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서 여호와께 말하려 할 때에 증거궤 위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목소리를 들었으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이었더라
민수기 7:89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시편 9:10
서로의 관심이 다른 데 있으면서 그 작은 엇갈림이 나중에는 까마득히 먼 사이로까지 벌려놓는다. 오후께 친구와 통화를 하다 그런 생각을 하였다. 모처럼 대화인데 할 말도 없고, 이어지지 못하는 대화는 어색하고 불편하였다. 전 같지 않다는 말, 일련의 사회 사건에 대하여 저들의 행태에 대한 이런저런 수다 이어질 법도 한데 관심이 없는 것이다. 흥미를 잃었다고 하는 게 나을 것 같다.
무엇에 대해 뭐라 말하는 일조차 성가시고 귀찮았다. 관심 밖의 일이 된 것이다. 누가 어떻대! 하는 말, 전날에 누가 앞서 죽은 아내를 기리며 여전히 혼자 살고 있고 급기야 잘 나가던 회사도 그만두고 들어앉아 번역 일을 하고 있다는 말이 계속 뇌리에 남았다. 나이든 노모는 기일에 맞춰 바리바리 음식을 장만하였다는 말에서도 어떤 안타까움이 무겁게 짓누르는 듯하였다.
대화란 관심의 방향에서 들려지는 소리다. 혼자 떠든다고 될 게 아니다. 잘 듣는 일은 성숙한 사람이 비로소 할 수 있는 참여다. 친구는 자꾸 뭐라 이야기를 하는데 도대체 그런 이야기에는 더 이상 귀를 기울일 수 없었다. 이상하다는 느낌, 한때는 죽이 맞아 수다쟁이들처럼 이틀이 멀다하고 낄낄거리며 이어지고 쏟아지던 말들이 있었는데, 관심 밖의 일에 대하여 그만 말하게 할 수 없어 그만 듣는 쪽으로 가닥을 잡으니까 서로 연락이 뜸하고 소원해지는 거였다.
설교 원고를 작성하고 나면 한 주가 다 끝난 것 같다. 무엇보다 어떤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데 무던함이 제일이었다. “그런즉 근심이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이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어릴 때와 검은 머리의 시절이 다 헛되니라(전 11:10).” 모든 게 지나고 나면 그만인 것이어서, 앞서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9).” 하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게 지혜였다.
우리가 즐기는 것을 잘 가꾸어가야 할 거였다. 희락은 하나님의 웃음이다. 함께 통하고 그 대화가 이어지려면 관심이 같아야 한다. 그 웃음에 같이 웃을 수 있어야 한다.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그 모든 일이 심판대 앞에 놓일 것이다. 그래서 특히 청년의 때에는,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딤후 2:22).” 치기어린 나이라 원하는 대로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이를 부추기는 사회라, 젊을 때 다 해 봐! 하는 소리보다 무서운 게 없다.
오늘 우리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은 관음증 또한 몇몇 젊은이들의 행태만은 아니다. 가해자에 대한 관심보다 그 피해자가 누군지, 동영상이 떠돌고 막무가내로 누굴 지목하여 돌림 말이 이어지는 것이었으니. 어른들이 없는 사회라. 저들 또한 다를 게 없어 놀이문화처럼 성접대는 만연하고, 이를 은폐하고 시치미 떼는 짓은 애나 어른이나 다를 게 없으니. 그런 자의 자식이나 그 자식의 부모나 모두가 부끄러운 사회다.
이 모두는 너무나 짧게 지나가는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이를 알면 알수록 오늘의 화두가 관심 밖의 것이다. 결국 우리는 이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닌 것이어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15-16).”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어른이 또 청년의 때가 몇이나 될까?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한때 우리 대화의 전부였다는 데서 오늘 벌어지고 있는 ‘누구의 카톡방’에서 주고받았을 대화에 내 자신이 먼저 부끄럽기만 한 것이다. 다 그렇다고 해서 다 그래, 하고 치부하기에는 사회에 너무 어른이 없다. 가장 슬프고 고약한 모습이 소위 말하는 ‘태극기부대’ 어른들이 아닐까? 저들을 부추겨 자신들의 주장에 이용하는 세력을 나는 증오한다. 파렴치한 것들이다.
끝내 모른다 하면서 증거가 나오면 탄압을 운운하고 ‘빨갱이’로 몰아세우는 그 얄팍한 전술에 여전히 온 사회가 들썩거리는 꼴이다. ‘지나치게’ 선하면 악할 뿐이다. 그래서 성경은 기도를 알게 한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 90:12).” 혀 꼬부라진 소리로 아내 손을 꼭 부여잡은 전직 대통령의 외마디 비명 같던 ‘왜 이래!’ 하는 역정이 눈물겨웠다. 곧 죽음이 코앞인데 여전히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회개할 수 없는 저의 치매 소식이 오히려 안타까웠다.
더는 돌이킬 수 없는 기로에 선 노인이 법정에 들어서는 모습과 성행위를 촬영하여 서로 돌려보며 낄낄거렸을 젊은이들이나 이를 부추기고 방조하고 은근히 곁눈질로 보던 관음증이 만연한 사회 모든 계층이나,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소서.’ 시인의 기도가 애타는 심정으로 들리는 건 왜일까? 살날을 계수할 수 있다면 지금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한데 또 이를 지지하고 옹호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놓지 않으려는 세력이 더욱 득세를 하는 판이니!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 5:15-16).” 먼저였는지 나중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친구와 통화를 하고 또는 설교 원고를 탈고하고 난 뒤 나는 오늘 나의 동떨어진 삶이 감사하였다. 이 무료함을 사랑한다. 외롭고 고독한 데 놓인 것을 은총으로 여긴다. 나의 젊은 날, 다 그렇지 뭐! 하듯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일들을 놓고 회개한다.
두려워할 줄 모르는 사회는 죽은 사회이다. 자기 목소리에 취한 사회는 썩은 사회이다. 오늘 말씀은 이를 상기시킨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서 여호와께 말하려 할 때에 증거궤 위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목소리를 들었으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이었더라(민 7:89).” 저가 말하려다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 회개란 내가 내 잘못을 말하고 있다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일이다.
내 할 말만 하는 게 기도가 아니었다. 이는 회막에 들어가는 일이다. 주의 성소다. 그 내밀한 장소에서 불현듯 나의 말은 들어가고 하나님의 말씀이 들린다. 이를 명료하게 정리한 것이 지혜자의 증거가 아닐까?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창 12:1-2).” 더는 돌이킬 수조차 없는 때가 오나니,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 17:32).” 이 말씀은 오금을 저리게 한다.
다 된 줄 알았는데, 소금기둥이 되었다!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니고 그대로 영원을 마주해야 하는 일은 끔찍하다. 시쳇말로 빼도 박도 못하는 경우가 이런 게 아닐까?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라. 즉 기억할 수 있을 때 기억하라는 것. 곧 곤고한 날이 올 것인데 모든 인생은 그러하다. 엑스터시를 먹고 발정제를 먹는다 한들 그저 초라할 따름이어서. 결국 나는 아무 낙이 없었다 할 때가 가깝다. 해와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이 아침, 말씀 앞에 앉아 나를 돌이키시고 오늘 우리 사회의 문제 이면의 것을 바라보게 하시는 주님께 영광을. 친구와의 대화에서 어떤 내용이 더는 관심 밖의 것이 된 것에 대하여 안도하며. 여전히 나는 두려운 것이 언제 또 이리 휩쓸리고 저리 흔들리지 않을까 근심이 앞서는데,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시 65:4).” 오늘 나의 외따로움이 은혜였구나!
고로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9:10).” 오늘 시인의 기도를 따라 읊조린다.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 받는 나의 고통을 보소서(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