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히 믿었도다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내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 노를 돌이켜서 내 질투심으로 그들을 소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민수기 25:11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
시편 27:13
‘머물러 있더니, 음행하기 시작하니라.’ 정체된 영혼은 안이하여서 주를 멀리하게 돼 있다.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민 25:1).” 이는 마치 공식과 같다. 우리 영혼이 긴장을 늦추지 않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환과 어려움을 두신다. 깨어 기도할 수 있는 길이다. 하나님은 질투의 하나님이시다.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출 34:14).” 이를 대신하여 오늘 말씀은 우리의 역할을 주목하게 하신다.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내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 노를 돌이켜서 내 질투심으로 그들을 소멸하지 않게 하였도다(민 25:11).” 말씀 앞에 앉으면 발가벗겨지는 기분이다.
우환은 좋지 않은 일로 걱정이나 근심하는 것이고, 어려움이란 까다롭고 힘들어서 힘에 부치는 일이다. 역설적이게도 이는 살아서 산 자의 땅에서 맞이할 수 있는 산 자들의 몫이다. 죽어지면 더는 우환도 어려움도 없다. 우리는 사는 동안 이를 없이 해달라고 기도하는데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서 사는 동안 이를 통해 주를 더욱 바랄 수 있게 하신다. 그럴 때면 나의 기도는 헐겁고 엉성할 따름이다.
모처럼 단단히 준비하고 낚시를 갔다. 밤낚시까지 바라고 멀리 생각하였다. 머리가 아프고 어깨가 아프고 불안이 엄습했다. 차를 돌려 가까운 저수지로 갔고 차 안에 앉아 찬바람이 훑고 지나는 낚시터를 바라봤다. 전날에 같이 울며 기도하였던 것으로 마음은 그리 크게 요동치지 않았다. 다만 딸애의 마음을 주께서 위로하시고 붙드시기를. 늘 나의 기도는 엉성하여서 송구할 따름이다.
멀리 갈 생각만으로 똥이 마려웠다. 아니지, 이런저런 우환과 어려움으로 나는 배가 아팠다. 먹고 싸는 일은 죽는 날까지 계속되는 일이다. “네 진영 밖에 변소를 마련하고 그리로 나가되 네 기구에 작은 삽을 더하여 밖에 나가서 대변을 볼 때에 그것으로 땅을 팔 것이요 몸을 돌려 그 배설물을 덮을지니(신 23:12-13).” 저들은 유목민으로 살았던 터라 똥을 가두어 거름으로 쓸 수 없었다.
땅에서 사는 것을 사람이 먹고 똥을 싸고 이를 땅으로 돌려보내 땅에서 사는 것들이 도로 먹는다. 보통 하루 200-300그램의 똥을 싸고 1.2-1.5리터의 오줌을 싼다. 먹는 일만큼이나 싸는 일은 엄청난 것이어서 군집생활을 하는 저들로서도 똥을 처리하는 일이 보통 일이 아니었을 것 같다. 저들이 건너가는 광야 40년의 길에는 똥이 마르고 날려서 모래와 같이 사방으로 흩어졌을 것이다.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구원하시고 적군을 네게 넘기시려고 네 진영 중에 행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진영을 거룩히 하라 그리하면 네게서 불결한 것을 보시지 않으므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리라(14).” 똥은 불결함을 상징하지만 우리 몸엔 항상 일정량의 똥이 차 있다. 지금은 모두 숨겨 정결하게 처리한다고 하지만 어렸을 땐 늘 마을에서 똥냄새가 진동을 했다. 모든 자연계의 것들 가운데 사람의 똥이 가장 구리고 독하였다.
정약용의 어느 책에 보면 변방에서 적군을 막는 무기로 똥포를 사용했다는 기록을 읽은 적이 있다. 대나무에 담아 이를 밀어내어 적의 얼굴에 뿌리는 것이다. 피를 뿌리며 전장을 달리는 병사는 그려져도 똥물을 뒤집어쓰고 전장을 달리는 병사는 왠지, 사기가 떨어질 것 같다. 똥독이 또한 보통이 아니라 그것으로 감염되어 죽을 수도 있는 노릇이다. 내 유년의 기억으로 양계양돈을 하던 마을에 살았을 때를 떠올리면 저만치 마을이 보이기 전부터 구린내가 진동을 하였다.
더 어릴 적엔 화장실이 없는 옥상가옥에 살았는데 얼기설기 방을 꾸리고 살 수 있었지만 똥간을 옥상에 들이는 건 무리였다. 아래층 예배당에서 잠을 잤던 기억도 있는데 늘 우리 가족은 똥이 문제였다. 먹으면 싸야 해서, 같은 건물 뒤쪽으로 주인집에 달린 변소를 써야 하는데 저들이 고약했던지 늘 문이 잠겨 있었던 것 같다. 형제들은 급하면 냅다 뛰어서 4, 500미터 떨어진 길가 쪽 초등학교로 달려가곤 하였으나 나에게는 난감한 일이라. 어느 날 부친은 커다란 대야를 가져다 똥통을 만들어주었다.
내남없이 급한 대로 사용하다보니 달에 한 번은 몰래 똥통을 지어다 길 건너 나대지에 버리고는 하였다. 배변의 문제는 프로이트의 표현대로면 어린아이가 제 것을 주는 최초의 선물의 의미다. 그를 지지 받으면 아이는 정서적으로 안정을 취한다. 나도 두 애를 키우면서 아이의 똥 색깔로 건강을 가늠하고 묽기고 된 정도에 따라 먹일 것을 선택하였으며 냄새로 아이의 장 상태를 짐작하였었다. 속에서 덜 삭은 똥은 묽고 지리고 코를 찌른다. 똥의 공격성은 먹고 소화하는 육신의 상태를 내포한다.
어딜 가려고 하면, 누굴 만나면, 어떤 긴장된 상태에 놓이면 나는 어김없이 똥이 마렵다. 내가 기억과 상관없이 나의 유년기의 배변의 문제는 세상이 보여준 지지와 환대의 정도를 가늠하게 한다. 기껏 똥이 마려운 것 같아서 괴로워하다가도 긴장이 풀리고 내가 아는 범위 내에 들어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 속이 편해진다. 오늘 말씀에서 나는 엉뚱하게도 똥을 연상하며 살아서 산 것들의 흔적에 대해 묵상한다.
어쩌다 나는 똥의 통제를 받는 셈이 되었으니 버거워도 다행이란 생각을 종종 한다. 아니면 어제도 좀 더 멀리 갔을까? 아랑곳하지 않고 나만 위하였을까? 머물러 정체된 똥은 몸을 병들게 한다. 영혼은 언제든 주를 배반하고 음행할 수 있다. 우리로 주의 질투로 살게 하시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내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 노를 돌이켜서 내 질투심으로 그들을 소멸하지 않게 하였도다(민 25:11).”
그것으로 주 앞에 간절할 수 있다면, 똥이 마려울 땐 신분도 학식도 저의 지위도 무색할 따름이어서 땅은 누구의 똥이든 상관하지 않고 받아들여 분해하고 분산하여 자연으로 돌려보낸다. 마음이 어수선하지만, 그래서 속이 안 좋고 장운동이 느려져서 하루 종일 두통이 찌를 듯이 이어졌다. 저녁께 아들 녀석이 전화를 하며 괜찮으냐고 물었을 때 울컥하였던 것은 그저 갱년기여서 그러했겠나? 똥은 싸지르는 것이고 자식은 받아내는 일인 것이다.
일련의 상황을 들려주고 아들에게도 당부하였다. 그저 좋아서 내가 좋은 짝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먼저 헤아려 조심해야 할 것이다. 아빠도 반대하는 결혼을 하지 않았느냐 물었을 때 나는 차마 그래서 내가 돌아와야 했던 먼 길에 대하여는 말해주지 않았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의 그릇된 판단과 어그러진 선택도 선으로 일구어 놓으신다. 저들의 광야 40년이 본래 하나님이 의도하신 고약한 진로가 아니었다. 뜬금없이 나는 종일 저 많은 인종의 군집생활과 그때마다 쏟아져 나왔을 똥의 양을 생각하고 암담하였다.
하나님은 우리로 그와 같이 불결한 것을 멀리하게 하신다. 고로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시 27:13).” 우리는 이제 자기가 싼 똥도 볼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어릴 땐 참 자주 똥을 밟았었다. 누가 싼 것인지 밟고 나면 욕지기가 나오고 투덜거리며 땅바닥에 쓱쓱 문지르는 동안 우리 마음은 정화가 일어나는 게 아니었을까? 누군 욕도 안 하고 늘 선한 말만 한다고 하면 나는 그래서 속으로 웃는다. 똥도 안 싸고 먹기만 한다는 소리로 들려서 말이다.
우리가 선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게 하신다. ‘진영 밖으로 나가 똥을 싸고 그것을 흙으로 덮으라.’ 하심은 욕을 안 하고 똥을 안 쌀 수는 없듯이 우리 안의 악하고 추함까지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일이 중하였다. 나는 물끄러미 바람이 차가운 저수지를 바라보며 생각하였다. 한겨울 방한복을 입고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사람들의 몸짓을 보다 엄두가나지 않아 돌아왔다.
우리의 헛되고 보잘것없음으로도 주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려고,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0-11).” 다급하게 찾아 든 화장실에서 참았던 똥을 한 무더기 싸지르며 시원해하는 그와 같은 감사가 아닐까? 사는 데 늘 다급하고 초조한 인생이라, 나의 기도는 헐거워서 그저 다 아뢰지도 못하지만.
그래서 더욱 다른 이름은 없다는 데 안도한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그러므로 내가 이제 주께 바라는 한 가지,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시 27:4).” 늘 속이 부글부글 끓고 우환과 어려움으로 쩔쩔매기 일쑤지만.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13).” 곧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14).” 나의 오랜 기다림이 주의 성전에 머물며 내 평생에 그 집에서 사는 것.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