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라
신명기 18:13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
시편 56:3
조용한 하루였다. 사무실마다 비어 종일 혼자 있었다. 아이는 느닷없이 꽃구경을 갔다. 덕분에 설교 글을 작성하였다. 점심께 아내가 나와서 같이 점심을 먹고 잠깐 산보를 하였다. 그 아이가 틱이 맞았다. 원래 그랬는데 좀 나았다가 도로 심해진 것이다. 글방에 오는 아이들을 분산하면 어떨까 생각하였다. 물론 아이가 그러겠다고 해야 하는 것이지만, 한 명씩 와서 글을 쓰거나 이야기를 하거나.
같이 사는 아저씨를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집 밖에 있는 아빠에 대한 미안함이 커진다는 아이. 늘 처져 ‘왕따’인데 그래서 돈을 많이 가지고 다니는 아이. ‘술 취한 아빠’와 ‘담배 피우는 엄마’ 사이에서 눈치껏 요령을 터득하여 각각 서로 다른 모습을 보이는 아이. ‘버림당하고’ 같이 사는 외할머니와 혼자 사는 엄마의 요구에 충족되려 항상 피곤한 아이. 예닐곱 명이 함께 와서 종종 들려주고 보여주었던 아이들의 사연은 구구하다. 아이들이란 지금 이 시대를 반영하는 리트머스 시험지 같다.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아내의 의견도 같아서 무작정 지금처럼 보내는 건 아닌 것 같았다. 한참 학원으로 운영할 때는 여러 명을 더 많이 수용하는 것이 좋았다면 이제는 친밀하게 더 가까이 아이의 영혼을 마주해야 할 것이라 서로 의견을 모았다. 누군 제일 단정하고 예쁜데 욕을 잘하고 상스럽다. 넌지시 그런 아이의 상태를 애엄마한테 귀띔하였더니 자기 아이는 그런 애가 아니라면서 그만 보냈다. 다들 상스럽게 여기는데 아이엄마만 상서롭게 여기는 것이었으니.
그야말로 어른 흉내를 내는 시기이니 저들 모습이 곧 어른들 모습일 터, 유난하다 싶으면 여지없다. 이상하다 싶으면 영락없는 것이다. 이런저런 사연 없는 가정이 어디 있겠나만, 틱이 오고, 거짓말이 일상이고, 욕을 입에 달고 살고, 폭력을 휘두르고, 남의 것을 훔치고, 잘 울고, 화내고, 분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중1 아이는 엎어져 자기 시작했고, 엄마와 선생 사이에서 적당히 앞과 뒤가 다르게 속이고 있었다.
우리는 기도하기를 우리에게 보내시는 아이들을 주의 마음으로 대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기를. 그리하여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7).” 아는 사람은 알지만, 어른보다 애들이 더하다. 어찌나 영악한지 어른 뺨친다. 어른을 대하는 일이면 그저 적당한 선이 있기는 한데, 아이들이란 막무가내라. 종잡을 수 없을 때 우린 힘에 부치고 싫증이 난다. 윽박지르고 부모에게 일러 통제하고 억압하는 게 능사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 앞에서는 그럴 수 있고, 그래도 되는 상대가 되어주는 일이 필요하였다. 이 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일이 주를 영접하는 일이라니!
세월이 악하다.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막 13:12).” 이는 리트머스 종이처럼 그대로 스며져 흉내 내고 더하여져 고약하게 구는 아이들 앞에서 우리는 종종 속수무책이다. 선생 앞에서 책을 던지며 욕을 해댄다. 몇 번 학교에 부모가 불려갈 정도였으니, 아이 안의 화가 들끓는 것이다. 그런 아이들을 그저 수동적으로 글방에 오고 놀다가는 식으로 그칠 게 아니라, 내밀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아내는 우선 초등부 아이들부터 오늘은 모두 보내지 않기로 하였다. 가고자 해서 열심을 다하면 다음 주부터 한 아이씩, 요일과 시간을 달리하여 혼자 보내기로 하였다.
그러면 어떨까, 하고 생각은 하고 있었다가 그렇게 하루에 한두 명씩 각각 시간을 나눠 만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물론 아이들이 그걸 원하면 그리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어찌 이루어가실지 두고 봐야 알 일이다. 앞일을 우리가 어찌 알겠나? 다만 그 앞에도 변함없이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은 안다. 아이들은 본래 순수하여야 옳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 누구보다 호산나, 하고 외친 세대가 아이들이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어린이들을 보고 노하여(마 21:15).” 애들이 뭘 알겠냐고 하겠지만 그 속은 아무도 모른다.
아이들도 주체할 수 없어 틱으로 분노와 거짓말로 욕으로 도벽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를 그저 그 아이의 상스러움으로 치부할 것은 아니다. 유난히 자기 자식은 그럴 리 없다고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던 아이엄마가 글쎄 그렇게 교회에 열심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신앙이 참 좋은가싶었는데, 그래서 하나 뿐인 딸자식 머리 위를 맴도는 '헬리콥터'였다. 양말 하나까지도 정갈하게 참견하고 들면서도 정작 아이 속에 무엇이 가득한가,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막상 그만 둔 아이지만 그 아이를 생각하면 마음이 짠하다.
아내와 잠깐 산책을 하며 아이들 이야기를 나누었고, 오후 내내 혼자 빈 글방에서 서성거리며 유난히 저 아이들을 생각하였다. 왜 우리에게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고 하신 걸까?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3-4).” 단서는 두 가지다. 어쨌든 어린아이라는 것과 자기를 낮춘다는 필연적인 사실이다. 싫든 좋든 아이들은 그들 부모에게 의존해야 하고 저들의 작태와 상관없이 거기서 살아야 한다. 살면서 자라야 하고 자라는 동안 치열하게 씨름해야 한다. 성장이란 그런 것이다.
성장하지 않는 영혼은 죽은 것이라. 우리가 자라가야 하는 것은 성경의 특명이다. 필연인 것이다. 그 환경이 어떠하든, 어떤 부모 밑에서 어떤 가정으로 살았든지, 자라내야 하고 살아내야 하는 일이다. 그러니 다 자란 어른은 리트머스 종이라 할 수 없다. 이미 변색된 저들 영혼은 완고하게 굳어져서 더는 그 색을 종잡을 길 없다. 그 어떤 대단한 위인의 것으로가 아니라, 예수님은 어린아이의 것으로 기적을 행하신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요 6:9).”
한 명씩, 혼자서 글방에 간다고 하면 아이들이 오겠나? 나의 의문은 내 몫이 아닐 것이다. 한 애 한 애, 아이들을 떠올리며 어렴풋이 알고 그 아이의 사연과 사정을 두고 주께 아뢰던 일. 폭식과 틱, 욕설과 거짓말, 도벽과 성적호기심, 유난히 밝히는(?) 아이 하나하나의 성향을 떠올려보며 나는 다음 행보를 가늠할 수 없어 막연하였다. 와야 오는 거고, 안 온다고 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그렇게 또 하나씩 따로 오는 걸 그 엄마들이 좋아할지. 나의 병적인 생각은 끝 간 데 없이 앞질러서 지레 의구심이 들었다. 주가 하신다. 주가 하실 것이다. 죽은 아이도 살리신다.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막 5:41).” 내가 하는 일이 아니다. 알면서도 생각은 염려를 동원하여 지레 겁먹는다. 그럴 거 없다. 오늘 말씀은 명료하였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라(신 18:13).” 내가 완전할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다. 완전하신 하나님을 완전히 신뢰하는 길뿐이다. 내가 어찌 하나님처럼 온전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그것은 나의 연약함과 미련함을 주께 내어놓고 주의 온전하심 앞에 승복하는 것뿐이다.
이에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시 56:3).” 다른 더 좋은 수는 없다. 예전으로 돌아가 학원을 운영하듯 아이들을 끌어 모으고 인원을 늘리는 데 주안점을 두는 게 아니다. 심지어 그 아이들 비위를 맞추는 것도 소모적일 뿐이다. 하나님을 보고 한다. 완전하신 하나님을 바라는 길이 내가 완전하여지는 길이다. 그러니 남들처럼 굴지 말자. “네가 쫓아낼 이 민족들은 길흉을 말하는 자나 점쟁이의 말을 듣거니와 네게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런 일을 용납하지 아니하시느니라(신 18:14).” 저들의 이런저런 수법에 놀아날 거 없다. 어디 유명한 사례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다만,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라(13).” 고로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시 56:1, 3).” 곧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리이다(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