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그의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도다
네가 가서 그 땅을 차지함은 네 공의로 말미암음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이 민족들이 악함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신명기 9:5
하나님이 뭇 백성을 다스리시며 하나님이 그의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도다
시편 47:8
‘기독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행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체험을 각자 가지고 사는 것은 필요하다. 단지 좋은 유익을 구하려는 게 아니다. 그게 목적이라면 교회가 아니어도 많은 단체나 기관이 세상에는 있다.’ 로이드 존스 목사의 글에 밑줄을 긋고 그 차이를 생각하였다. 누구, 어느 교회는 참 열심이다. 여러 교회가 같이 연합하여 지역사회를 위해 무얼 한다. 한동안 책 읽기를 하더니 요즘은 구약성경(모세오경) 암송을 한다. 종종 나는 그 앞에 서서 문에 붙은 안내 글을 읽다 온다.
오늘 말씀을 다시 읽어보면, “네가 가서 그 땅을 차지함은 네 공의로 말미암음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이 민족들이 악함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신 9:5).” 첫째, 내 공로가 아니고 나의 정직함으로도 아니다. 둘째, 그 민족이 본래 악함이다. 셋째, 하나님이 쫓아내신다. 넷째, 이는 약속하신 말씀을 이루시는 일이다.
종종 우리를 어지럽히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우리의 열심이 아닐까? 나름 수고하고 애쓰는 것으로 인하여 고단한 것을 마치 훈장으로 여기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다만 족한 것은,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딤전 1:11).” 그러므로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그러할 때 ‘나라가 임하신다.’ 임하다, 침공하다, 전파되다, 이를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 1:15).”
첫째, 때가 찼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 그러니 첫째, 회개하라. 둘째, 복음을 믿으라. 이는 매우 전투적이며 정치적이며 투쟁적인 언사다. 주의 나라가 임하신다는 것은 엄연한 전쟁이다. 우리의 첫 전투는 회개였다. 그러할 때,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겔 11:19).” 이와 같은 침공이 이루어지는 최전방의 삶이다.
가령 아침에 묵상을 할 때 단지 그 읽은 성경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말씀은 말씀으로 이끄는데 전날에 읽은 말씀과 생각과 마주쳤던 모든 일상이 녹아내리는 가열한 현장이다. 무엇을 쓸까, 미리 염두에 두지 않는다. 어떻게 쓸까, 구상하지도 않는다. ‘문득 떠오르는 것.’ 나는 이처럼 말씀에서 말씀으로 이끄시는 것에 몸과 마음을 맡긴다. 주로 어떤 사건이나 상황에 있어 전날의 일이 글을 주도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때론 가혹하고 치열한 한 날의 가열성에 대하여 나는 숨길 재간이 없다.
오늘 말씀은 이러한 것이 나의 공로나 정직함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로 악한 것을 쫓아내시는 역사인 것을 상기시킨다. 다시 말하면 내가 하는 게 아니라 나로 하여금 하게 하시는 이의 엄연한 의도와 성품이 주도하시는 것이다. 그렇게 말씀은 우리를 주도하며 명령하신다. ‘네 발에 신을 벗어라.’ 가시떨기나무 앞에서 모세에게도 그러하였듯 여호수아에게도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수 5:15).”
내 발에 신을 벗는 일, 내가 하는 수고와 애씀의 노고를 공치사로 두는 훈장 같은 마음을 내려놓는 것. 어찌 애쓰고 정직하여 나의 공로로 이루려는 것에 대하여, 가만히 있어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알아야 한다는 것. 감히 우리가 뭐라고 그 하나님을 다 이해할 수 있을까? 나는 늘 나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주제인데!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딤전 3:16).”
이를 보고 듣고 알 수 있는 일상으로의 오늘이 값지었다. 매일 매일이 정체된 듯하나 그 가운데서 생명은 살아있어 꽃을 틔우고 무성한 잎을 내어 점점 푸르러지는 4월의 계절은 말씀을 증거 한다. 딱 죽을 줄로 알았던 나무에서 저토록 새 생명이 자라나고 씨를 맺고 전파하여 그 나라를 확장해가는 여정이 눈물겹게 경이로울 따름이다. 하물며 사람이, 주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은 사람이 그대로 죽어 문드러진 채 살아간다면 이보다 악한 종자가 또 어디 있겠나. 말씀을 이해하고 묵상하는 데 있어 사전적인 지식만으로 되는 게 아니었다. 나의 사소한 기다림과 안달과 조바심까지도 녹아드는 일이었으니, 그의 나라가 임하신다는 것은 참으로 가열한 일이었다.
끝내 이를 거부하다 쓸쓸히 주를 떠나는 이의 심정도 인간적으로는 이해가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굳이 싸우고 다투지 않아도 되는 일에 끌려드는 것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신다는 것은 여태 아무렇지 않게 잘 먹고 잘 살던 나의 일상이 전쟁터로 바뀌는 일이기도 하다. 이때 말씀은 능력을 발휘하신다. 쉼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이런 와중에 쉼이라니!
그런데 그 쉼은 내 공로나 나의 정직으로 얻어진 게 아니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 7:39).” 성령이 이루시는 일에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37-38).” 이를 나는 단순하게 묵상글을 쓸 때면 느낀다. 말씀이 말씀으로 흘러넘친다는 것과 나는 거기서 희열을 느끼며 목마름의 갈증을 해소하고 있더라는 것.
그래서 하루 일과 중에 이처럼 말씀을 묵상하고 글로 옮겨내는 나의 일상과 접목하는 이 시간이 내겐 참 귀하다. 늘 느끼는 일이지만 그래서 종종 이 시간을 위해 남은 시간을 사는 것 같을 때도 있다. 전날에 무얼 읽었는지, 어떤 사람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어떤 일에 시달렸는지, 무슨 생각으로 신음하며 고심했는지. 어느 것 하나도 허투루 버려지는 일 없이 말씀으로 투과되어 나의 이야기는 어느새 하나님의 이야기로까지 나아간다. 이를 다시 읽고 묵상할 때 또한 새로운 느낌과 진리를 나는 그리 이해한다.
단지 내 이야기로서 일기나 푸념 정도로의 넋두리라면 한낱 보잘것없는 몽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지만, 나는 그래서 더욱 말씀으로 간다. 책을 읽으면서도 성경구절은 옮겨 적어두는 것이 그래서다. 누구와 얘기를 하다 어떤 말씀의 어떤 단어나 문장이 떠오르면 그것을 또한 잊지 않으려고 메모한다. 잊히는 건 잊히는 대로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그런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체험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뭇 백성을 다스리시며 하나님이 그의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도다(시 47:8).”
나는 그의 나라가 임하심을, 나의 굳어졌던 마음을 제하여 부드럽게 하신다는 데서 가열한 전투현장을 상상하였다.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겔 11:29).” 개인의 체험이 복음의 진수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으로 새 힘을 얻어 주를 찬양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분명하다. 중2 아이 둘이 갑자기 찾아와 수행평가로 내야하는 원고를 첨삭해달라고 하였다. 시험 때와 중첩되어 아이들의 짜증은 폭발직전이었다. 원고를 봐주고 비스킷을 건네고 어깨를 토닥거려 돌려보내면서!
이제는 저 한 영혼을 두고 주께 아뢰는 소원이 달라졌으니, 함께 나아와 주를 찬양하고 예배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 그러는 내 안에는 귀찮고 성가신 마음도 있으면서 부드러운 마음도 있다. 내 안에 그의 나라가 임하시는 데는 아무런 저항 없이 무혈 입성되는 게 아니다. 난공불락 같이 내가 내 고집을 알고 그 못돼 처먹은 기질을 아는데, 그렇게 두 마음이 부딪치다 주의 마음으로 아이들을 안쓰러워하고 안타깝게 여길 수 있는 일이었으니. ‘한 마음을 주어 새 영을 내 속에서 돌 같은 내 마음을 먼저 제거하신다.’
누구의 열심도, 그에 따른 활기찬 분위기와 나름의 수고에 대하여도, 그건 그의 것이라. 나는 다만,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신 9:5).” 하시는 내 안의 공명심과 어떤 보람과 의욕까지도 주께 의탁하는 게 옳을 거였다. 고로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지어다(시 47:1).” 이는 곧 “지존하신 여호와는 두려우시고 온 땅에 큰 왕이 되심이로다(2).” 내가 왕이 되고자 하는 나의 일살의 나라에 주의 나라가 임하시는 일은 결국 나의 왕권을 포기하는 일이었다.
“찬송하라 하나님을 찬송하라 찬송하라 우리 왕을 찬송하라. 하나님은 온 땅의 왕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송할지어다(6-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