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신명기 17:19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시편 55:22
중1 아이를 돌려보냈다. 일주일 동안 다시 생각해보고, 선택하라고 하였다. 선택에는 책임과 의무가 따른다. 아무 것도 안 하고 아무 것도 하기 싫어하고 아무 것도 하려 하지 않는 아이에게 나는 무모한 요구를 한 것은 아닐까? 말을 하면서도, 엘리베이터까지 배웅을 하면서도 손에 빵을 하나 쥐어주고 내 의도가 호도되지 않기를 바랐다. 억지로 끌고 가느니 스스로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게 나을 같았다. 현대의 가장 큰 병이 무기력은 아닐까?
평생을 아이들과 같이 보낸 세월이나 다름없는데 가장 어려운 게 아이들의 마음이다. 종잡을 수 없고 주체할 수 없어 본인도 어쩌지 못하고 쩔쩔매는 것이라, 그럼에도 나는 너를 응원하고 지지한다는 호감을 주어야 하는 일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별 것도 아닌 일로 상처를 받고 마음을 상해하고 그 핑계로 미뤄왔던 일을 아예 그만둬도 되는 것으로 삼아버리니까 말이다. 나야말로 혹독한 유년의 시간을 보냈다 싶었는데 이를 들어 아이들의 영혼을 감당하게 하시는가. 그런데 그 나이가 점점 낮아지고 확대되어 사춘기는 일찍 오고 무기력은 오래간다. 병원에 있는 스물다섯 된 아이와 통화를 하고 전날의 검사결과가 아직 나온 게 없다고 해서 일찍 끊었다.
성경은 내게 말을 거신다. 힘드냐? 그래도 살만하지 않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마 6:25).” 나는 투덜거리며 염려하지 않고 도달할 수 있는 게 있냐며 항변한다. 그럼 또 성경은,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27).” 하시며 이를 증명하신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26).”
아울러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30).” 일갈하신다. 종종 나의 염려는 나를 겸손하게 하기보다 건방을 떨게 한다. 쓸데없이 신중하고 공연히 진지하게도 한다. 염려가 그러는 것은 그래서 미루거나 포기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31).” 앞서 내딛는 나의 발걸음이란 항상 그런 식이어서 누구에 대해 또는 무슨 일 앞에서 주춤거리거나 미루거나 회피하거나. 그래서 나는 무모한 쪽을 선호한다. 어지간하면 그냥 산다. 내 문제에 너무 연연해하지 않는다.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32).”
이와 같이 말씀을 곁에 두고 늘 가까이 할 수 있는 것이 복이었다. 오늘 말씀도 이를 상기시킨다.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신 17:19).” 다른 더 좋은 수는 없다. 이제 이쯤 나이가 들고 보니, 세상은 그리 죽어라 하고 애써 수고하여 얻을만한 가치가 없다. 구도자의 삶으로 살든,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든, 그리하여 얻는 생이란 게 한줌 허망함과 한줌 허술한 추억뿐이었으니. 늘 정주고 같이 뛰어놀던 정다운 것들로부터의 회의가 더 큰 법이다.
“그는 곧 너로다 나의 동료, 나의 친구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시 55:13).” 곧 “나를 책망하는 자는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진대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진대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12).” 그런데 늘 상처를 주고 배신을 하고 끝내 고약한 사람이 내가 더 의지하고 위하여 가까이 하였던 사람들이었으니. 이는 결국 내가 어찌 짊어지고 위로를 받으려고 하였던 결과다. ‘기독도’와 같이 돌이켜 천성을 향해 가는 길에도 이내 자기 짐을 내려놓지 못하고 지고 가는 그 무게에 눌려 힘에 겨울 따름이라.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22).” 여전히 내가 나의 짐을 이고 지고 끌어안고 가는 길이라, 아이엄마는 그저 큰 교회 아무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서로 알려고 하지 않는 선에서 신앙을 지고 간다. 그런저런 사정으로 ‘그럴 수 있겠다’ 짐작은 하지만, 그러니 사는 게 고역인 만큼 주께 바라고 의지하는 일도 그저 힘에 겨울 따름이라. 우리의 이 미련함을 어쩌면 좋을까?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눅 2:21).” 그 구원이 어디 저 천국에서만 소용이 있는 것이겠나?
나의 연약한 육신도, 그 마음의 염려도, 실제 삶의 고통도 모두 구원이 필요한 것이었으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곤란으로 말미암아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매일 주를 부르며 주를 향하여 나의 두 손을 들었나이다(시 88:9).” 그러므로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116:2).” 더는 다른 도움이 없다는 데 나의 남은 생을 걸었다. 그처럼 좋아하고 바라던 사람에게서는 가망이 없다. 나의 결심과 결의로도 가능하지 않았다. 아이를 대하고 다루는 일에서도 나는 자신이 없다. 주께 놓아드리고 그의 선하심을 구하는 것밖에.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4).” 이는 곧 “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17).” 당장 오늘부터 다시 아이가 온다. 어제로 공장 일이 끝났다. 공부할 걸 들고 오라고 했다. 정작 아브라함이 낙타유목민으로 살았는지 당나귀유목민으로 살았는지 그게 뭐 그리 중요하겠나! 분명한 것은 저가 믿을 수 없는 중에도 말씀만 듣고 길을 떠났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롬 4:18).”
우리의 가장 큰 난제는 마음에 끌리는 대로 하란 소리다. 안 된다. 나는 중1 아이에게 그래서 생각해보라고 하였다. 한 주 동안 잘 생각해보고 스스로 결정하라고 일렀다. 엄마가 가래니까, 선생이 하래니까 마지못해 하는 정도이면 아니한 만 못할 수도 있다. 글을 쓴다는 게 뭐 그리 거창한 일이겠나. 중요한 건 자신이 쓰고자 하는 의욕이 있고 할 말이 있고 그 가운데서 교훈을 바라고 붙들고 온전하게 살고자 하는 마음이 중요한 것이겠으니. 나는 가감 없이 끙, 하고 앓는 소릴 내며 허리를 폈다. 죽지 못해 사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으로 사는 것이다. 마지못해 사는 것이 아니라 생(生)이어서 산다. 허망할 게 무언가. 모두가 주신 이의 것이다.
어찌할꼬! 누군 듣고 회개하고 누군 듣고 더욱 완악하여지는 일에 대하여,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행 7:54).” 나는 다만 전하고 권하고 함께 할 뿐이지, 저의 ‘어찌할꼬?’를 대신 답할 수는 없는 것이 생이다. 결국은 성령이 하셔야 하는 일이다.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살전 1:5).” 내가 아이에게 어떤 사람이 되는 것도 이내 나의 수고와 노력은 욕심일 뿐이었다.
주를 바란다는 일, 바랄 수 없는 중에 더욱 바란다는 일, 결국은 이 또한 하나님의 일이다.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지를 네가 알지 못함 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전 11:5).” 오늘부터 다시 글방으로 올 수밖에 없는 청년아이를 두고 나는 앞서 염려를 접어둔다. 나의 연약한 육신으로 힘에 부쳐하는 일조차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할 수 있는 만큼뿐이어서 해야 하는 일을 할 수 있는 만큼 할 따름이다. 아파서 돌아눕다 일찍 잠이 깨서 일어났다. 괜히 더 생각이 많은 날이다.
주신 바 말씀을 곁에 두는 게 복이었다.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신 17:19).” 이는 사는 날 동안 주와 동행하며,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시 55:22).” 이보다 더 좋은 약속이 어디 있겠나. 나의 연약함으로, 아이들의 상한 심령을 위해, 맡겨주신 생을 위하여, 기도한다. “하나님이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할 때에 숨지 마소서(1).”
종종 “나는 말하기를 만일 내게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다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6).” 하며 “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머무르리로다 (셀라)(7).” 하고 도망치고 싶을 때도, “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로다(16).” 곧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17).” 그리하여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22).”
그러므로 “나는 주를 의지하리이다(2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