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전봉석 2019. 4. 20. 07:19

 

 

 

우리가 그 명령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

신명기 6:25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리이다

시편 44:6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시다. 주님은 기도를 가르치실 때 의 아버지라 하지 않으시고 우리아버지라 하셨다. ‘자기와 관련 있는 여러 사람을 다 같이 가리킬 때우리라고 표현한다.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아버지이신 것은 그 아들 되시는 예수께서 우리와 친구 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셨다.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11:19).”

 

우리는 교회다. 교회를 이루는 사람들이다. 너와 나다. 나와 관계있는 모든 사람들이다. 문득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정말이지 나 역시 당황스러운 일 때문이었다. 갑자기 누가 생각이 났다. 작년에 결혼한 아이다. 잘들 사는지, 무심히 아이 이름을 찾아 버튼을 누른 것인데 아이엄마 번호였다. 한참 아이들 번호를 저장할 때 그 엄마와 집 번호를 한데 묶어두었는데 대표번호가 어쩌다 아이엄마 번호가 되어 있던 것이다. 갑작스런 통화라 대충 안부만 묻고 끊었다. 그리고 다시 생각하니 그렇게 끊을 사이는 아니어서 다시 걸었다.

 

여전히 집에만 있다고 했다. 병명은 불안장애이다. 밖으로 안 나가고 종일 그러고 있으니 그 삶이 피폐할 것은 빤한 일이라. 서로의 근황을 나누다 둘째 아이도 벌써 대학 4학년으로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다들 초딩 중딩 때 가르쳤던 경우이고, 큰애는 대학을 가서도 또 편입을 준비하며 삼수를 하는 동안에도 연관이 되어 있었다. 작년 결혼에는 토요일 정오라 나는 못 가고 아내와 딸애가 대신 좀 갔다 온 경우였다. 앞으로 종종 통화라도 좀 하시자, 하고 전화를 끊었다. 다 저녁에 아이와 통화가 되어 이런저런 소식을 더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요즘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주여, 기도를 가르쳐주소서>(복 있는 사람)를 읽고 있다. 그때에 마주하게 되는 우리라는 의미가 새삼 그렇게 다가오는 것이다. ‘우리글방에 다녔던 아이와 그 아이엄마에 대하여, 그저 우리는 그러그러한 정도의 이야기 이상을 알고 나누고 같이 고민하였던 사이다. 어쩌면 아이엄마도 그런 사실 때문에 오늘 자기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말 하고 듣고 마음에 두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저의 책을 읽으며 우리라는 의미가 내 안에 다시금 자리 잡지 않았더라면 굳이 다시 전화를 하여 안부를 묻고, 어떠하신가? ‘기도 제목이 되어 다시금 우리에 속하게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시간이 이른 아침 6시 조금 넘은 때인데, 녀석이 오늘 몇 시까지 갈까요? 하고 카톡을 하였다.) ‘우리란 그래도 되는 사이다. 서로 알고, 이해하고, 말할 수 있고, 보여줄 수 있어서, 같이 또 대신 주의 이름을 부르며 우리 아버지하고 대신 또 같이 기도해주는 사이이다.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 2:10).” 전의 나와 다른 나이다. 예전에는 글방 선생이었는데 이제는 글방 목사로 저를 마주하고 생각하고 이야기를 나눈다. 물론 저는 아직 그런 변화에 의미를 알지 못할 수 있다. 여전히 그저 글방 선생으로 나를 대하는 것이어도 상관없다. 나의 우리는 저의 우리와 다르다. 하지만 주님은 나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실 때 우리 아버지로 하나님을 명명하셨다.

 

그 우리는 예수님의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나는 감히 뭐라 부를 수도 없는 엄청난 존재, ‘하늘에 계신이이시다. 해와 달과 별들을 만드시고 운영하신다. 풀과 나무와 새와 바람을 다스리신다. 사람이 나고 죽고 일생을 다하는 모든 것을 관여하신다. 저는 창조자이시고 나는 일개 피조물일 따름이다. 내가 어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나? 그 하나님은 그냥 관념의 존재가 아니다. 얼굴이 있고, 사시는 데가 있고, 운행하시는 행동반경이 있다. 모든 데 다 스며있는 범신론적인 존재가 아니다.

 

스탠리는 우리의 인격적인 관계란 사적인 관계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고 하였다. 나는 밑줄을 긋고 그 의미를 되새겼다. 아이가 부모의 이혼과 엄마의 고생을 주로 화두로 삼아 청소년기를 힘겨워할 때 나와 아이는 사적인 관계가 되어 그런 이야기를 들어주고 들려주었다. 하지만 이제 아이는 증오하던 아버지 사업에 종사하고 상대적으로 아이엄마는 우울감에 떠밀려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집에만 있다. 속단해서 말하면, 남자가 다른 여자와 바람 펴서 버림받은 여자는 심한 충격으로 더는 그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다. 자녀들은 말할 것도 없는데, 그런 때 두 아이가 모두 글방에 왔었다.

 

나에겐 아이들과 달리, 우린 사적인 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하지만 나도 그때는 그게 다여서 듣고 같이 욕하고 서러워하다 말았다. 더 나은 인격적인 관계로까지 나아가지 못한 상태였다. 당연히 아이엄마에 대해 더 알려고도, 알아서도, 가까이 해서도 안 되는 사이였다. 다만 아이들만 토닥거리는 정도에서 그쳤으니, 나야말로 주여, 기도를 가르쳐주소서.’ 하고 빌었어야 한다. 그럼에도 오늘까지 그 관계는 이어졌고, 이제 우리는 우리가 되어 저들을 위해 기도한다. 아내와 딸이 아이 결혼식에 대신 다녀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우리가 된다는 것은 너 대신 내가 기도하는 사이다. 내가 못하는 생각을 네가 해주는 것이면서, 그 자리에서 날 위해 주의 이름을 불러주는 사이다. 너와 나는 예수님을 기점으로 하여, 그의 아버지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심이다. 혼자 힘으로 기도해야 하는 게 아니다. 아이는 여전히 나중에요, 꼭이요, 하고 약속을 할 뿐 아직은 교회에 나가지 않고 주를 구주로 영접하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안에 두셨다. 기도할게! 하면 감사합니다, 하고 말할 줄 안다. 단지 기원하고 바라는 정도가 아니다.

 

스스로 안위하고 위로를 얻는 정도의 기도도 아니다. 우리는 말도 안 되는 엄청난 것을 요구한다. ‘우리 아버지하늘에 계신아버지시다. 감히 고개도 들 수 없는 존재 앞에, 이제는 담대히 그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우리.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13:6).” 너무 뻔뻔할 정도로 내가 뭐라고! 하지만 그 예수 이름으로(9:29), 성령이 충만하여(4:31) 그리할 수 있는 사이다. 그래도 되는 것이다.

 

내가 뭐라고 그 사소하고 당황스런 실수로 연결된 아이엄마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근황을 묻거나 듣거나 말해주고, 앞으로 통화라도 종종하시자 제안을 할 수 있었겠나? 단지 사적으로 아는 아이들과 아이엄마 정도였으면 어찌 그러는 게 우습지 않을까? 아이는 내가 그렇게 엄마와 통화했다니까 의외로 좋아하였다. 실은 몇 번씩 엄마에게 나의 상태(?)를 말해주고 같이 대화하였으면 하고 권했다고 했다. 갈 수만 있으면 일주일에 한 번 정도라도 상담 간다 생각하고 다녀오라고도 하고. 심지어 내가 먼저 전화를 했으면, 한 번 찾아가주었으면 하는 말도 있었다.

 

사적인 관계로는 그런 데 오지랖이다. 괜한 참견이 되고 자칫 오해의 소지가 생길 위험도 크다. 그래서 듣고말고 그저 그러고 있었는지, 누구 책을 며칠째 읽고 있었고, 당장 내 곁에 있는 녀석 때문에 그 아이엄마와 말문을 트고 기도하며 마음을 열고 있는 때에! 그러고 보니 저이 둘의 사정이 똑같다. 한 이는 기를 쓰고 무장하여 악으로 깡으로 버티며 그래도 일을 놓지 않고 있는 게 아픈 아이때문이었고, 한 이는 아이들이 다 장성하여서 맥을 놓아버린 상태였다.

 

둘 다 경계한다. 어쨌든 내가 또 남자라, 피차 조심스러운 것인데. 나도 이런 점을 주의하고 주춤거리다보면 특유의 우유부단함으로 미루거나 외면하고 마는 것이다. 그런 내게 주의 기도는 새로웠다. ‘우리하나님께 우리의 일을 저들 대신 기도하고 아뢰야 한다는 게 요즘 우리 가정예배의 주제이다. 언제부턴가 아내도 딸애도 그리 알고 구한다. 우리에게 오는 아이들은 다녔거나 안 다니는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심지어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강한 부모도 있다. 다닌다는 아이도 몇 있다. 어떠하든 우린 우리의 우리를 위해 기도한다. 기도할 줄 모르는 저들을 위해.

 

그게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이라 여긴다. 그래서 나는 오늘 말씀에서도 우리가 먼저 눈에 띄었다. “우리가 그 명령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6:25).” 세 번씩 반복되고 있는 우리의 의미는 남다르다. 각개 전투하듯 내가 나의 하나님 앞에서 나의 의로움을 위한 게 아니다. 오히려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리이다(44:6).” 어느 사이 나의 문제는 웃어넘길만하다. 우리 문제에 마음이 자꾸 기운다.

 

이는 오직 주께서 우리를 우리 원수들에게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로 수치를 당하게 하셨나이다(7).” 그 우리는 서로 그럴 수 있고 그래야 하는 사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종일 하나님을 자랑하였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셀라)(8).” 어제그제 우리라는 의미에 대해 다시금 묵상하게 하시더니, 바로 실전으로 나를 내세우시는 것 같다. 뜬금없긴! 내가 뭐라고! 아이와는 그럴 수 있다지만 아이엄마와는 뭐라고! 내 안에 이는 여러 생각이 무안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6:4-5).”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막연한 구호나 관념의 위안이 아니다. 말도 안 되는 것을 구하고 바라고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저는 하늘에 계신창조주이시다. 무엇이든 구할 수 있고 구해도 되는 사이이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다. 오직 유일한 여호와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사랑할 나의 하나님 여호와이시다.

 

그리하여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6-9).” 우리에게 맡기시는 사명이 귀하였다.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르고 우리를 치러 일어나는 자를 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44:5).”

 

곧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리이다(6).” 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