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찬송하리이다
네 눈이 긍휼히 여기지 말라 생명에는 생명으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에는 손으로, 발에는 발로이니라
신명기 19:21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시편 57:7
‘자신에 대한 신념은 어머니가 바라던 모습이다. (중략) 자신에 대한 정의, 자존감은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부터 형성된 것이다.’ 존 브래드쇼의 <가족>에서 밑줄을 긋고 그 의미를 되새겼다. <가족사랑 수기공모>에 원고를 낼까 하여 아이가 글을 쓰고 있다. 그러자면 남다른 수치와 고통을 가감 없이 드러내야 하는데, 본능적으로 아이는 엄마를 두둔하고 있었다. 엄마로 인해 질식할 것 같아하면서도 정작 그것을 말하려고 할 때, 모든 이야기는 각색되고 이미지는 윤색된다. 실제의 어머니상을 온전히 마주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들은 이야기로 아이를 부추길 수는 없다. 아이가 욕을 한다고 해서 같이 동조했다간 덤터기를 쓰기 십상이다. 나는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해야 하고, 들어서 이미 알고 있는 말도 새로 듣는 말처럼 모르고 있던 것이어야 한다. 그러자니 진척이 없다. 속엣 이야기를 뒤집어 까발린다는 일은 엄청난 일이다. 죄를 자백한다는 것이 그래서 무시무시한 일이다.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고 더는 그 매인 바 된 자신으로부터 조종당하지 않는 일이다. 그래서 우린 우리 스스로 죄를 마주할 수 없고 이를 인정할 수 없다. 성령이 하시는 가장 첫 번째 작업이시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문득 우리가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일이 이처럼 쉽고 가장 단순하게 여겨지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가.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10).”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게 실은 자신의 실제 모습이었다니! 그리 붙들고 사는 신념의 실상이 어릴 적 어머니가 바라던 나의 모습이었다니!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11).” 자신이 자신을 잘 안다고 하지만 실은 이를 영으로만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12).” 이 은혜가 아니면 단 하루도 사람답게 온전하게 살 수 없다는 데 치를 떤다. 의붓아비가 중1 된 딸애를 성추행하다 살해하여 저수지에 버렸고, 친모도 가담하여 이를 공모한 뉴스가 며칠째 세간의 이목을 끈다.
다들 혀를 끌끌 차며 사람이 어찌 그럴 수 있냐고 개탄스러워하지만 정작 우리는 서로에 대하여 그 이상의 증오를 감추고 살고 있다. 나는 중학교 아이들에게 수기공모에 응모하는 것을 권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만 주의 인도하심과 성령이 함께 하심을 바랄 뿐이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13).” 나는 누구도 구원할 수 없고 바꿀 수 없으며 변화시켜 새 사람이 되게 할 수 없다. 가만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 주께만 아뢰고 고할 따름이다.
아이는 아침 일찍 글방으로 왔다. 기분이 가라앉아 컨디션이 엉망이었다. 부쩍 조현병이 사회의 이목을 끌면서 나는 마음이 어렵다. 조증과 울증의 간극이 심할수록 스스로도 주체할 수 없는 것이다. 아이에게 까만 모자와 크로스가방을 선물로 주었다. 공장을 그만둔 기념이라고 했지만 아이의 다운된 기분을 업 시키려는 의도이기도 하였다. 실은 이렇듯 병명이 뚜렷하고 치료가 이뤄지고 있는 경우는 그래도 다행이다. 내가 보기엔 우리 글방으로 오는 아이들의 거의 대부분이 조울증을 가지고 있다. 욱, 해서 담임선생에게 욕을 하고 시험지를 던진 아이. 엄마 이야기만 나오면 입에 담기 민망한 험담을 늘어놓는 아이. 친구에 대해, 하루하루 사는 일과 중에서 아이들은 분이 많아 화를 주체할 길이 없다.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은 시대다.’ 모두가 아픈데 아무도 치료를 받지 않는 시대이고, 자신을 병자라 하면 패배자로 여겨 죽일 것처럼 덤벼드는 시대다. 내가 나은 건 없지만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 선생이나 잘하세요! 다 그렇지 뭐. 내가 잘났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 집은 괜찮은 편이에요. 저마다의 방어기제가 엄연하여 자칫 먼저 말을 던졌다간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듣고도 못 들은 척,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처음 듣는 이야기인 것처럼 시치미를 떼야 한다. 뭐라 권면이라도 했다간 졸지에 원수지간이 된다. 다시 말하지만 내 능력 밖의 일이다. 나는 그저 어줍을 따름이다. 허술하고 어눌하며 도무지 모르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살전 1:5).” 우리가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되는 일에 대하여 결코 나는 내가 주체가 아니라 성령이 하시게 해야 한다. 나에게는 주도권도 아는 바도 없다. 허술하여 또 들어도 모르는 사람이어야 한다. 한 번은 이제 고등학생이 된 어느 아이의 이런저런 사연에 대해, 그것을 글로도 써서 어디에 보내고 했던 내용이라 나도 잘 아는 것처럼 굴다 졸지에 봉변을 당했다. 자기가 한 말이 고스란히 내가 자신을 비난한 말로 둔갑한 것이다. 서로 그 정도 말은 허심탄회하게 할 수 있는 사이란 우리에게 허용되지 않는다. 알아도 모르는 사람이다. 몰라도 되는 사람으로 나는 들을 때마다 처음 듣는 것처럼 벽이어야 한다.
이를 우리가 죄에 대하여 갖는 태도이고 방어로 삼아야 한다. 오늘 말씀을 그렇게 다시 읽어보면, “네 눈이 긍휼히 여기지 말라 생명에는 생명으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에는 손으로, 발에는 발로이니라(신 19:21).” 그러므로 나는 철저하게 냉소적이고 이성적이어야 한다. 감정에 같이 동조해서는 안 된다. 혼자 울컥, 하여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있어도, 먼저 나서서 딱한 표정을 짓고 저를 마주해서는 안 된다. 죄에 대하여 긍휼히 여기지 않는 것이 긍휼이다. 응당 그에 상응하는 태도로 마주하는 것이 방어다. 종종 나는 아이의 응석을 그리 외면한다. 그러려고 눈길을 다른 데 두고 말 귀를 못 알아듣는 사람 시늉을 한다. 그래야 한다.
때로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을 때까지 가만히 그 성에 머물러야 하는 것이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눅 24:49).” 주가 하실 때까지. 주께서 하실 수 있도록. 오히려 내가 더 빙충맞고 궁상맞아 동정의 대상이 되는 것이 낫다. 수없는 실수로 얻는 결과이다. 자칫 내가 좀 아는 체하여 먼저 다가서면 영락없다. 덤터기 쓴다. 여태 나를 그런 사람으로 봤냐고 되레 욕을 먹는다. 어쩔 땐 저가 했던 말이 고스란히 나를 견주어 원망의 화살을 쏘아대기도 하는 것이다. 어쩌면 좋을까?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머물라. 멈춰라. 나는 그저 소리의 벽이다. 듣고 들어도 그저 그대로인 벽이다. 내가 문이 아니다. 내가 열어서는 안 되고 열 수도 없다. 아버지께서 약속한 것을 보내시리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전 1:3).” 다만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7).” 기다림보다 훌륭한 은사도 없는 것 같다. 그러니 벽이 되는 수밖에. 저의 했던 말을 또 듣고 저의 투정을 또 보고 저의 눈물을 또 느끼면서, 때론 저의 발길질과 고성과 원망의 욕설까지도 참고 견뎌야 하는, 벽이 되어 주는 일. 그러다보면 어느새 울타리였다. 저를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우리로 서로 안에 두시는,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이는 내 능력이 아니라 은사다. 아픈 것도 은사다. 주를 바라는 무기가 되어준다.
그리하여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시 57: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