대국의 정상이나 보잘것없는 약소국가의 정상이든 그 의전이 하나같다는 데 교훈이 있었다. 누가 누굴! 감히 내가 아이를! 또는 저, 아이를! 어쩌면 내 안에 그처럼 나만 위하고 먼저 바라는 마음이 우선하곤 하는지! 돌아보니 내 심보가 참으로 고약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마치 내가 널 위해 희생한다는 식의 자기위주의 마음이 가득한 거였다. 이만큼 했으니 이 정도 예우는 받아야겠다는. 그렇듯 내가 누굴 무시하며 사는 게 얼마나 잦은지.
멋대로 생각하고 함부로 판단하여 저의 전후사정은 고려하지 않고 자기위주로 생각하고 멀리하고 지워버리기까지 하였던, 내 안의 냉혹하기 이를 데 없는 마음을 회개한다. 스스로 이르기를 나는 할 만큼 했다고 여기는 것이다. 도대체 그 기준을 어디고 두고 있던 것일까? 나야말로 하나님을 알지 못함으로 이처럼 함부로 구는 게 아니겠나?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
그래도 감사한 것은 아이가 그렇듯 와주니 감사하였다. 이래저래 힘들고 또 적당히 먼 거리라 못 오겠다고 하면 그만이기도 할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저 아일 날 위해 보내심이다. 나로 하여금 ‘그를 거룩히 여기라’ 하심은 그 뒤에서 하나님이 조성하시는 여러 일들을 내가 미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건과 상황과 사람들 뒤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 그에 따른 예우를 익혀야 한다. 찬양은 예행이 따라야 한다.
살아서 우리가 드린 찬양의 예행으로 주의 나라에서 영광과 영광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시 보면,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시 146:1-2).” 그게 어디 즉흥적으로 이루어질 일이겠나? 몸에 배고 마음으로 이루어져야 할 일이어서, 내가 여기서 누굴 의지하고 무엇으로 도움을 받아서 될 일이 아니었다.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3).”
우리는 모두 소멸될 것이어서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4).” 그러나 그 소망을 하나님께 두는 것이 지혜이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5).” 하나님을 나의 도움으로 삼고 그 하나님께 나의 소망을 두고 사는 것이 복이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억눌림과 갇힘에서 정의로 심판하시고 자유를 주실 것이다(6-7).
내 눈을 여시고 나를 나의 비굴함에서 일으키실 것이다(8). 이 땅에서 나그네로 지나는 나를 보호하시며 의지할 데 없는 우리를 일으키실 것이다(9). 그러므로 “시온아 여호와는 영원히 다스리시고 네 하나님은 대대로 통치하시리로다 할렐루야(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