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슬로브핫의 딸들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니라
민수기 36:10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시편 38:15
아이는 생각보다 밝았다. 받아들임은 그리스도인을 따라갈 사람이 없다. 자신을 웃어넘길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 심각할 거 없다. 고약하여 인상을 찌푸리고 마음은 어두워진다 해도, 아이는 일찍 와서 일기를 쓰고 쓰면서 자기 이야기에서 한 발짝 물러설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걸 같이 읽고 속엣 얘기를 나누고 성경을 보았다.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시 77:1).” 누구 기도로, 누구에게 부탁하려 드는 마음이 아니다.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그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끝났는가, 그의 약속하심도 영구히 폐하였는가, 하나님이 그가 베푸실 은혜를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가 베푸실 긍휼을 그치셨는가 하였나이다 (셀라)(7-9).”
그런 마음이 들 때가 얼마나 많은지. 이 길이 맞나? 여기서 이러고 있어봐야 무슨 소용인가? 하나님이 정말 알아주시기나 할까? 설마, 하나님도 나를 외면하시는 게 아닐까? 우리 안에 드는 의구심은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다. 아무도 모르는 마음이다. 나는 아이의 이런저런 말을 취합하며 속이 울렁거렸다. 끝나고 같이 영화를 보러 가가로 한 것도 여간 부담이 되는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우리 그리스도인의 특징 가운데 뚜렷한 것은 받아들임이다. 것이 어떠하든 것도 주의 은혜라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아이와 같이 성경을 읽고 아이가 글씨로 옮겨 적을 때 나는 가만히 쌓인 생각들을 털어냈다. 우리는 우리 문제를 웃어넘길 수 있는 사람들이다. 너무 연연해하지 않는다. 그럴 수 있는 게 주만 바람이다. 다른 데 굽실거리지 않는다. 그러려니 하고 놓아두는 것, 이는 방관이 아니라 의뢰다.
슬로브핫의 딸들은 남자 상속자들이 없어 그 기업의 상속권을 여자들이 갖게 되었다(민 27장). 이런저런 사정을 생각하면 그 속이 오죽하겠나? 그럼에도 “슬로브핫의 딸들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니라(민 36:10).” 구구한 우리의 사연이 우리를 함몰시킬 수 없다. 그래서 어떤데, 하는 사연과 사연은 우리를 침몰시키려고 덧대어져 쌓인다. 이때 아이가 읽은 말씀이라니!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시 77:1).” 오늘 말씀은 같이 읽힌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시리이다(38:15).” 그 속이 오죽할까?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픔 중에 다니나이다(6).” 말할 수 없는 중에 주께 아뢰는 일, “내 허리에 열기가 가득하고 내 살에 성한 곳이 없나이다(7).” 마음뿐 아니라 몸도 아프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라.
“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8).” 영혼의 문제까지 겹친다. 이러할 때 우리의 방어는 무엇일까?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9).” 곧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주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 힘에 부쳐 “내 심장이 뛰고 내 기력이 쇠하여 내 눈의 빛도 나를 떠났나이다(10).” 고로 “내가 사랑하는 자와 내 친구들이 내 상처를 멀리하고 내 친척들도 멀리 섰나이다(11).”
이런 게 어떤 건지, 안다. 아이는 오늘부터 예배 끝나고 오후 청년예배를 전에 다니던 교회로 다시 가기로 하였다. 우리는 또래 청년이 많지 않았고, 같이 어울려 할 수 있는 시스템이 없었다. 가봐야 아이를 반기지 않고 오히려 피하고 은근히 부담스러워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리 하는 게 낫겠다고 하였다. 아이의 외로움을 내가 짊어져줄 수는 없었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게 외로움이다. 사랑하는 자들과 친구들이 나의 상처를 멀리할 때 그 서러움이 어떤 것인지, 나는 잘 안다.
그래라, 하고 말해놓고 내 안에 이는 서러움을 나는 감추지 않았다. “나는 못 듣는 자 같이 듣지 아니하고 말 못하는 자 같이 입을 열지 아니하오니 나는 듣지 못하는 자 같아서 내 입에는 반박할 말이 없나이다(13-14).” 주께만 아뢰는 일. 고로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시리이다(15).” 사람들의 응답은 단회적이다. 일시적이고 무심결의 눈길이다. 이를 그리워할 수 있으나 의지할 것은 못 된다. 아이에게 나는 이것을 설명할 길 없어 그저 그러라고 말해주었다.
내게 두시는 저 아이의 이런저런 면이 나의 유년에 위로 받지 못하였던 어린아이였다. 말해주고 이해하고 등을 토닥여줄 때 나에게도 위로가 되었다. 기를 쓰고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고 싶었던 일. 너 가져! 하고 번번이 내 것을 내주어도 그때뿐, 돌아서기 무섭게 가버리던,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나는 저들을 원망하고 욕하면 내 존재가 그 자체로 빵, 터져버릴 것 같아서 그러지도 못했다. 두둔하고,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오히려 저들 편을 들곤 하였다.
아이는 내내 빵공장에서의 고마웠던 일만 글로 썼다. 한 번도 저들에 대해 서운함이나 원망의 소리가 없었다. 아이는 누구를 헐뜯지 않았다. 그건 아이의 심성이 착해서라기보다 저들을 욕하고 나면 자신이 너무 서러워서 견딜 수 없는, 무의식적인 방어기제였다. 나의 짧은 이해는 오롯이 내 기억을 들추어댔다. 혼자 서러워한다는 것은 역으로 누굴 욕하는 게 아니라 자기를 탓하는 것이다. 내면화된 수치심은 그 모든 책임을 자기에게 돌린다.
“여호와여 주의 노하심으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고 주의 분노하심으로 나를 징계하지 마소서(1).” 나는 오늘 말씀에서 다윗의 기도를 따라 읽다 울렁거린다. 나를 책망하지 마소서. 주 나를 멀리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내가 감당할 수 없나이다(4).” 곧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내가 우매한 까닭이로소이다(5).” 나는 말씀에 이입되어 울먹거린다. 저의 서러움이 어떤 것인지 알 것 같다.
억장이 무너지는 마음이야 그 어미만할까. 나는 나의 어머니의 모진 세월을 생각한다. 아이와의 시간이 나에게 치유의 시간이 되는 것 같았다. 들어주고 같이 놀아주는 일이 나의 어린아이에게 베푸는 아이어른의 손길이었다. 응원하고 손뼉 쳐주고, 아이의 웃음이 나에게 위로가 되어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얼토당토않은 아이의 대꾸에 한참씩 오래 웃다 슬펐다. 아이가 또 그만큼 혼자 걸어가야 하는 길을 두고 내심 안타까웠다.
그러하여 나는 아이에게 여러 번 그 말씀을 고쳐 쓰고 다시 쓰게 하였다.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77:1).” 누구에게 의지할 거 없다. 돌아보면 저들이 더 아프게 하였다. “내가 사랑하는 자와 내 친구들이 내 상처를 멀리하고 내 친척들도 멀리 섰나이다(38:11).” 사람으로 내 편은 없다. 하나님으로 인하여 저는 내 친구고 사랑하는 사람이다. 결코 자식도 부모도 위로가 될 수 없는 슬픔 저 안쪽의 슬픔에 대하여,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픔 중에 다니나이다(6).”
누군들 저마다의 숨은 슬픔이 없으려고. 그러니 무엇으로 위로를 얻고 새 힘을 얻을 것인가? 말로는 어찌 설명할 길이 없어, 나는 아이가 서둘러 전에 교회 청년 예배에 간다고 하는 것을 기꺼이 그러라고 하였다. 또한 주의 위로가 함께 하시기를. 우리의 가장 큰 특권은 주 앞에 통회할 수 있다는 것이겠다.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빌 2:15-16).”
어쩔 수 없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날에 나의 자랑은 이 걸음이 헛되지 않을 것을, 말씀으로 밝혀 얻은 생명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아이와 돌아오면서 나는 우리 앞에 길게 앞서는 그림자를 보고 걸었다. 하나님을 등지고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 생각하였다. 내가 나의 문제를 웃어넘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마주하고 걷는 길뿐이다. 그러할 때 나의 그림자는 등 뒤에 놓인다. 어떠하든 개의치 않을 수 있다. 아니면 앞서 걷는 그림자를 따라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단하였는지 일찍 누웠다가 잠들었고 일찍 일어나 말씀 앞에 앉았다. 무엇도 개의치 않고 살 수 있는 삶이 주의 날에 자랑이라. 이런저런 사연이 우리를 휘감지 못하게 하시려고!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마 10:26).” 모든 게 주 앞에 드러날 것이어서 오히려 위로가 되는 것이었으니. “내가 넘어지게 되었고 나의 근심이 항상 내 앞에 있사오니 내 죄악을 아뢰고 내 죄를 슬퍼함이니이다(시 38:17-18).”
내가 내 음성으로 주께 아뢸 수 있는 것이 특권이다.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21-2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