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전봉석 2019. 3. 13. 07:20

 

 

그들이 할 일과 짐을 메는 일을 따라 모세에게 계수되었으되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들이 계수되었더라

민수기 4:49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시편 6:9

 

 

서로 할 일이 있고 각기 그 역할이 다르다. 지나치게 밀착되면 오히려 서로를 병들게 한다. 살면서 어찌 서로에게 상처를 받지 않고 주지 않고 살 수 있을까? 브래드쇼는 <수치심의 치유>에서 이를 우리의 내면화된 수치심 때문이라 하였고, 신기하게도 내면화된 수치심은 그런 상대를 만나고, 그런 자식을 낳고, 아이도 자라면서 결국은 그 수치심을 전수하게 된다고 보았다. 새삼스러울 게 없는 논리다. 아담이 타락하여 스스로 무장하게 된 감정도 수치심이다. 부끄러움으로 숨었고 꾀를 내어 자신의 치부를 가렸다.

 

저의 책 <가족>을 새로 주문한 것은 그것으로 결국 서로에게 전수되고 전이되어 확장하고 재생산되는 시스템을 가졌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에게 수치심을 안기는 가장 가까운 대상은 가족들인 것이다. 한데 이것이 공교롭게도 그 특성상 서로 은폐하고 조작하여 전체의 균형을 위해 개인의 몫을 배제한다는 것인데, 가령 아버지의 부끄러움을 자식이 대신 짊어짐으로 남들 눈에 가린다.

 

어머니의 사랑을 올바르게 받지 못한 아이는 스스로 어머니 역할을 하여 겉으로는 어른스러운 아이, 착한 아이로 평가받지만 실제 저의 잃어버린 어린아이는 고스란히 수치심으로 남겨진다는 것이다. 결국 가족의 문제는 서로 숨겨주는 만큼 심각하게 곪아간다는 것인데, 문득 드는 기억도 그렇다. 아이가 부모에 대해 뭐라 안 좋은 점을 이야기 했다고 해서 내가 그 가정에 대해 어떻게 인식할까 싶어 덧댄다. 좋은 점을 찾는 것이다. 은폐하고 숨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게 좋은 기억으로 남는다.

 

떠올려보면 유년의 기억이 좋았고 부모가 나름 희생하고 그 사랑이 고맙고 좋은데, 그 아래 숨겨진 무의식 속에는 수치심이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가족이란 특성상 전체의 균형을 잃지 않으려고 개인의 감정이나 상처는 스스로 봉인하고 없었던 것처럼 치부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랬던 대상이 사라지면 마치 곪았던 고름이 터져 나오듯 새삼 느껴지는 수치심의 근원이 종잡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괜찮았는데 힘들었다. 별로 나쁜 기억이 없는데 외롭고 고단했다. 부모에게 감사하지만 저들의 결핍은 아주 늦게 내가 다 늙어서 터져 나오기도 하는 것이다.

 

내가 이해한 내용은 그렇다.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며 읽는데 어느 대목에서는 한참씩 먹먹하였다. ‘따귀 맞는 영혼같다고 할까? 가족이란 참 모질고 어려운 관계여서 속 시원하게 누구 탓을 할 수도 없는 것이어서 이를 자신이 끌어안고 사는 바람에 그 무게가 가중되는 것이겠다. 나는 저의 책을 밀어두고 로이드 존스 목사의 설교집도 같이 읽는다. 치유를 운운하지만 그건 우리가 스스로 어찌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곧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로 죄로 인한 것이기 때문에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빌라도의 판결같은 것이다. 저도 예수님이 죄가 없음을 알고 있었다. 저의 아내도 그 사실을 지적했다. “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27:19).” 그런데도 저는 갈등하였고 어쩔 수 없다는 듯 판결을 저들 손에 맡겨 그리스도를 죽게 하였다.

 

늘 우리가 말하는, 어쩔 수 없고 별 수 없는 갈등과 형편과 사정과 여러 상황에 대하여는 결국 우리가 안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한다. 그러할 때 주님의 모습은 역동적이다. 자신을 구원하지 않음으로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신 것이다. 결국 우리의 기질과 죄의 원천은 가족으로 인해 전수되고 전이되어 대물림 하듯 전가되어 오는 것이다. 한 쪽 균형이 무너지면 다른 것을 희생하면서라도 그 항상성을 지키려는 데 있어, 복원 능력이 뛰어난 가족이 참으로 단란하고 다복해보이지만 실은 그 안에 엄청난 수치심을 서로 끌어안고 사는 것이다.

 

한 친구는 어릴 때 사촌 오빠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그 부모도 이를 모르지 않지만 서로 쉬쉬하고 덮었다. 이 친구는 아무에게도 이 말을 하지 않았고 여느 가족 모임 때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 사촌과 마주치면 자연스럽게 행동하려고 했다. 늘 못이 박힌 아버지의 성정과 상대적으로 유약한 엄마의 심성을 중간에서 복원하느라 아내 같은 딸 노릇을 하였고 형제들 사이에서는 그 가정에서 엄마 같은 언니요 누나였다. 아버지가 욱, 할 때마다 그 화풀이를 이 친구가 대신 다 받아냈던 것이다.

 

한데 저는 번번이 자기 생활에서 변변한 남자를 사귀지 못했고 이내 결혼까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둘러싸고 있는 가족들 일에 치여 지긋지긋한 것이다. 겉으로는 효심이 깊고 늘 어느 형제들보다 나서서 집에 어떤 문제가 터지면 그 일을 수습하느라 동분서주하는 인물은 항상 이 친구였다. 한데 그 다음으로 조카아이가 그 역할을 이어받았다. 못이 박힌 아버지와 냉랭한 엄마는 끝내 이혼을 하였지만 양쪽을 건사하며 일인 삼역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종종 친구는 그 조카 칭찬을 늘어지게 하다가도 어느 지점에서는 아무도 모르게 한숨을 깊이 내쉰다. 신기하게도 그 애 역시 여러 남자를 만나고 있지만 결혼은 하지 않겠다고 하는데. 무너진 아버지 자리를 자식 중에 누가 대신하면 그의 몫은 두 배가 된다. 서로 정서적으로 그리 의존하며 이끌어가는 게 화목한 가족으로 느껴지고 또한 그리 보이지만 실제 저들 개개의 영혼은 그러다 불이 번쩍, 따귀를 얻어맞곤 하는 것이다. 이내 하나님 역할을 자처하려 하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을 다시 읽어보면, “그들이 할 일과 짐을 메는 일을 따라 모세에게 계수되었으되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들이 계수되었더라(4:49).” 서로의 역할과 그 할 일이 각각이다. 가장 건강한 관계는 자기 역할에 충실한 것이다. 이와 같은 말씀은 오래 전부터 말씀으로 있었다. 저들 모든 선지자가 해주었던 말이다. 예수님도 이를 의탁하사 자신이 고통 받을 것을 아셨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자기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3:18).” 그러니 어쩌면 좋을까? 말씀에 집중하고 그 말씀을 따라 사는 게 가장 현명하다. 우리 주변에 깔려있는 어쩔 수 없는 관계와 관계 속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관계는 하나님과 나의 관계다. 내가 아들 때문에 마음이 심란하고 우울하고 심지어는 어떤 미안함이 죄책감으로 짓누르며 나를 옥죄곤 하지만 그건 별 수 없는 일이다.

 

서로는 어찌 됐든 상처를 주지 않고 또는 받지 않고는 살 수가 없다. 그게 실은 의도한 게 아니라 해도, 나름 잘한다고 잘한 것인데도 저에게 상처가 될 수 있고 나에게도 상처로 남을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어떻게 해결하려고 나서는 것이 화근이라. 어차피 나와 하나님과의 문제이듯 아들과 하나님과의 문제다. 나로 인해 아이가 상처를 입었고 그것을 수치심을 내면화하여 살아가고 있다 해도 내가 나서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과 나 자신과의 문제다.

 

어떠하든 한결같으신 분이 계시다. 그 원천은 우리와 같이 시험을 받아 우리를 동정하실 줄 아는 이시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4:15).” 내가 아들을 사랑하되 그 한계는 뚜렷한 것이어서 더는 다가갈 수도 다가가서도 안 되는 어느 지점이 있는 것이다. 공연한 밀착은 오히려 서로를 바로 보지 못하게 한다. 문제에 코 박고 있으면 나중에는 문제조차 문제로 여겨지지 않는 것이다.

 

왜 예수님은 죽으셔야만 했을까? 오죽했으면! 그리하여 예수님도 말씀에 따라 말씀 붙들고 사셨고 죽으셨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자기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3:18).” 이로써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1:29).” 알면 아는 만큼 보인다. 보이면 보이는 만큼 더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3:19).” 새롭게 된다는 게 어디 쉬운가? 그러니 어렵다고 관둘 수 있는 문제인가? 내려놓는다는 게 새삼 참 적절하고 아름다운 표현인 것 같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누구의 아버지로서의, 어디서 무슨 존재로서의 나의 모든 허울 좋은 위상은 실제 가만히 들여다보면 위선과 거짓뿐이다. 그러니 회개하고 돌이켜 죄 사함을 받는 길밖에 달리 더 나은 길은 없다.

 

그런 우리에게 남다른 진면모가 있다면,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6:9).” 간구할 수 있는 대상과 간구해도 된다는 담력과 그 믿음을 우리 안에 주셨다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인지. “진실로 내가 이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9:2).” 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께 변론하기를 좋아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3).”

 

그러므로 내 간구를 주께 아뢸 뿐. “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6:1-3).” 나의 탄식과 나의 눈물을 아시는 주님께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