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너희는 내 계명을 지키며 행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위기 22:31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시편 147:11
때를 따라 더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아이가 아이를 좋아하고 아이가 아이를 위하는 게 보기 좋았다. 같이 앉아 말씀을 받고 성경공부를 하고 함께 놀다 가면서도 카톡으로 이런저런 안부를 남기는 것이 기특하면서도 고마웠다. 다만 “너희는 내 계명을 지키며 행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22:31).”
말씀을 앞에 두고 설 수 있는 게 복이었다.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자니 나는 여호와이니라(33).” 오늘의 이 모든 것들이 괜한 게 아니었다. 어쩌다 그리 되는 일은 없다. 개인적으로는 이런저런 갈등과 사연이 저로 하여금 주를 바라게 하고, 서로에게는 서로가 때를 따라 돕는 긍휼하심이었다. 해야 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정도로 감당하는 것뿐이다.
이때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시 147:11).” 우리는 그렇게 말씀을 나누었다. 우리가 연마해야 할 연장이 무엇일까? 오직 지혜다. “철 연장이 무디어졌는데도 날을 갈지 아니하면 힘이 더 드느니라 오직 지혜는 성공하기에 유익하니라(전 10:10).” 지혜가 무언가? 주를 경외할 줄 아는 마음이다. 아이들과 성경공부를 하며 그리 설명하였다.
남들은 신경도 안 쓰고 별로 의식되지 않는데, 하나님을 의식하고 두려워할 줄 아는 마음으로 살자. 주신 이가 또한 우리를 창세전에 예정하시고 택하신 일이다. 에베소서 1장을 설명해주는데 내가 더 신이날 줄이야! 오늘 나는 내가 살아온 삶의 결과가 아니다. 미리 예정하시고 택하신 바,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5).” 이런저런 힘든 사정이 우리로 더욱 주를 바라게 하는 것이었다.
약이 더 늘었다는데, 그래서 열 개가 되었고 그건 더 좋아지는 것이라는데 도대체 무슨 소린지! 염려와 우려가 먼저 앞서지만 그것까지도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6).” 소경된 이가 소경으로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는 것이면 스스로 소경이 아니라 하고, 본다고 여기는 자보다 복된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 9:41).” 아이들에게 조심스럽게 설명하였다. 어떤 질환 또는 사연을 가지고 남모르게 힘겨워하는데 그걸 주의 뜻이라고 말해주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신다.’ 곧 나는 병약한 아이의 간절함이 저로 하여금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한다고 일러주었다.
그럼 지혜를 연마한다는 게 무엇일까? 우린 그의 긍휼하심 앞에 담대히 나아가 아뢸 수 있는 자들이다. 그럴 자격이 된다. 미주알고주알 주 앞에 고하고 바라고 원하고 간구할 때, 그러다 보면 어느새 그것들을 통해 주가 이루어 가시는 놀라운 역사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그저 나는 나에게 주어진 고달픈 장애인 줄 알았는데, 그것으로 인해 주께서 이루시는 놀라운 구원사역이 있었던 것을 알게 된다.
서로가 의아해할 정도로 벌써 10년을 훌쩍 넘겨 초등학교 6학년 때 만나 군대를 갔다 오고 대학을 다니고 있으면서 한결같이 우리가 함께 주를 바라고 의지할 수 있다는 일. 말이 별로 없는 녀석이라 서로가 데면데면할 뿐이지만 나는 저를 저 아이는 나를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안다. 그리고 우리 곁에 두신 아이, 이 아이의 이런저런 사정이 도리어 우리로 하여금 주의 인도하심을 더욱 신뢰하게 하는 것이었으니.
오늘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갖는 이 경외함이 얼마나 신비한가? 전에는 그처럼 외면하고 부정하던 쪽으로 걷고 있으니, 아이는 그런 내가 증거가 되는 것이고 그런 나를 마다하지 않고 여전히 함께 동행하는 아이가 내겐 증거가 되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내버려두는 일도 배운다. 더는 누구에게 연락하지 않고 먼저 안부를 묻거나 교회에 나오기를 종용하지 않는다. 또한 저들과 함께 하실 성령님의 역사를 의뢰한다.
주가 이루실 것이다. 다만 우리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이 기쁨은 인위적인 게 아니라 저절로 그리 되는 신비다. 도리어 슬퍼하고 힘에 겨워 우울해해야 마땅한데 그런저런 사정과 상관없이 우리로 하여금 기뻐할 수 있게 하시는 것이어서,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5).” 이와 같은 관용도 억지가 아닌 것이다. 왜 저 아이에게 마음이 쓰이는지, 그 영혼을 두고 왜 자꾸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우리가 예수를 언제 봤겠나?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 1:8).” 그런 논리로 저들은 저들 나름 수고하고 애쓰는 것이면 그대로 두자. “함정을 파는 자는 거기에 빠질 것이요 담을 허는 자는 뱀에게 물리리라(전 10:8).” 저들은 저들의 선택의 결과를 이고 사는 사람들이다. 우리의 무능함이 저들보다 낫다.
저들의 그 수고가 애처로울 따름이다. “돌들을 떠내는 자는 그로 말미암아 상할 것이요 나무들을 쪼개는 자는 그로 말미암아 위험을 당하리라(9).” 힘겨운 날들을 살면서 누구는 죽어라 하고 열심을 다하는데 그저 그게 다여서 죽을 맛인데, 우린 오히려 하는 것도 없는데 늘 기쁘고 평안한 것이어서 감사할 따름이다. 나는 곁에서 모르는 척 하면서 두 아이가 서로를 위하고 필요로 하는 모습을 보며 신기해하였다.
성령이 임하셨고 하나님의 강한 손이 우리를 붙드신다는 것은, 때로 말도 안 되고 두렵고 짜증나는 일이기도 하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눅 5:4).” 한다고 했는데 더 깊은 데로 내몰며 다시 하라 하시는데, 이걸 따를 수 있는 게 주를 경외함으로 아니겠나? 그럴 때의 결과는 우리로 우리 자신의 죄인 됨을 더욱 여실히 마주하게 할 뿐이다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8).”
사람마다 다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권능을 붙들고 산다는 일은 엄연한 지혜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행 2:43).” 생활 가운데서 그 기사와 표적을 피부로 느끼며 사는 삶이란 참으로 귀하여서, 이를 연마하자. 여기까지 인도하신 이를 신뢰하자. 스스로를 주 앞에 세우자. 우리의 믿음의 연장인 지혜를 벼리자. 그 길은 기도여서 속수무책 아뢰고 또 고할 뿐인 나의 간구가 어느새 주의 뜻을 바라는 선명한 마음이 되어 있었다.
이를 오늘 아침 말씀에서 다시 읽으면, “너희는 내 계명을 지키며 행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22:31).” 그렇게 나에게 있어 나의 여호와가 되시려고 나를 이끌어내셨고 여기까지 함께 하신 일이라면,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시 147:11).” 이보다 더 쉽고 간절하며, 기쁘고 다행스러운 일이 또 어디 있겠나? 최소한 내가 나를 책임져야 하는 일이 아닌 것을 말이다.
그 기쁨과 순전함으로 횡설수설 아이의 맥락도 맞지 않는 대표기도에 우리는 귀를 쫑긋 세우고 아멘으로 화답할 수 있게 되는 일이다. 그러니까 유창한 그 어떤 기도보다 다만 저 아이의 간절함이 우리의 것이 되어 함께 주를 바라는 순간이었다. 가르침을 받고 함께 교제하고 떡을 떼는 일로 오로지 기도에 힘쓰는 것! 그리하여 “너희는 내 성호를 속되게 하지 말라 나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거룩하게 함을 받을 것이니라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요(레 22:32).” 말씀 앞에 고개를 끄덕거린다.
우리로 거룩하게 하시려고, 오늘 우리에게 두시는 이 모든 이야기와 이야기가 선하였다. 아이의 약 개수가 늘어나고 그 상태가 더 안 좋아진 것 같은데도. 또는 안 믿는 부모와 형제를 두고 혼자 씨름하며 잘 견뎌오고 있는 아이의 힘겨운 싸움을 보면서. 우리 서로가 어찌할 수 없는 개개인의 아픔과 슬픔을 대신 감당할 수는 없으나, 우리의 교제가 그 주님의 살과 피를 나누는 성찬의 삶을 살면서 더욱 간절하게.
나야말로 아이들로 인해 은혜가 크다.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선함이여 찬송하는 일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시 147:1).” 우리에게 더하시는 아름답고 마땅한 일에 대하여! “감사함으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수금으로 하나님께 찬양할지어다(7).” 결국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11).”
우리로 그가 기뻐하시는 자로 삼으시기 위하여 “눈을 양털 같이 내리시며 서리를 재 같이 흩으시며 우박을 떡 부스러기 같이 뿌리시나니 누가 능히 그의 추위를 감당하리요(16-17).” 그런 힘듦으로 주 앞에 간구할 때, “그의 말씀을 보내사 그것들을 녹이시고 바람을 불게 하신즉 물이 흐르는도다(18).” 말씀으로 말씀에 이르게 하시는 주의 은혜라. 이는 결코 모두의 은혜가 아니다. “그는 어느 민족에게도 이와 같이 행하지 아니하셨나니 그들은 그의 법도를 알지 못하였도다 할렐루야(2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