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

전봉석 2019. 4. 24. 07:16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신명기 10:16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

시편 48:14

 

 

구약의 할례는 신약에서 세례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나라에 사는 일이다. 어제 그제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에 의미를 마태복음 61-13절 말씀으로 되새길 수 있었다. 먼저 우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하는 기도를 주의해야 한다. 이는 왜 그런고 하면,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자기 위안을 위한 기도는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이는 마치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하는 것과 같아서, 저들은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누가 알아주길 바란다. 그러므로 기도를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이는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주를 바라고 주께 구하는 것이 구제였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이야 인지상정이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사람들의 호응과 호의에 자신이 누리는 호사까지, 이미 저는 상을 받은 것이었다. 그렇듯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장황한 말 속에 정작 할 말을 잊는 법이다.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불현듯 내 안에 이는 어떤 마음이 그러하지 않았던가? 되물었다. 중언부언 말이 많아지는 게 노인의 특징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다만 다 아시는 아버지께 그럼 굳이 구할 게 무얼까? 그것은 나를 위한 건 이미 채우셨고 이루셨다는 의미다. 주님이 가르쳐주시는 기도는 결코 사적인 기도가 아니었다.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일이란 결코 사적인 일은 없는 셈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고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는 놀라웠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저는 결코 개념도 의미도 마음의 위로도 아닌 실체이시다. 저의 거처는 하늘이시고, 하늘은 모든 것 위에 존재하였다. 또한 우리 아버지시다. 예수님의 아버지로 예수께서 우리를 종 되었던 것에서 친구로 삼으신 바 우리로 우리가 되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생물학적 의미의 가족에서 영적인 의미의 가족이 되었다.

 

기도는 더 이상 나만의 날 위한 기도가 아니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8:26).” 우리의 기도는 못 하고 안 하는 이를 위한 서로의 기도이기도 한 것이다. 이어서,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할 때 저의 나라가 임하신다는 데서 우린 전투태세를 갖춘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전에 살던 나라에 사는 것이 아니다. 주의 나라가 임하시기를 바라는 것은 나의 주권, 나의 나라를 침노해주시기를 구하는 일이다. 이로써 나의 뜻이 아니라 우리 아버지의 뜻이 하늘, 그 하나님이 계신 곳에서 이루어지신 것 같이 내가 사는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이미 여기 임하신 나라, 그러나 아직은 완성되지 않은 나라. 그 나라에서 우린 이제, ‘오늘을 살며,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곧 그 일용할것으로 족한 줄 아는 것이다.

 

문득 이 대목에서 나는 요즘 새삼스러운 자유를 생각하였다. 내게는 내 돈이 의미가 없어졌다. 카드를 두 개 들고 다니는데 하나는 아내에게 속한 가족 카드고 하나는 딸애 이름의 카드다. 그러니 둘 다 어디서 뭘 사든 각각 아내와 딸애에게 그 기록이 전송된다. 가끔씩 그 불만을 토로하면 현찰을 얼마 주기도 하는데, 그건 그대로 들고 있다가 주일 날 헌금으로 낸다. 나에게는 이미 일용할 양식의 의미가 실현되고 있었다. 족한 것이다. 그만하면 충분하였다.

 

더는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의미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12:3).” 나는 이 말씀을 사랑한다. ‘일용할이다. 오늘 날 일용할의 범주를 넘어서는 모든 게 화근이 되어 범죄가 된다. 있는데 또 있고, 갖았는데 또 갖고, 모든 게 너무 넘쳐나는 세상이 되었다.

 

이어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할 때, 용서보다 어려운 게 또 있던가? 정말 이와 같은 기도대로라면 나야말로 영원히 죽었다 깨어나도 용서받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고약하여 수시로 드는 미움과 증오의 마음이 얼마나 가득한지 모른다. 내가 누굴 용서한 것처럼 나의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는 것이라면, 나는 어쩌면 평생 용서받을 수 없는 삶으로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에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수시로 이는 나의 허다한 시험은 결국 하나님의 나라와 나의 나라가 충돌하기 때문이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새삼 되새기며 그 의미에 놀라웠다. 나의 기도는 모두 중언부언이었고 누구에게 보이려는 것이었다. 또는 나의 요구와 나의 불만과 나의 넋두리만 일삼는 기도였으니, 새삼 기도가 어렵다는 것을 느꼈다. 이와 같은 마음으로 오늘 주시는 말씀을 읽으면,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10:16).” 내 목이 곧은 것이다.

 

오후께 누가 전화하여 아이의 외조부모가 어쩌면 찾아뵐지 모른다고 귀띔하였다. 저들은 아이가 세례를 받는 일에 대하여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던 모양이라. 하긴 안 믿는 이들로 각자 종교의 자유를 운운하는 양반들이었으니 뭐라 할 소린 없지만, 부친대신 형까지 와서 같이 축하하였다는 말에 늦은 감사와 미안함이 느껴졌던 모양이다. 그래서 예배에 나오시겠다는 소린지, 그냥 인사차 오겠다는 소린지, 그냥 지나가는 소린지. 그게 무슨 소리든 주의 소리로 들렸다.

 

주기도문을 새삼 깊이 묵상하면서 하면할수록 새로운 의미 앞에 나의 허튼 암송이 죄송하고 부끄러웠다. 아무 의미 없이 주절거렸던 게 아닌가! 그런데 그럼에도 효과가 있었다면 것은 우리 아버지께 향한 우리의 기도여서 성령도 함께 하시는 것이고 온 교회가 성도가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하는 기도였다. 하긴 아이가 세례를 받는 데 있어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암송하게 한 것은 참으로 잘한 일이었다. 처음엔 어려울 것이라 여겼는데, 하니까 하면 되었다. 여전히 앞뒤가 헷갈리고 어줍다 해도 이제는 안 보고 같이 입맞추어 주께 기도한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48:14).” 나는 이처럼 이어지는 모든 말씀이 다 연관 있고 그 뜻을 하나로 같이 하는 게 놀랍다. “그는 네 찬송이시요 네 하나님이시라 네 눈으로 본 이같이 크고 두려운 일을 너를 위하여 행하셨느니라(10:21).” 더 덧붙일 말이 무엇인가? 어쩔 땐 나의 부연보다 말씀만 이어 붙여도 충분한 설교고 묵상이고 의미가 된다. 이처럼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의 전 가운데에서 주의 인자하심을 생각하였나이다(48:9).”

 

오후께 중딩 아이가 혼자 와서 처음으로 글쓰기를 하였다. 모든 게 서툴고 어색하고 억지스러워서 나부터 지루하고 한심하였다. 그럼에도 주기도의 가장 큰 의미는 우리가 같이 하는 게 아닐까? 저 아이는 아직 하나님을 믿지 않고 모른다. 그러니 저 아이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얼까? 어째서 또 우리에게 보내신 것일까? 자판을 치며 글을 쓰게 하고, 쓴 글을 다듬으며 다시 읽고 더해야 할 말들을 상기시키다가 내가 깨달았다.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하고 물으시는 말씀 앞에서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10:12-13). 말씀은 다만 말씀으로 다가오는데 하나님의 나라가 나의 나라에 임하심으로,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과 같으니라(15).”

 

, “그는 네 찬송이시요 네 하나님이시라 네 눈으로 본 이같이 크고 두려운 일을 너를 위하여 행하셨느니라(21).”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1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