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사도행전 2:21, 37-42 /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

전봉석 2019. 5. 1. 12:23

20190505 주일

 

사도행전 2:21, 37-42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

 

 

2: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2: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2: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2: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2: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2:41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침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2: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들어가는 말

 

복된 소식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21).”

 

듣는 자만 듣고 아는 자만 아는 소식에 대하여, ‘누구든지의 것이면서 구별된 자의 것이 되는, 우리의 기쁜 소식에 대하여, 일찍이 요엘 선지자는 전하였다.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2:31-32).”

 

이를 시편에서 반어적으로 역설하였다. “주를 알지 아니하는 민족들과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나라들에게 주의 노를 쏟으소서(79:6).” 이는 저들을 벌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에게서 물러가지 아니하오리니 우리를 소생하게 하소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80:18).” 다른 말로 하면 지옥이 필요한 것은 지옥에 들어갈 자들 때문이 아니라 천국에 들어갈 자들을 위한 것으로,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 지혜다. 지혜란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함이다.

 

그리하여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여 주 외에 다른 주들이 우리를 관할하였사오나 우리는 주만 의지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26:13).” 이 땅에 얼마나 많은 신들이 존재하는가? 저마다 숭배의 대상이 되어 하나님 아닌 하나님처럼 굴림하고 있으니, 명예와 돈과 출세와 권세와 호의호식하는 것으로 남들보다 나은 것을 복으로 여기며 살아간다. 그렇듯 주 외에 다른 주들이 우리를 관할하였사오나 우리는 주만 의지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이것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의 구별됨이다.

 

하여 이 복된 소식을 전하는 자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52:7).” 그 구원에 대하여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곧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3:16-17).” 구원이 먼저이고 심판은 나중이다. 심판이 구원이다.

 

이에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1:27-28).”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자의 삶이란,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이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의 삶으로 도대체 그렇지 않은 자들과 무엇이 다른가를 살펴보도록 핟자.

 

어찌할꼬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37).”

 

누구든지이 복음을 들을 때, 그 마음에 찔려 어찌할꼬!’ 한다. 어찌할꼬? 하고 마음에 묻는다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다. 아예 성령의 역사가 없다면 어찌할꼬? 하는 고민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엄연히 귀에 복음이 들렸다. 들려서 어찌할꼬?’ 하고 저들이 찔렸다. 하지만 들려도 듣지 않고, 보여도 보지 않는,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묵인하고 나아가 이를 갈며 치를 떠는 무리들도 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어찌할꼬!)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8:54).” 저들은 결국 스데반 집사의 설교를 들었다. 오늘 말씀과 상대적으로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57-58).”

 

먼저 우리는 이 복음의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소리 지르고, 귀를 막고, 달려드는 무리들을 보았다. 저들은 응당 자신들의 선택을 자신들이 책임져야 한다. 이에 심판은 온당하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처럼 우리들은 저들과 다르다.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6:28-29).” 후에 베드로는 이를,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2:38).” 곧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으라는 것이다. 우리의 일은 하나님이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16:30-32)

 

죄 사함을 받으라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38).”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결코 스스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세례는 명령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28:19-20).”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게 아니다.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게 아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10:9-10).”

 

결코 우리의 믿음과 신앙생활은 추상이나 이상이 아니다. 현실이다. 말로 시인해야 하고 삶으로 살아드려야 한다. 이를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17:30-31).” 종종 누가 묻기를 이를 알지 못하던 시대의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하는데, 그건 정작 자기 안에 드는 불신앙을 감추려고 하는 부질없는 호기심일 뿐이다. 저들은 저들이 모르던 곳으로 갔으니 됐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들었다! 남은 것은 하나다. 회개할 것인가, 회개하기를 끝내 거절할 것인가?

 

구원의 은혜는 누구든지의 것이지만 부르시는 자들의 것이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39).”

 

결코 우리가 아는 우리 하나님의 편만하심편재하심은 범신론적인 의미가 아니다. 돌도 나무도 바람도 산도 정령(精靈)이 스며있고 심지어 사람의 혼령이 그 기운을 더한다는 식의 샤머니즘적인 의미도 아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존재이시다. 거하시는 처소도 있고 얼굴도 있고 음성도 있다. 우리와 대화하고 다투고 명령하시는 인격체시다.

 

이를 요엘 선지자는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2:28-32).” 우리들로 하여금 말할 수 없는 중에 말하고,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으로 알게 하시는 것이다.

 

이를 위해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14:16-18).” 아이가 장래의 일을 말하고 노인이 꿈을 꾼다. 젊은이가 이상을 보고 그때에 주의 영을 종들에게 부어주신다.

 

곧 우리는 깨달을 것이다.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10:35).” 우리에게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우리가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는 결코 차별이 없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10:12-13).” 다만 앞서도 말했듯이 누구는 받고 누구는 거절한다. 누구는 모르는 체하고 누구는 이를 간다. 왜 우리로 이 복음을 전하게 하시는지, 영혼 구원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일깨우신다.

 

영혼 구원은 한계가 없다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40).”

 

그래서 우리는 누굴 정죄하면 안 된다. 저의 악함을 우리가 심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도 그 심판에서 구원 받은 자들일 뿐이다. 그러므로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고전 4:11-13).” 이 값어치를 알면 알수록 다른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삶을 사는 것이다. 가령 그 버려진 밭에 금은보화가 묻혀 있음을 안다면 나의 모든 걸 팔아서라도 그 밭을 사지 않겠나?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하므로 재물을 사용하고 또 내 자신까지도 내어 주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사랑을 덜 받겠느냐(고후 12:15).”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사나죽으나 주의 것이다. 이보다 더 다행한 일이 또 있을까?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14:8).” 시쳇말로 누구 라인을 타느냐에 따라 승진이 갈리고, 어느 학자의 사사를 받았느냐에 따라 그 학업의 권위가 달라지는 세상에서도 딸랑딸랑갖은 수단을 다 동원해서라도 인맥이니 학연이니,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는 판에! 이런 몽매한 수고에도 일생을 바치면서 하물며 영혼 구원의 문제에서라니!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세상에서 우리는 당당히 전하여 한다.

 

성령을 의지하고 산다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41).”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일 수 없다. 하나님을 같이 아버지라 부를 수 없었고 자신의 죄를 통회하며 주의 구원하심과 용서하심 앞에 엎드릴 수 없었다. 죽었다 깨어나도 그리 못하는 사람들에 대하여는, 성령만이 하실 것이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4:19-20).” 이와 같이 허무맹랑한 말이 믿겨지니까 말이다. 저들이 결코 무식한 어부여서 그러했을까?

 

우리는 지금 이 세상이 얼마나 악한지 날마다 터지는 뉴스를 보고 한탄하고 있다. 자기 자식을 성폭행하고, 죽이고, 서로 속이며 더 많은 이익을 취하려고 더한 일도 다반사로 저지른다. 보다 극적인 쾌락을 위해 마약이 판치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성매매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는 결코 오늘 날에 와서 그리된 게 아니다. 본래부터 그러하였다. 그러므로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1:4-5).”

 

우리가 성령을 의지하고 산다는 것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향한 것이다. 말도 안 되는 것을 구하고 바라는 이유도 그것이다. 성경 곳곳에는 말도 안 되는 반전이 있다.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3:4-5).” 하다못해 더는 심판을 미룰 수 없던 니느웨 사람들도 복음을 듣고 회개하여 죄를 자복하였다. 성령의 역사는 언제나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나오는 말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42).”

 

이제 우리의 삶은 예언의 삶이 성취된다. 늘 어줍고 희미하나 우리들의 모습에서 천국이 보인다. 복음이 실현된다. 오늘 본문 38절에서 우리가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으면, ‘성령의 선물을 받는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단지 나의 세대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손들에게도 이어지는 것이다. 이는 아브라함 때부터 약속이다.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22:18).”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3:23-24).” 이보다 더 엄청난 선물이 또 있을까? 도저히 죽어서도 갚을 수 없는 빚을 탕감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르침을 받고,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는 일은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누어주신 일과 같다. 곧 우리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 왜냐하면 지금도 우린 일흔 번씩 일조 번이라도 용서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왜냐하면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내 의지나 노력으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어서이다. 나는 결코 나의 의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심령이 가난한 자로 살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런데 나는 결코 온유하고 긍휼하며 마음이 청결하거나 남들과 화평할 수 없다. 그래서 애통해 한다. 그래서 주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심령으로 산다.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날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로 사는 것이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2:2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