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너희가 이 산을 두루 다닌 지 오래니 돌이켜 북으로 나아가라
신명기 2:3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시편 40:3
4월의 바람은 차다. 물가에 앉아 바람부터 막고 낚싯대를 던졌다. 넘실대는 물결때문에 찌를 보기 어려웠다. 두루미는 조용히 저공비행을 하다 머리를 물에 처넣었다. 손바닥만 한 물고기를 긴 부리에 물고 날갯짓을 하며 지상에 착지하는 모습은 가히 일품이었다. 그 뒤로 아직 꽃망울을 여물고 있는 개나리는 수줍었다. 조선족인지 서너 명의 남자들이 저들 말을 쓰며 시끄러웠다. 나는 자주 멀리 산자락을 바라보았다.
모처럼 낚싯대를 던지고 앉았으려니까 모든 게 다 낡았다. 받침대도 허옇게 부식되었고 급기야 낚시 의자는 부서져 버리고 왔다. 얼추 20년은 족히 들고 다니던 것인데 버려짐은 가차 없다. 3.2칸 낚싯대도 그 무게가 이제 힘에 겨웠다. 2.9칸대를 쓸까하다 3.2칸대를 써서 그런가, 어깨며 등짝이며 밤새 아파서 끙끙 앓았다. 고기는 한 마리도 못 잡고 커피만 두 잔 끓여먹고 왔다.
목사님, 보건증 만들어야 한대서 일찍 퇴근했어요. 몰라요, 어디에 쓰는지는 뭐라 말해주었는데 까먹었어요. 도넛(집에 키우는 개 이름)이 자꾸 짖어요. 모르겠어요, 오늘은 나를 못 알아보나? 킥복싱은 오늘 쉬려고요. 4월이잖아요. 돌아와 아이 퇴근 시간에 맞춰 전화를 하였다가 이런저런 말로 길어졌다. 그랬구나, 그랬어? 소파에 전기를 세게 올리고 허리를 지지며 통화했다. 난 낚시 갔었어. 한 마리도 못 잡았어. 집에 오는 길에 벚꽃이 가득 폈어요. 우리의 대화는 서로 간에 두서없었다.
어떠하든 주께서 가야 할 길을 예비하시고 지도하신다. 때론 막연하여서 이 길이 맞나? 싶다가도 그리 행함으로 나아간다. “너희가 이 산을 두루 다닌 지 오래니 돌이켜 북으로 나아가라(신 2:3).” 누구를 대적하고 누구와는 싸움을 피해야 하는지, 말씀은 말씀으로 귀 기울이게 하신다. 이 땅에 사는 일은 그 자체로 모험이다. “그러나 악인은 평온함을 얻지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구쳐 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사 57:20).” 늘 ‘더러운 것을 솟구쳐 내는 요동하는 바다’ 같은 세상에서 나는 오히려 아이의 두서없는 말이 정겹다.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하고 먼 산만 바라보다 돌아오는 한나절의 여유로움을 사랑한다. 비록 몸도 기구도 쇠하여 포기하고 버려져야 할 것이 늘어간다 해도.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21).” 그렇다면 내 안에 두시는 평강으로도 나는 입증이 되는 게 있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시 40:3).” 진통제를 먹고 파스를 붙이고 끙, 하고 돌아누우며 신음하는 연약한 몸을 가지고도, ‘찬양을 내 입에 두셨으니’ 감사가 따로 없다. 시편 2편의 말씀을 오래 되새기며 묵상하였다.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1).” 요지경인 세상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반대를 위한 반대는 논리가 희박하고 자신을 위한 자기들 주장은 그 근거가 궁색한데도 ‘어찌하여, 헛된 일을 꾸미는가.’ 서로 공격하는 짓거리는 죽창만 안 들었다 뿐이지 6.25 때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다. 한데 그 지경이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2-3).” 맹렬하다.
믿는 자로 사는 게 힘들다며 한 아이는 묵상글에 토로하였다. 그리 느낀다는 게 대견하면서도 안쓰러웠다. 주일 날 말씀 붙든 것으로 살고 싶은데 하루도 지나지 않아 휘청거리는 자신을 두고 주께 의지하는 내용이었다. 걱정마라.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4).” 우리의 대적은 주가 다루신다.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그들을 놀라게 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5-6).”
주가 주의 산에 세우신 사람들이 우리다. 오늘 사는 이 땅은 저의 거룩하신 산이라. 그러므로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7).” 이는 우리를 위해 오신 그리스도 예수를 가리키지만 또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이다. ‘내 아들이라.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나는 종종 이 말씀으로 나의 연약한 육신을 한탄하지 않는다. 할 수 없고 할 줄 아는 게 없는 신세를 처량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런 나를 주가 오늘 낳으셨다.
그러니 우리가 할 것은 구하는 일이다.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8).” 저들 이방 나라를 내게 주신다는 것은 저들의 암투와 모색이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9).” 승리는 이미 주어진 것이다. 우린 이긴다. 번번이 실패와 좌절이, 두려움과 연민이 우리를 사로잡는다 해도, 우리가 깨뜨리고 부술 수 있는 대적들이다.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재판관들아 너희는 교훈을 받을지어다(10).” 그리하여 우리는 다만 말씀을 받을 뿐이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11).” 우리의 일은 단순하고 명료하였다. 잠깐, 부서진 낚시의자 때문에 마음이 서글펐다. 함께 들고 다니던 하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나에게 낚시는 도피성 같은 거였다. 도망쳐 숨을 데가 없을 때 낚싯대를 던지고 앉아 있으면 눈물도 바람에 마르고 어떤 후회와 두려움도 부질없이 여겨졌다.
자, 이제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12).” 내가 할 줄 아는 유일한 일은 주를 바람이다. 그의 아들에게 입맞춤이다. 경외의 표시다. 내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경배와 찬양이다. 하나님을 떠난 세상은 능히 안정치 못하고 요동하는 바다 같은 것이니.
곧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모든 땅을 우리에게 넘겨주심으로 아르논 골짜기 가장자리에 있는 아로엘과 골짜기 가운데에 있는 성읍으로부터 길르앗까지 우리가 모든 높은 성읍을 점령하지 못한 것이 하나도 없었으나(신 2:36).” 돌아보면 주의 긍휼하심으로 여기까지 이른 것이다. 그때마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시 40:1).”
낚시의 매력은 가만히 한 곳을 응시하는 일이다. 이는 지루한 일일 것 같으나 시간이 금세 지나간다. 모든 게 낡고 삭아서 이제 곧 다 버려져야 할 판이지만,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2).” 나는 나의 그 시간동안 주께서 어찌 끌어올리시고 건지셨는가를 안다.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시는 이의 은총을 일렁이는 너울을 보고 생각하였다.
때론 좌절하여 숨기 위해 나가곤 하였던 낚시였는데 이제는 가만히 앉아 찌를 응시하고 주를 바람으로, 아이를 생각하고, 내게 두시는 여러 겹의 일들을 생각하고, 어떤 소원을 말하고, 누구를 떠올리다 그 모든 귀결은 주의 이름이었으니.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3).” 내 입에 두신 찬송이 때론 참으로 기이할 따름이다.
곧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4).” 능히 안정치 못하고 요동하는 세상을 바라볼 게 아니다. 저들은 본래부터 그러는 것이다. 나는 다만,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가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려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5).” 내 삶에 주의 손길이 가득하여 송구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다.
곧 “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내게 들려 주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6-7).” 주가 원하심은 나로다. 나는 나로서 주 앞에 왔나이다. 주가 이루시고 이루어 가실 주의 것이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8).” 제대로 하지는 못하지만 주의 뜻을 행하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내가 많은 회중 가운데에서 의의 기쁜 소식을 전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내 입술을 닫지 아니할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9).” 나는 아이와 통화하며 이런저런 말을 듣고 호응하며 위로한다. 이는 주의 마음이다. 아내는 살기 싫어하는 중1 아이를 달래고 그 엄마를 위로하며 들었던 말을 또 듣고 또 듣는다. 주의 마음이다. 우리는 이제 누구를 대하고 위하는 마음이 주의 마음이기를 원한다. 하여 “내가 주의 공의를 내 심중에 숨기지 아니하고 주의 성실과 구원을 선포하였으며 내가 주의 인자와 진리를 많은 회중 가운데에서 감추지 아니하였나이다(10).”
각자 주어진 몫의 삶을 다하는 게 사명이라. 딸애는 이별의 슬픔을 잘 견뎌내고 있었고 아들은 대사관과의 관계직 일짜가 다가오면서 덤덤하게 다른 일을 모색하며 주의 이름을 부른다. 기도해줘, 하는 녀석의 퉁명스런 말을 나는 사랑한다. 주님의 사랑이다. 그런 말이나 태도가 귀하다. 그러므로 “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서 거두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11).” 우리가 사는 날들은 마치, “수많은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나를 덮치므로 우러러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가 낙심하였음이니이다(12).” 나를 옭아매려 기를 쓰지만, “여호와여 은총을 베푸사 나를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13).”
우리의 으뜸은 주의 도우심이다. 아무리 공격해도, “내 생명을 찾아 멸하려 하는 자는 다 수치와 낭패를 당하게 하시며 나의 해를 기뻐하는 자는 다 물러가 욕을 당하게 하소서(14).” 또한 “나를 향하여 하하 하하 하며 조소하는 자들이 자기 수치로 말미암아 놀라게 하소서(15).” 나는 비웃음을 당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주를 찾는 자는 다 주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16).” 물가에 앉아 나는 그러함으로 안도하였다.
비록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