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이 엎드리니라
너희는 이 회중에게서 떠나라 내가 순식간에 그들을 멸하려 하노라 하시매 그 두 사람이 엎드리니라
민수기 16:45
자비로운 자에게는 주의 자비로우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악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니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
시편 18:25-27
서로 다투고 시비하여 주의 뜻을 거스르는 일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서너 명 이상 모이면 사람들이란 그런 것이어서, 오늘 본문은 오히려 모세의 자세를 더욱 주목하게 한다. 보면 또 믿고 맡긴 사람이 반역하는 법이다. “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할의 아들 고라와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과 벨렛의 아들 온이 당을 짓고(민 16:1).” 저들이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서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 가운데에서 이름 있는 지휘관 이백오십 명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르니라(2).”
이러할 때, “너희는 이 회중에게서 떠나라 내가 순식간에 그들을 멸하려 하노라 하시매 그 두 사람이 엎드리니라(45).” 모세는 아론과 엎드렸다. 저의 자비는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붙들었다. 이를 시편의 표현으로 되새기면 “자비로운 자에게는 주의 자비로우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악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니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시 18:25-27).”
늘 같은 내용의 말씀 같지만 늘 같은 원망과 불평과 주께 대한 반역이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그러한 특징을 아이의 묵상글에서 읽었다. 하려고 하는데 안 된다. 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안 된다. 이는 아주 단순한 표현 같지만 엄청난 깨달음이었다. 즉 전에는 이만하면 됐지 뭐? 하는 마음이었다. 한다고 했고, 할 만큼 했고, 그럼 됐다고 여기던 그런 마음 말이다. 그런데 이제 우린, 심령이 가난하여졌다. 애통한다. 그럼 그럴수록 청결하여진다.
나는 아이의 묵상글을 읽는다는 걸 숨기지 않았다. ‘아픈 아이’는 더욱 산만하여져서 틱장애가 있는 것처럼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당황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리곤 하였는데, 우리는 그것도 같이 나누고 모르는 척 하지 않았다. 교회란 서로 드러내는 곳이다. 주의 이름 앞에 엎드리는 자리다. 예배 후에 두 녀석을 앞에 두고 에베소서 2장 후반부를 가지고 말씀을 가르쳤다. 그러는 시간이 좋았고, 좋다고 같이 앉아 먼저 가지 않는 아이의 모습이 대견하기도 하였다.
결국 킥복싱은 하기로 하였다. 그리 이르고 다독였는데도 아이는 아이 스스로 자제가 안 되는 것이다. 그러니 뭐라 야단친다고만 될 일이 아니어서, 해봐야지 별 수 있겠나? 그러는 동안 소비되는 돈은 물론이고 곁에서 마음 졸이는 아이엄마의 심정이 안타까웠다. 그런 우리 서로의 어쩔 수 없음을 서로 드러내고 지지하고 이해하는 일은 소중하다. 곁에서 ‘이런 아이’를 챙겨주고 들어주고 함께 하는 아이의 모습이 또한 고맙고 대견하였다. 녀석도 안에 감추고 사는 ‘지지받지 못한 아이’가 내재되어 있는데.
그럼에도 우린 같이 달려가는 사람들이다. 앞으로 나아간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조금은 어렸을 때 유난히 나는 아이들에게 부채감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표현을 썼었다. 저보다 좋은 가정형편과 육신과 좋은 대학과 명석한 두뇌 등은 모두 하나님이 그러지 못한 사람들의 것을 더하여 맡기신 것이다. 내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우리가 전엔 그와 같은 말씀에 귀를 기울였던가? 우린 저들과 다를 바 없는 이방인이요, 할례를 받지 않은 자들이었다. 곧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었다.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들로 살았었다. 에베소서 2장 11절부터 같이 읽으며 그 의미를 설명하고 우리 이야기로 가져오자 아이들은 주목하였다. 그렇듯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다.
내 옆에 두시는 너, 나와 너, 우리는 둘로 하나를 만드신 주의 능력이시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시다. 우리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셨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 곧 우리의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셨다. 그리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셨다. 뿐만 아니라,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다. 우리는 이제 이 평안이 주는 평안을 안다.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20).” 그저 나는 같이 말씀을 읽으면서 그러한가? 하고 아이들의 이해를 물었다. 겨우 두 명이고 그 중 하나는 알아듣기나 하는 것인지, 나는 알 수 없으나 저 둘이 지금의 나에게는 전부였다. 그리고 또 드러내기를 한 아이가 오게 되기를. 자살을 비상금처럼 품에 품고 있다가 새롭게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하신 일에 대하여.
나는 일부러 더 숨기지 않는다. 숨기는 것은 모두 썩을 뿐이다. 상한 영혼은 대책이 없다. 영원한 형벌에 들어가거나 주의 자비하심으로 긍휼히 여김을 받아 회복되거나. 그 무엇도 우리 임의로 할 수 없으나 교회란 서로 신뢰하고 드러내어 대면하고 지지하며 같이 슬퍼하고 같이 그 짐을 나누어지고 주 앞에 엎드리는 것이다. 내가 읽은 책들이나 내가 아는 성경의 가르침은 모두 동일하였다. 즉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19).”
이 얼마나 영광되고 귀한지. 우린 다만 말씀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친히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20).” 나는 자주 아이들 눈높이에서 설명하려 하였고, 자연스럽게 나의 이야기는 읽혀져야 하는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었다. 곧 우리에게 말씀이란 ‘잘 박힌 못’과 같아서,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21).” 말씀으로 서로 연결되는 것이다.
결코 나는 심리학으로 치유를 운운하고 철학으로 사유를 종용하며 나름의 논리와 이성적인 판단으로 증명하려는 게 아니었다. 우리에게는 같은 말씀이 있다. 각각 그 말씀은 나에게도 그러하듯 아이들에게도 그러하여 “지혜자들의 말씀들은 찌르는 채찍들 같고 회중의 스승들의 말씀들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가 주신 바이니라(전 12:11).” 찔린다. 박힌다. 깊숙이 박혀 우리 개개의 하나하나는 “건물마다 서로 연결되어”지듯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는 것이다.
곧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2).” 나에게는 약간 고집스러운 과정 같이 성경공부를 하려면 에베소서부터 같이 읽는다. 읽힘으로 우리의 정체성을 먼저 알아야 한다. 왜 말씀을 따로 공부하듯 연구하고 살펴 그 뜻의 의미를 더해야 하는지. 이것이 결국 공부로 그치는 게 아니라 삶이어야 하고 삶이었다는 것을. 한 달 남짓 이를 분명히 하고 각자에게 맞춤한 부분으로 심도있게 성경공부를 하기로 하였다.
한참 그럴 나이들이라, 댄 알렌더와 트렘퍼 롱맨 3세의 <결혼과 성>을 가지고 다음 달이나 늦어도 그 다음 달부터 진도를 나가자고 하였다. 본래는 딸애와 그 사귄다는 애를 대상으로 하려던 것인데 둘 다 여의치 않아 그럼 됐다 싶었는데 이렇게 되었다. 이 모두가 주의 주도하심 아래 있다는 것을 붙든다. 결코 내가 하는 게 아니다. 나는 자주 고백하고 기도를 부탁한다. 한 주간 내가 무슨 꼴을 먹고 어떤 식재료로 말씀을 준비하느냐가 중요한 사람이라. 아내와 뚱해 있으면 일이 손에 안 잡힌다.
내가 어떤 우울감에 시달리면 말씀의 유속이 느려 나 역시 딴청을 부린다. 이와 같은 고백을 하였고 기도와 도움을 부탁하였다. 우리는 서로 하나님 나라에 가는 그 날까지 함께 나아가는 동역자들이다. 고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더는 유대인도 헬라인도 아닌 그리스도인들로, 복음 앞에 드러나는 우리의 결점은 숨길 게 아니라 서로의 자랑이 될 수 있다.
아이는 어느 큰 교회 청년부에 다녔었는데, 거의 한 달이 넘도록 아이가 가지 않았는데도 아무도 모른다고 하는 말에 가슴이 아팠다. 물론 아이의 그런 사정을 정식으로 알리기보다는 눈치껏 이상하다고 여겼을 테니. 녀석은 웃으며 말했지만 슬픔이 느껴졌다. 그런 점에서 다시 오늘의 이런 우리의 연약함이 감사하였다. 곧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시 103:4-5).”
다 저녁에 누가 그 아이 일로 내게 고맙다는 문자를 하였다. 갑자기? 그럴 거 없다. 늘 내가 더 고맙다. 그리 답하고 들어 넘겼다. 내가 받을 인사가 아니라, 우리는 다만 주 앞에 엎드릴 따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순수하니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18:30).” 그러니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냐(31).” 공연히 내게 고마워할 거 없다. 오히려 나에게는 저 아이로 인해 “내 걸음을 넓게 하셨고 나를 실족하지 않게 하셨나이다(36).”
나는 대놓고 그 아이가 있는 앞에서 그리 고백하였다. 너로 인해 내 걸음을 넓히신다. 우린 다만 엎드린다. 엎드려 주께 고하며 대신 용서를 빌기도, 새 힘을 구하기도 한다. “그 두 사람이 엎드리니라(민 16:45).” 그리고 고백 고백하는 것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 18:1).” 이에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