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너희는 어린 아이들을 위하여 성읍을 건축하고 양을 위하여 우리를 지으라 그리하고 너희의 입이 말한 대로 행하라
민수기 32:24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시편 34:18
그러그러해서 ‘그럴 수 있다’는 우리의 이해가 득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럴 수 있어도 그래도 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되는 게 아닌데 그럴 수 있다는 데서 위로를 바라면 벗어날 수 없고, 벗어나지 못한 자기 위로는 어쨌든 고착되어 어느새 그래도 되는 것처럼 여겨지고 그리 살고 있다. 그럴 수 있는 게 그래도 되는 게 된 것이다. 가령 무단횡단, 그럴 수 있지만 그래도 되는 것은 아니다. 아이의 도벽, 그럴 수 있지만 그래도 되는 것은 아니다.
시기하고 질투하고 남을 원망하고 자신을 내버려두어 방치하는 모든 일, 그럴 수 있지만 그래도 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되는 것이 아니라면 그럴 수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해서는 안 된다. 나는 아이엄마와 톡을 하면서 내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이를 사랑하고 위하는 마음이야 모든 것으로 그럴 수 있지만 그래도 되는 것은 아닌, 허다한 허용이 아이를 어그러지게 하고 스스로를 함정에 빠뜨리고 있었다. 아이 일이 아닌 아이엄마의 일에 관심을 두길 바랐다. 자신과 하나님과의 일이다.
사는 게 뭐 있나요? 하는 질문에 믿는 사람은 뭐 있지요! 하고 단호하게 말한 것도 그래서이다. 뭐 없는 생을 뭐 하러 그처럼 사는가. 나는 성경공부를 제안하였고, 아이에게 온통 집중하고 있는 관심을 자신의 영혼으로 돌리기를 바랐다.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불똥은 엉뚱하게도 아이에게 튀었다. 집착은 애착으로 연민은 사랑으로 둔갑하여 우리를 조종하려 들었다. 톡으로 대화하는 일은 고단하였다.
사는 거 뭐 있나요! 성도로 살면 뭐 있다. 뭐 있어야지!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시 34:9).” 오늘 말씀은 이를 엄히 구분하고 계신다. 성도인지 일반인인지 스스로 분간도 못하고 사니까, 누가 무슨 설교를 하면 삐끗하여, 그럼 내가 믿는다고 하지만 구원 받지 못한 것일 수도 있네? 하는 따위의 질문이나 던지는 것이다. 시간을 좀 주세요. 저이의 말에 나는 기꺼이. 얼마든지. 벌써 아이가 오고 일 년이 다 되어 갔다. 아이 일은 아이엄마의 꼬인 상태서부터 풀려야 한다. 특히 하나님과 뒤틀린 문제를 사는 데 놓고 풀 수는 없다.
나는 시간의 손길을 믿는다. 얼마든지. 앞으로 일 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면 것도 괜찮다. 그러는 동안 시간의 손길은 섬세하게 저의 영혼을 다루며 주를 바로 알게 하실 것이다. 생성과 소멸과 흥망과 성쇠가 시간 안에 있다. 있음과 없음이, 됨과 되어짐이 같은 시간 안에서 배합된다. 시간을 더 주세요. 와서 성경공부를 할지, 대화를 하며 자신을 풀어놓을지, 그냥 이대로 살지. 나는 미래의 시간을 예측할 수 없으나 보이지 않는 시간의 손길을 경외한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111:10).” 성도의 남다름이다. 자신이 성도인지 아닌지, 구원을 받았는지 받지 못했는지, 선택받은 자인지 선택받지 못한 자인지, 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이는 모두 은혜라. 주의 선물이다. 내가 관여하여 가지거나 버리거나 할 수 없다. 우리의 훌륭한 지각은 말씀을 붙드는 일이다.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영원이라는 시간의 단위를 나는 가늠할 수 없다. 하루가 첫 날 같을지 천 날이 하루 같을지, 그 흐름을 추측할 수 없음으로 나는 예단하지 않는다. 실은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니다. 다만 영원의 시간 범위는 이 땅의 시간 범위와 달라서 끝이 없다는 것을 끝이 있는 시간 속에서는 분간이 어렵다. 오후께 친구와 모처럼 통화를 하면서 저의 고통이 언제쯤 되어야 자신에게 남은 시간을 두고 두려워할 줄 알까? 잠시 궁금해 하였다. 날마다 진통제로 버티며 고착된 저의 고통은 그냥 그럴 수 있는 게 되었다.
성도는 그 속에 확신을 두신 사람들이다.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눅 21:15).” 누구도 변박할 수 없는 구변은 그럴 수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고 그래도 되고 안 되고의 문제도 아니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는 그게 문제가 아니다. 그 문제에서 하나님과 나의 관계만이 오롯이 두드러질 뿐이다. 이에 집중한다. 자식 일로 하나님을, 자신의 병약함으로 하나님을, 자꾸 꼬이고 어려운 환경에서 하나님을, 지긋지긋하게 사는 일에서 하나님을.
저녁에 아내는 아는 분께 무말랭이를 주문하였다. 무말랭이와 오이지는 같은 맥락에서 자신을 말려 쪼그라지고 우그러지며 그 안에 맛을 간직한다. 아내는 첫애를 가졌을 때 그렇게 오이지만 먹었다. 오이지는 소금과 물만 있으면 된다. 이 간단한 맛은 그렇다고 아무나 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아내는 몇 번을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하였다. 물러지거나 맛이 너무 써서 오이지 본래의 특성을 죽여 버무려서 먹었다. 무말랭이는 질기다. 양념에 버무려져 그 맛은 천차만별이다.
나는 오이지 묻힘이나 무말랭이를 좋아한다. 씹으면 한 여름 뙤약볕의 맛이 난다. 자신을 말리고 비틀려 요리가 된 후에 더 강해진다. 오이지는 소금물 안에서 마르고 무말랭이는 볕 좋은 양지바른 곳에서 마른다. 나는 자주 먹는 일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한다. 우리가 곧이곧대로 먹을 것 앞에서 감사 기도를 하는 까닭은 저 모든 식물을 우리 식탁에까지 올 수 있게 하신, 시간의 손길 앞에 표하는 경외심 때문이다. 시간이 더해져 토마토가 익었고 양배추가 달다. 김장김치가 삭았고 멸치볶음이 서로 엉겨 맛을 더한다.
시간을 좀 주세요, 하는 아이엄마에게 나는, 얼마든지요. 하고 말하고 다음 말은 생략했다. 그러는 동안 그 시간의 손길은 때로 잔인하고 냉혹하여 묵혀지고 다져지고 말라비틀어져야 하는 일일진대. 그럴 수 있지만 그러지 않아도 되는 일에 대하여 나는 입을 다물었다. 뭐라 한들. 어쩌면 저의 완곡어법은 완고한 거절의 의미일 수도 있었다. 내가 더는 어쩔 수 없는, 시간 너머의 시간에 대하여는 내가 감당이 안 된다. 서로의 경험되지 않은 시간을 예측할 수는 없다.
다만 믿음으로 시간을 초월하며 살 수 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그럼에도 자신이 짊어지고 가겠다는 저 고집은 단순히 자기만의 시간이 아니어서, 그러는 동안 아이는 여전히 엉거주춤하고 자신들의 기도는 한정되어 하나님과 상관없이 하나님께 아뢰고 구할 따름이다. <천로역정>에서 기독도의 무거운 짐이 저를 기독도가 아닌 것으로 규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러는 동안 저의 고역은 오롯이 저의 몫이다.
연신 일이 터진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이 일 저 일에 시달린다. 돌아서니 시어머니가 아프고 앞에서는 친정부모가 날마다 사건이라. 제 자식 문제로 한 다리 건너 아이 일에 신경 쓸 겨를조차 없다. 뜬금없는 질문, 내가 믿는다고 하지만 나는 택함 받지 못한 백성은 아닐까? 나는 저의 어처구니없는 질문에, 그럴 수도! 그리 여겨지면 그리 여기면서 더 시간을 보내야겠지. 나의 대답은 단호하였고 번번이 어떤 문제를 들고 새벽예배를 가고 무슨 기도원을 찾고 어디 소모임에 참석하고 성경 통독을 벌써 올 들어 몇 번째 하고. 이어지는 지청구에 혀를 내둘렀다. 스스로 구원하기가 지겨울 따름이다. 왜 그러고 사니.
도대체 우린 무슨 수로 은혜를 갚을 생각일까? 혹시 그 값을 물려고 저리 열심인 것일까? 거저 주셨다는데 값을 물어야 할 거 같은, 오만과 아집을 어쩌겠나. 것도 시간이 필요한 일이어서 모든 맛은 익혀지고 삭혀지는 시간의 손길이 필요한 것이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엡 5:8-9).” 착하게 살아서 착한 게 아니고, 의롭게 살아서 의로운 게 아니며, 진실하려 해서 진실할 수 없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주 앞에 통회하는 수밖에.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34:8).” 오늘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는 요단을 건너지 않기로 했다. “우리가 이 곳에 우리 가축을 위하여 우리를 짓고 우리 어린 아이들을 위하여 성읍을 건축하고, 이 땅의 원주민이 있으므로 우리 어린 아이들을 그 견고한 성읍에 거주하게 한 후에 우리는 무장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그 곳으로 인도하기까지” 여기 살겠다고 하였다(민 32:17-18).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기업을 받기까지 우리 집으로 돌아오지 아니하겠사오며 우리는 요단 이쪽 곧 동쪽에서 기업을 받았사오니 그들과 함께 요단 저쪽에서는 기업을 받지 아니하겠나이다(18-19).” 어쩌겠나. “너희는 어린 아이들을 위하여 성읍을 건축하고 양을 위하여 우리를 지으라 그리하고 너희의 입이 말한 대로 행하라(24).” 다들 제 판단과 제 고집대로 사는 것이다. 누구도 오이지나 무말랭이만도 못하다. 시간의 손길에게 자신을 맡겨두지 않는다.
그럴 수 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 34:18).” 주님은 그런 자의 마음까지도 가까이 하신다. 우리가 충심으로 통회하기까지 기다리신다. 결국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19).” 나는 누구와 통화하고 무슨 일로 아이엄마와 톡을 하고, 저들의 구구한 사연을 듣고 뭐라 말을 해주면서. 내게 두시는 구변이란, 주를 경외하는 지혜의 근본이라.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 하는 저이를 위해 주의 이름을 불렀다. 진통제를 하루에 세 알씩 먹어가면서도 그러려니, 그럴 수 있는 일로 치부하며 버티는 친구를 위해 기도하였다. 아내는 가정예배를 드리기 전에 어디에 전화를 걸어 무말랭이를 주문하였다. 곧 더위가 닥치면 오이지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저들이 견뎌내고 지나온 시간의 시간을 생각하다 어지러웠다. 볕과 바람에 말라비틀어지고, 계란이 뜰 정도의 염도에서 쪼그라들기까지 하였을. 하물며 이와 같은 시간의 손길도 우리 입맛을 더하는데!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시 3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