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전봉석 2019. 3. 31. 06:49

 

 

 

나귀가 나를 보고 이같이 세 번을 돌이켜 내 앞에서 피하였느니라 나귀가 만일 돌이켜 나를 피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벌써 너를 죽이고 나귀는 살렸으리라

민수기 22:33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시편 24:1

 

 

나는 개체로서의 이면서 무수한 로 구성된 나다. 오늘 말씀을 읽다가 한 민족이 애굽에서 나왔다는 데서 머물다 크게 얻는 바가 있다. 곧 우리는 개개의 이지만 우리 안에 한 민족을 이루는 무수한 로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즉 내 안에는 내 아버지가 있고 아버지의 아버지가 있고 그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도 있다. 내 어머니가 있고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도 있다.

 

결코 오늘의 나는 독자적인 가 아니다. 한 민족을 이루고 있다. 거기에는 허다한 잡족도 있다. 섞여들어 온 무리도 있다.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11:4).” 본래의 나는 그 근원을 보면 하나님이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된 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2:7).”

 

그런 본연의 는 하나님과 친밀하였다. 하나님이 에게서 지어내신 여자, 로서도 독립적인 존재였고 관계였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2:18).” 저 둘은 부끄러울 게 없고 숨길 게 없는, 자유하였던 처음이자 마지막 인류였다.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3:1).”

 

그리하여 오늘에 이른 는 그 속에 한 민족을 이룰 허다한 로 뒤섞여 살고 있는 것이다. 왜 문득 이 문구에서 마음이 멈추었는가했더니 어제 딸애와 그 결혼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다 나왔던 내용 때문이다. 서로 좋을 땐 그 표면적인 나만 보인다. 그 내면에는 무수히 많은 가 있다는 것을 소홀히 하는 것이다. 저의 우유부단함을 유순함으로, 회피하는 기질을 우직함으로, 숨기고 있는 마음을 신중함으로 이해하고 좋아하고 있었다. 이를 어찌 말로 다 설명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와 같은 표본이 우리 개개의 . 모든 개체적인 나, (소설가 최인훈의 표현으로 하면) ‘계통발생적인 나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즉 본래의 나는 없고 무수한 들로 이루어진 한 민족을 이루는 나로 존재하는 것이다. 무심코 짓는 표정이나 말투나 손짓 하나까지도 실은 어디서 누구에게 보았던, ‘닮게 된 무엇이 몸에 밴 것이다. 하물며 생각하는 것이나 그 생각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요소들도 본연의 나인지 누가 말했던, 어디서 들었던, ‘또 다른 나의 것인지 우리는 구분하기 어렵다.

 

나는 딸애와 얘기하면서 좋아한다사랑한다의 전혀 다른 점을 설명하고 싶었고, 같이 한 몸을 이뤄 가정을 이룬다는 게 얼마나 신중하고 또 두려운 일인지에 대해 알려주고 싶었다. 그럭저럭 맞추고 산다지만 성경은 본래 그렇게 설명하지 않았다. ‘는 본래의 에게서 나왔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2:21-22).”

 

다시 보면 는 흙으로 지으신 에게서 취하여 만드시고 이끌어 오신 존재다. 이와 같은 존귀한 결합이 결혼이다. 그 주체는 하나님이시고 그 객체도 하나님에 의한 것이다. 좋아한다는 것을 사랑한다는 것으로 같이 놓을 때 혼선이 생긴다. 좋아한다는 것은 싫어한다면 더는 아무 것도 아닌 게 된다. 하지만 사랑한다는 것은 더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어서 미워한다고 끝낼 수 있는 그런 게 아니다. 싫어졌다고 없던 것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닌 것이다.

 

그 단적인 예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다. 그 값은 엄청난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6).” 여기서 이처럼은 증명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8).” 단지 우리를 만드시고 좋아하신 게 아니다. 좋아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에 포함되지만 사랑하는 것은 좋아하는 것에 포함시킬 수는 없다.

 

좋아하는 것은 설득으로 가능하지만 사랑하는 것은 논증을 해야 한다. 좋아한다는 것은 설득으로도 가능한 '설득적인 감정'이고 사랑한다는 것은 이를 증명할 수 있어야 하는 '논증적인 감정'이다. 그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다. 전혀 다른 것이다. 아주 별개의 감정인 것이다. 이를 혼용하는, 한 민족을 이룬 는 한 민족을 이루고 있는 를 만난다. 동질감을 느끼고 좋아한다는 감정으로 설득당해 한 몸을 이루기도 하지만 본래의 나와 너를 마주하기까지는 무수히 많은 나와 너로 속고 속이며 살아야 한다. 그래서 여전히 어린아이로 성장하지 못한 너와 나는 유치한 것으로 다투고 감정이 상한다.

 

각자 자신인 줄 알았던 나와 너는 어디서 언제 배어든 나와 너인지 알 수 없는 너와 나로 혼란스러워하며 거짓 나와 너로 마주하기도 한다. 흉내 내고 누가 그렇다더라 하는 식의 시늉으로는 나도 너도 아닌 섞여 있는 나와 너다. 이를 말로 설명하려 들면 이처럼 점점 복잡해져서 끝도 없이 이어진다 해도 다 서술할 수 없는 너와 나다. 가 존귀한 것은 하나님과 나였던 본래의 . ‘가 소중한 건 하나님과 관계된 나로서의 . 그렇지 않을 때 우린 짐승만도 못하다.

 

잘 아는 오늘 이야기에서도 이를 보여준다. “나귀가 나를 보고 이같이 세 번을 돌이켜 내 앞에서 피하였느니라 나귀가 만일 돌이켜 나를 피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벌써 너를 죽이고 나귀는 살렸으리라(22:33).” 한낱 늙은 나귀도 보는 것을 존엄과 존귀를 운운하는 나와 너는 못 볼 때가 있다. 즉 우리가 증거하지 않으면 돌들도 외쳐 증거할 것이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19:40).”

 

이 모든 게 주의 것이다.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24:1).” 존재의 이유는 선명해진다. 결혼의 이유도 선명해진다. 단지 가 좋아서 와 하나 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이 그리 이끌어 오신, 살 중의 살이고 뼈 중의 뼈로서 본래의 너는 나다. 나는 하나님의 생령이다. 처음 사람 아담은 그리 고백하였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2:23).” 이는 감정적인 사랑 고백이 아니라 명백한 진리다.

 

그 둘이 연합하는 것이 결혼이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24).” 그러니까 한 민족을 이룬 가 아니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25).” 그 전에는 감추고 숨기고 위장하고 거짓으로 안 그런 척 하고 살았던 것들까지도 기꺼이 이제는 드러내어 이해받고 존중받는 관계다.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않는 나로서, 너로서 마주한다. 나는 아이에게 이걸 말해주고 싶었는데, 딸애는 자꾸 감정이 복받쳐 울기만 했다.

 

그래서 속상하고 화가 났던 것은 상대적으로 그 놈에 대한 거였다. 저의 무책임과 무기력함을 나는 지적하였다. 이런저런 환경이나 조건 따위의 문제가 아니다. 3년 전에 말하였던 것이나 1년 전에 말하였던 것이나 오늘에 이르러 말하고 있는 것이나 전혀 달라진 게 없다. 그럼 앞으로 1년 후나 3년 후나 30년 후도 동일하다. 내 말은 그런 걸 딸애가 해줄 그릇이 안 된다. 다시 말해 딸애의 그런 면을 그 놈이 해줄 그릇이 안 된다. 서로를 위해서도 서로가 아닌 것이다. 어제 온다는 것을 한 주 미루고 딸애와 다시 이야기했던 이유였다.

 

그리고 다음 주에 온다는 것을 한 달 뒤로 미루었다. 나는 둘이 그 한 달 동안 작정을 하고 싸우라고 했다. 그저 서로 기분 상할까봐 덮어두고 모르는 체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걸 온순하고 온화하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실제 본인들도 자신을 모른다. 서로 부딪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좋은 사이란 그런 것이다. 그저 좋으니까, 좋은 게 좋은 것으로 덮어버린다. 어쩌다 결혼은 치열한 게 되었다. 좋을 때를 지나 본질적인 것으로 싸워야 하는 것이다.

 

서로 속엣 얘길 다 까발려야 하고 그 속사정을 다 드러내야 하며, 그렇듯 박 터지게 싸웠는데도 주께서 이끄심으로그럼에도 너여야 하고 나여야 한다면, 그때는 더 이상 뭐라 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애굽을 나오는 데 있어 한 민족을 이루고 있는너와 나로서는 곤란하다. 그럼에도 그리 한 가정을 이루어야 하겠다면, 번번이 그 싸움은 연속될 것이다.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11:4).”

 

싸우기를 미룬 싸움은 더 극렬해질 것이고, 이내 광야 40년을 거치면서 다 죽어나가던가 도중에 이혼이 무슨 흉도 아니고유행처럼 그리 되는 것이다. 우린 그럴 수 없고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제는 선택에 앞서 그 선택은 하나뿐인 것이다. 다 죽고 죽일 때까지 그 긴 광야를 떠돌며 그때마다 번번이 다투고 싸우고 원망하며 지옥 같은 길을 걸어가지 않으려면! 그럼에도 끝내 고집하여 발람은 발락에게로 갔다. 우리는 고작 늙은 나귀만도 못한 위인들인 것이다.

 

딸애가 우는 모습에서 마음이 좋지 않았고, 나는 고백하기를 네가 행복하다면 유부남을 사랑한다고 해도 네 편이고 싶다고 하였다. 빤히 그럴 수 없는 것은 니까, 다른 여느 요즘 사람들, '한 민족을 이룬', '허다한 잡족의 무리'가 섞인 나와 너가 아니라, 니까, ‘여서, 이내 나는 죽어져도 너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불현듯 주님의 죽으심이 그래서 그러했던 게 아닌가! 하는 깨달음 앞에 눈물이 와락 솟구쳤다. 단지 좋았던 거라면 새로 만들어도 되고 더 나은 걸 창조해도 되셨을 것이다. 아니 그게 훨씬 더 수월하고 쉬운 일이셨을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이처럼 무서운 일이다.

 

하나님이 나귀의 입을 여셨다.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니 발람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냐(22:28).” 참 구차한 일이다.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셨다. 더 구차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죄를 담당하셨다. 모진 박해와 구질구질한 결과로 이어져 끝내 실패한 혁명가로 몽사가로 죽으셨다. 세상은 그게 끝인 줄 알았다. 하지만 성경은, 그게 시작이었다. 그것 때문에 기록되었고 그때부터 기록하셨다. 나는 마음이 어려워서 나야말로 그냥 엉엉 울어버리고 싶었다.

 

돌아와 저녁을 먹고 일찍 잠이 들었다. 유난히 피곤한 하루였다. 어찌히랴! “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내가 오기는 하였으나 무엇을 말할 능력이 있으리이까 하나님이 내 입에 주시는 말씀 그것을 말할 뿐이니이다(22:38).” 자꾸 내 얘기만 같아서 눈물이 난다. 가슴이 아파 숨을 고른다. 그런 내게 성경은 명징한 소리로 진리를 말하고 있다.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24:1).” 그러니 오늘, 이것까지도 주의 것이라!

 

우리 안에 꽉 닫친 숱한 문들을 주께서 열어주시기를. 한 민족을 이룬 어마어마한 들로부터 하나님과 연관된 만이 온전히 머리를 들게 하시기를.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7).” 그 영광과 존귀가 무언인가?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8).” 그러므로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9).”

 

'나'와 '너'를 빚으시고 창조하신,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셀라)(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