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일도 하지 말 것이니라
일곱째 날에는 성회로 모일 것이요 아무 일도 하지 말 것이니라
민수기 28:25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시편 30:4-5
성경은 사실을 사실로 서술할 뿐 윤색하지 않는다. 아브라함도 야곱도 다윗도 바울도, 모든 인물은 저마다 흠과 티를 고스란히 사실로 기록하여 그 불완전성을 온전히 사실로 드러낸다. 꾸미지 않았고 더하지 않았고 감추지 않음으로 무엇을 의도적으로 첨삭하지 않았다. 성경의 저자들은 글쓰기의 정직성 앞에 까발려지듯 자신들의 허물과 죄악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다만 ‘이 복음은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가만히 곱씹고 앉아 있으면 내 안에서 되는 일이라도 나는 서술할 길이 없다. 나의 언어는 초라하고 옹색할 따름이다.
하루 전에 설교원고를 작성하였더니 금요일 하루가 한갓졌다. 점심을 먹으며 전날에 친구들을 만난 딸애에 대해 궁금해 하였고, 나의 안달은 몸을 자꾸 아프게 하였다. 오후에 아이에게 보낼 편지를 썼다. 여러 번 지우고 지우다 골자만 남았다. 이를 여기에 옮겨다 놓는 것은 굳이 부칠 게 못 된다는 생각에서다. 혼잣말처럼 나에게 들려주는 말이 되어버려서이다. 나는 종종 나의 글쓰기가 헛되다. 글을 쓰는 나와 글을 읽은 나 사이의 간극은 까마득하여 몇 겁의 시간이 흐른다 해도 마주 닿을 수 없을 것 같다.
“지금 사태를 생각해라. 생각하기 위해 **와 연락하지마라. 연락하며 연민하면 생각할 수 없고, 생각할 수 없는 사태는 해결할 수 없다. 이는 서로를 위한 결단이다. 서러워마라. 서러움은 연민이고 연민은 사랑을 호도한다.
우리의 생각하기는 하나님 앞에 내어놓는 것이고, 생각함으로 기도 되고 기도 됨으로 주의 은총을 바란다. 기도는 하는 것이 아니고 되는 것이며, 되는 기도는 나의 연민을 멈추고 주의 사랑에 맡기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는 사랑보다 냉혹하다. 결코 들어주지 않는 기도가 더 많은 이유다. 허나 더 나은 결과로 응답하시는 게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래서 문제는 푸는 게 아니라 두는 데 가깝고 두는 데 따른 지난한 기다림으로 우린 기도 된다.
더는 안 되겠다 싶어 내린 결정이니 생각 없이 허투루 연민하지 말고 연민하지 않음으로 서로에게 연연하지 않을 수 있다. 네게 맞는 짝이 있을 것이다. **는 아니다. 더 너를 강하게 붙들고 오직 사역에만 전념할 수 있게 할 수 있는 사모가 필요하다. 이는 **에게도 같다. ** 또한 그 성향이 물러서 붙들고 이끌어 줄 짝이 필요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는 아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아니니 연민함으로 서로 사랑을 호도하지마라.
다만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어 기도로 서로 후원하고 응원하는 사이로 남길 바란다. 내 할 말은 많으나 말은 늘 부질없어서, 생각해라. 서러워하지마라. 신세한탄도 말아라. 그건 안 믿는 자들의 얕은 자기연민이다. 위로가 될 수 없다. 어디서든 주의 쓰심에 합당하길 기도한다.”
이를 보내지 않았고 아내에게 보여주고 그쳤다. 딸애와 이야기를 하다보면 어찌나 철이 없고 사리분별이 없었는지, 혀를 내차다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의 괴팍함과 완고함과 윽박지르고 자기 말만 많은 사람으로 인해 아이는 그저 도망치듯 결혼을 수단으로 생각하였던가보다. 늘 도사리는 나에 대한 자괴감은 똬리를 틀고 목을 조여드는 것 같았다. 더는 입을 다무는 게 나을 것 같다.
오늘 말씀은 간략하여 서늘하다. “일곱째 날에는 성회로 모일 것이요 아무 일도 하지 말 것이니라(민 28:25).” 더는 미뤄 덧붙일 말이 없는 대목이다. 구구한 변명과 설명을 모두 생략한 글이다. 이를 위로 하듯 시편의 말씀을 되뇐다.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 30:4-5).”
종종 나는 길을 지나다 길을 구르는 돌을 본다. 한동안 횡단보도 앞에 아이 머리통만한 돌이 하나 있었다. 누가 버렸는지 어느 날 불쑥 땅에서 나온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한참 바라보다 가져갈까 하여 들었는데 꼼짝도 하지 않아 무색하였다. 신호를 기다리며 나는 몇 번씩 돌을 봤다. 오랜 시간을 두고 구구한 역사를 목격하였을 그 표면은 차고 무표정하였다. 어쩌면 야곱이 돌베개를 하고 잤던 그 돌일까?
나의 상상은 너무 까마득하여 아찔하였다. 다만 돌의 침묵은 무거웠고 완고할 따름이다. 며칠 뒤 누가 옮겨놓은 것인지 초등학교 담벼락 쪽으로 굴려져 있었다. 어쩌면 무수한 표정을 감추고 있어 무표정일 것 같은 돌의 표면을 바라보고 있으면 저가 살아온 세월이 너무 아득하여 무서웠다. 돌은 생명이 없지만 생명에 대한 정의는 우리 이해의 정도여서 혹시 아는가? 돌이 나 대신 말하여 증거 할 것이다.
어쩌면 우리 안에 응어리진 마음을 그래서 돌덩이 같다고 하는 게 아닐까? 나는 아이의 싸늘하고 원망 섞인 표정이 가슴 아팠다. 최소한 아빠처럼 윽박지르지는 않아! 하고 서러움을 와락 토해내고 울던, 딸아이 앞에서 나는 돌이 얹힌 듯 더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래서 좋다면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사람이다. 말도 안 되는 위인인데 이만큼들 잘 자라주고 감사하다 여겼는데, 아이의 가슴에 무표정한 돌덩이가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하는 가늠쇠 역할을 하고 있던 것이니, 아이의 눈물이 벼락처럼 나를 때렸다.
도망치듯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가 누웠다. 나는 나로 사는 게 너무 고단하다. 이 아침 말씀 앞에 앉았는데 자꾸 마음은 허방다리라. ‘아무 일도 하지 말 것이니라.’ 하는 말씀이 위로인지 경고인지 나는 그 표정을 읽을 수 없어 난감하였다. 내 안에 돌덩이가 아이 가슴에도 있었던 것이어서, 톡 쏘듯 말해버린 딸애의 원망스러움이 큰 돌을 하나 더 얹은 것 같았다. 숨을 쉴 수 없다. 아무 일도 하지 말 것이니라. 나는 말씀을 노려보듯 여러 번 되뇌다 서럽다. 나야말로 자기연민 덩어리가 아니던가!
그럼에도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말씀 뒤에 숨는다. 그러니 아무 일도 하지 마라. 오늘 말씀은 거두절미하고 그리 들린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시 30:2-3).” 마땅히 죽어 마땅한 나의 행실과 성품을 두고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나를 무덤으로 내려가지 않게 하신 주의 은혜밖에는 달리, 나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 내게 바울 사도는 사실을 사실로만 기술하였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주가 나를 스올에서 건지셨고 무덤으로 내려가는 것을 끌어올리셨다. 나는 이미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 새삼 내가 꾸미고 있던 표정을 들킨 기분이었다. 나는 돌의 무표정이 무섭다.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시 30:4).” 오늘 말씀은 그 돌을 굴려버릴 지렛대 같다.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5).” 나로 하여금 주의 긍휼하심 앞에 엎드리도록.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6).” 그런데 “여호와여 주의 은혜로 나를 산 같이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7).”
“여호와여 들으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를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이는 잠잠하지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8-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