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때에 그 땅은 너희의 기업이 되리니 곧 가나안 사방 지경이라
민수기 34:2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
시편 36:7
경계가 있어야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그러하다. 오늘 말씀에서 나는 이를 그리 읽는다. “서쪽 경계는 대해가 경계가 되나니 이는 너희의 서쪽 경계니라 북쪽 경계는 이러하니 대해에서부터 호르 산까지 그어라(민 34:6-7).” 내가 아무리 신세로 여기지 마시라 해도 저쪽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고, 나는 아무리 순수하게 대한다고 하여도 어떤 지지나 호응을 기대하는 것은 숨겨진 마음이다. 몰라주면 서운하고 알아주면 우쭐한다.
주여, “교만한 자의 발이 내게 이르지 못하게 하시며 악인들의 손이 나를 쫓아내지 못하게 하소서(시 36:11).” 어떤 마음인지 알 것 같아서, 이해가 되지만 또한 서운함도 감출 수 없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란 더욱이 그 경계가 모순된 것이어서 순수함이란 스스로 자리 잡을 수 없는 마음인 것 같다. 특히 나에게는 제일 어렵다. 위한다고 위하는데 거리를 두고 어떤 서운함을 표시할 때, 나는 주춤한다.
토요일에는 아이를 오지 말라고 해야겠다. 혼자 그리 생각하였다. 여느 큰 교회와 같은 혜택을 마련할 길이 없다. 그리 원하면 별 수 없는 노릇이다. 이제 다 왔다 싶으니까 이제부터 전쟁이었구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때에 그 땅은 너희의 기업이 되리니 곧 가나안 사방 지경이라(민 34:2).” 그저 믿고 신앙 안에서 안이한 삶은 없는 것이다.
일련의 사태가 수습이 되면서 나는 순간 긴장이 풀렸는가, 재채기를 해대며 콧물이 흐르고 머리가 띵하더니, 감기가 왔다. 그러니 나는 몸의 신호를 가장 신뢰한다. 마음보다 열 배는 정직하다. 아이들이 몰려오는 날이라 눕지도 못했다. 새로 한 아이가 왔는데 어수룩하다. 눈을 마주치지 않고 고개를 들지 않는다. 중2 아이들은 중간고사 기간이라 당분간 오지 않기로 했다. 나는 언제부턴가 오고 안 오고에 대해 관여하지 않는다. 중1 아이 둘이 어색하게 떨어져 앉아 말없이 글만 썼다. 끝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중2 아이 둘을 만났다. 아이들의 발랄함에 벚꽃이 휘날렸다.
하루는 가고 하루는 온다. 어제는 어떠하더니 오늘은 어떠하다. 같은 날은 하루도 없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시 36:7).” 아이엄마도 우울증이라 그러려니. 안타까움으로 이해를 모은다. 신세지기 싫어하는 마음에는 신세질 수밖에 없는 처지의 미안함이 가득한 것이다. 그러니 우리 같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로 피하’는 수밖에. 권하여도 쉬 말을 듣지 못하는 게 우울이다.
속상하고 안돼서 내가 더 이해하고 감싸주어야 하는데, 그러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하고 생각하면 서운한 것이다. 괘씸하고 고약한 마음이다. 우러나서 하는 마음이라 여겼던 게 알아주고 그만한 호응을 바랐던 것이었다. 마치 안 그럴 마음처럼 굴더니 나는 혼자 서운하였다. 오지 말라 그래야지. 가라 그래야지. 속으로 들끓는 게 마치 가나안 정복을 위한 전쟁과 전쟁 같다. 나와 나의 싸움이다. 내색할 수도 없다.
어물거리다보면 마른 흐느낌만 인다. 나는 그래서 ‘세월호’ 뉴스를 잘 보지 않는다. 흐느껴 한참을 어깨까지 들썩거리는데 눈물은 그 뒤에 고인다. 가슴이 아프다는 게 어떤 것인지, 이 나이가 되어서야 조금 알겠다. 그래도 저희 입장에서는 신세지는 일이지요! 아이엄마의 말이 내내 가슴에 남은 것도 그 때문일까? 이제는 어떤 말이나 장면이 잘 잊히지가 않는다. 계속 여운이 남아 잔상으로도 나는 슬프다. 내 어머니가 그러했을까? 나에게는 중첩되는 마음이 있어 더 그러하였다.
장애가 있어 장애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아들이 장애가 있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어미의 마음을 나는 헤아릴 길이 없어 아득하다. 압니다. 이해합니다. 하는 말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은 내 어머니의 서러움이 느껴져서일까? 나의 헤아림이란 얼마나 얄팍하고 앙상한가. 그러면서 이는 불편한 마음이라니! 싫으면 관둬! 하는 마음을 숨기고 있었으니, 나는 참 내가 싫다.
하긴 죄책감과 수치심의 차이가 그렇다고 읽었다. ‘내가 잘못했어.’ 하는 게 죄책감이면 ‘내 잘못이야.’ 하는 게 수치심이다. ‘내 탓이야.’ 하는 게 죄책감이라면 ‘내가 그렇지 뭐.’ 하는 게 수치심이다. 내재된 수치심이란 어떤 문제를 문제로 놓고 보지 못하고 자신을 투영해서 그 자체로 자신을 불쾌해 하는 것이다. 너무 내 얘기 같아서 그 책 읽기를 멈추었다. 마주 읽기 불편하였다. 그러다 ‘세월호’ 관련 기사나 뉴스를 보면 감정이 이입되어 목울대가 울렁거린다.
사람이 살고 죽는 일. 그 경계가 뚜렷하지 못할 때 모호한 지경으로 감정이 앞서 흐른다. 아이들이 돌아가고 나는 빈 공간에 남아 우울하였다. 나를 주체할 수 없는 나는 언제나 어렵다. 지나간 시간의 힘으로 닥쳐올 시간을 이고 질 자신이 없다. 감당할 수 없는 마음으로, 말씀을 사모한다. 의지할 데가 나에게는 없다. 은혜가 아니면 하나도 이를 수 없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만일 내 힘으로 어찌 지탱해야 하는 구역이라면, ‘신세만 지는 것 같아서’ 이는 회피다. 다른 길을 모색하려는 불순종이다. 순수한 마음이란 없다. 그 안에 내포된 경계 없는 무덤이 열린 채 수두룩하다. 우린 얼마나 가증스러운지. 그럼에도 돌보고 또 돌보아 보호하고 양육해야 하는 일이었으니,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5:29).”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30).” 말씀 앞에서 울컥, 한다. 나 같은, 이 보잘것없는 육체마저도 그의 몸의 지체로 여겨주시니.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진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심판은 큰 바다와 같으니이다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구하여 주시나이다(시 36:5-6).” 주의 은혜가 아니면 살 길이 없다. 내가 아이엄마를 두고 생각하던 마음이 내 어머니의 그것과 맞닿아 속상하였던 것도 우리의 어쩔 수 없음 때문이지 않았을까?
서로가 어쩔 수 없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7).” 다만 주의 인자하심에 숨을 뿐이다.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우리는 우리 자식들 일로 우리에게 맡기신 아이들을 소홀히 여기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저들은 상한 심령이라. 안 믿는 가정에서의 안 믿는 영혼으로 살아가는 그 퍽퍽한 현실을 안타까워 할 따름이다.
중2 아이가 나를 불러 세워, 그 와중에 엄마랑 싸웠는데 어찌 화해해야 하는지 물었다. 무슨 일로 어쩌다 싸웠는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주절주절 아이가 빠르게 말하는 것을 나는 자전거 위에서 들었다. 자전거는 균형을 잡기 위해 아이를 뱅뱅 돌았다. 재잘거리듯 둘이 깔깔대며 묻는 말에 나는 너무 어처구니없었던가? ‘그냥 잘못했다고 빌어!’ 말해주고 보니 그게 부모 자식이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 아니겠나싶었다. 신세 지는 것 같고, 뭐가 죄송하고, 어떻고, 다 필요 없다.
구구한 사연과 변명과 늘어지는 말들은 그게 싫은 것이니 결국은 맞서겠다는 소린데! 한 5분? 아이의 늘어지는 말과 말 사이에서 나는 자전거를 타고 뱅뱅 돌다 뱉어내듯 툭, 던진 말이었다. 그냥, 잘못했다고, 빌어! 우린 얼마나 이게 어려운가? 싫은 것이다. 그러자니 또 말이 길어진다. 할 말이 많고 사연이 길다. 결국은 화해하기 싫다는 것인가?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고후 5:18).”
내게 두시는 이런저런 일련의 사연과 사연들이 종종 주 앞에 나아가기를 미루게도 한다. 서로의 경계가 모호하여 여성의 선택권을 주장하느라 낙태가 허용되고, 자신의 정체성을 존중하느라 성이 섞이고 동성애가 허용되며, 온갖 잡신을 내세워 종교의 자유를 운운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갈 데까지 가야 하는 게 세상이다. 어쩌겠나싶다. 누구 말 할 것 없이 나야말로 경계를 바로 삼자.
“교만한 자의 발이 내게 이르지 못하게 하시며 악인들의 손이 나를 쫓아내지 못하게 하소서(시 36:11).” 곧 “주를 아는 자들에게 주의 인자하심을 계속 베푸시며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주의 공의를 베푸소서(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