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오늘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전봉석 2019. 4. 25. 06:59

 

 

 

내가 오늘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따르면 저주를 받으리라

신명기 11:26-27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시편 49:20

 

 

보면 그게 우리 수준이라 누굴 욕할 수 없다. 유치하고 몰상식한 것이 서로를 헐뜯고 모함하고 자기주장에만 골몰하는 모습에서 환멸을 느낀다.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고 있는 정치판을 보면서 순간 우리의 역할을 되묻게 된다. ‘우리가 우리 죄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용서란 정쟁을 멈추고 증오와 분파와 갈등과 보복을 멈추는 일이다. 용서는 결국 승자의 것이다. 용서받은 자가 용서도 할 줄 안다. 모든 죄는 고통을 야기하는 것이다.

 

뉴스를 보다 얼른 꺼버리고 말았다. 죄는 복수형이다. 혼자 짓는 법이 없다. 하나가 무슨 짓을 하였을 때 그리 부추기고 동조하고 묵인했던 것들은 침묵한다. 우린 누구를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뼈를 때린다.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49:20).” 우리 앞에 복과 저주를 두셨다. “내가 오늘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말씀은 나를 돌아보게 하신다.

 

누구를 비난하고 욕할 게 아니다.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따르면 저주를 받으리라(11:26-27).” 말씀 앞에 가만히 앉아 있다 보면 그 의미가 새삼스러워 두려워진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8-9).” 죄를 자백한다는 것은 용서의 첫 걸음이 된다. 누가 누굴 탓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내가 용서받지 못했을 때 남도 용서할 수 없는 법이다.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2:13-15).” 이처럼 용서란 엄청난 값을 지불해야 했던 것으로, 나는 말씀 앞에 서면 도무지 자신이 없어 주의 도우심만을 구한다.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치르셨던 그 한량없는 사랑 앞에 속수무책이라.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구원이란 교회가 우리의 수입과 지출, 성생활과 여가시간, 정치적인 참여에 대해 의견을 가지고 치리하고 양육하는 일이다. 요즘 부쩍 개인의 사생활을 운운하며 자기존중을 내세우는 추세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향한 교회 공동체의 삶은 엉뚱하게 왜곡되어 그 모순을 드러내고 있는 것 같다. 인격적인 관계란 사적인 관계를 말하는 게 아니다. 늘 나는 자율을 우선하는 편이지만 아닌 건 아닌 것이고, 복과 저주는 엄연한 복과 저주로 나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럴 수 있다싶지만 그 고통은 결국 자신이 사는 동안 이고 지고 살아야 하는 일이었으니, 용서란 사뭇 자신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서로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부탁받은 기도를 빚진 마음으로 간구하는 것이 사명이었다. 사도들이 잡혔고, 잡혀 있는 동안 성도들은 기도하였으며, 풀려나서 저들이 함께 기도하였다는,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오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4:24-26).” 이 말씀을 본문으로 하여 설교원고를 작성하였다.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고 이런저런 표현을 찾아 가장 적절한 말로 문장을 다듬으며, 이 일이 내 일인 것에 새삼 귀하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막연하게 바라고 구하는 개인적인 푸념이 기도가 아니라,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에 합한 아룀과 구함은 오늘 우리 사회는 물론 앞서 저 먼 과거의 일들과 앞으로의 역사에 대해서도 바람과 소망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누가 누굴 욕하고 어디가 어디를 겨냥하여 고소하고, 물타고, 보다 자기 쪽으로 유리하게 조종하려 드는 이 사회의 모든 악의 구조 앞에서 더욱 주기도는 나의 아룀과 구함을 바로 알게 하였다.

 

늘 같은 날이 반복인 것 같고 들어앉아 아무 것도 하는 게 없는 것 같은데, 누굴 생각하고 무슨 일을 두고 마음을 쓰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 이 일이 이미 전우주적인 역사였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늘 되새기곤 하는 일화가 있는데, 3 때인가 고등학교 때인가? 무작정 여수 애양원에 간 적이 있다. 거기 병원에서 수술을 하였어서 그 이유로 간 것이지만, 느닷없는 여행이었고 어린 나이에 혼자였다. 새벽에 도착하여 마땅히 가 있을 곳이 없어 애양원 교회로 올라갔다.

 

마침 새벽예배가 끝나고 소경 장로들 예닐곱 분의 기도회가 있던 자리 맨 뒤에 앉아 피로한 몸을 쉬려하는데, ‘거짓말처럼내 이름 석 자가 불리고 날 위해 누가 기도를 하는 것이었다. 귀를 의심할 수 없는 것은 나의 아버지와 우리 교회로 이어지던 기도였으니, 나는 늘어져 앉았던 자세를 곧추세우고 전율하였다. 기도란 전우주적인 역사라고 표현하는 게 이런 것일 거였다. 미리 연락을 한 것도 아니고, 내 기억이 맞는다면 뭐가 삐딱하여 아프다는 핑계로 먼 길을 여행 삼아 혼자 떠났던 것인데!

 

나병으로 시력을 잃고 소경이 된 저들은 말 그대로 들어앉아 하는 일이라곤 성경을 암송하는 것이었는데, 그때 내 기억으로 친분이 있던 장로님이 주축이 되어 예닐곱 분의 저들 모두 성경 66권을 모조리 암송하고 있었다. 말이 쉽지 그러기까지 저들의 피나는 외로움과 적막감과 그 사투를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그런 그들이 어떻게 누구와 인연이 되면 서로 돌아가며 기도제목으로 올리고 같이 둘러앉아 기도를 하는 것이었으니!

 

한 가지 일이 현실로 나타나기까지 온 우주가 그 모든 사연과 구구한 사연이 뒤엉켜 우리를 궁지로 몰아넣듯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것인지, 이를 요셉은 하나님의 뜻으로 보았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45:5).” 곧 우리의 실수와 허물을 가지고도 하나님은 그 뜻을 이루어 선한 길로 인도하신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50:20).”

 

이를 바울은 우리가 맡은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하였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고전 4:1).” 말이 설교원고 작성이고 묵상글이지 나는 이렇듯 글쓰기를 하며 주의 뜻을 찾아 더듬을 수 있는 것을 감사히 여긴다. 누군 음악으로, 누군 미술로, 누군 사려 깊은 묵상으로, 누군 열심을 다하는 행사로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겠으나. 그렇게 설교원고를 작성하다보니 너무 길어져 내용을 어찌 줄이고 정리해야 할지 모를 정도였다. 그렇게 오전이 가고 오후가 지나 하루가 되었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6:18).” 성령 안에서 기도한다는 게 뭔지 알겠다. 언제부턴가 내 기도와 내 아이들 내 가정을 위한 기도는 줄어들고 자꾸 되도 않는 누구를 놓고 기도한다. 터무니없는 것을 바라기도 한다. 저들 부모가 평생 불상 앞에 앉았었는데, 그래서 저들도 더는 어쩌지 못하고 종교의 자유를 운운하는 일에 나는 기적을 바란다. 더 늦어서 저들이 죽기 전에.

 

그렇듯 나의 기도는 누구에게 의탁하고 나는 다만 누구를 위해 아뢰고 구한다.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19-20).” 시력을 잃은 저들의 쇠사슬이 말씀을 다 외우고 날마다 모두 누굴 위해 기도하는 군병이 되게 하였다. 나의 오늘이 이런저런 고립감과 외로움과 육신의 연약함이 쇠사슬에 매인 것 같으나, 이것으로 담대히 당연히 할 말을 하게 하려 하심이었다니!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49:20).” 무서운 말씀이다. 아무리 귀하고 값진 것이면 뭐하겠나? 그 가치를 모르면 한낱 휴지조각이고 돌멩이에 지나지 않는 것인데. 그러므로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내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섬기면 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또 가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11:13-15).”

 

이곳은 아니지만 이곳이 다름없는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비결이었다. 너희가 여호와께서 행하신 이 모든 큰 일을 너희의 눈으로 보았느니라(7).” 돌아보니 나의 모든 날들이 주의 관여와 이루심으로 얻어진 인생이었다. “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또 가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14-15).” 그 세월 동안 내가 비렁뱅이로 살지 않았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밟는 모든 땅 사람들에게 너희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게 하시리니 너희를 능히 당할 사람이 없으리라(25).” 업신여김을 받지 않았고, 지금 가진 것은 없으나 모든 걸 가진 자로 살고 있었다. 고로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8-10).”

 

이에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49:2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