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리라

전봉석 2019. 5. 7. 07:17

 

 

 

네 진영 밖에 변소를 마련하고 그리로 나가되 네 기구에 작은 삽을 더하여 밖에 나가서 대변을 볼 때에 그것으로 땅을 팔 것이요 몸을 돌려 그 배설물을 덮을지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구원하시고 적군을 네게 넘기시려고 네 진영 중에 행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진영을 거룩히 하라 그리하면 네게서 불결한 것을 보시지 않으므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리라

신명기 23:12-14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 (셀라)

시편 61:4

 

 

똥 싸고 사는 일이야 정한 이치와 같다. 엄청난 거류민이 운집하여 사는 동안 저들이 싸고 묻었을 똥을 생각하면 기이하다. 가장 공평하여서 애나 어른이나, 잘난 자나 못난 자나 하루에 한 번은 싸야 하고 싼 것을 뒤처리하는 데 있어 특별히 유목민으로 살던 저들에게는 엄청난 일이기는 하였겠다. 어릴 때를 생각하면 길거리 여기저기에 그렇게 똥이 많았다. 개똥은 예사고 사람 똥도 흔하여서 똥 밟았다하는 말은 여러 의미를 내포하곤 하였다.

 

성경은 우리의 성결을 단순히 개념이나 이상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실제 그 배설물을 처리하는 일에 있어 네 진영 밖에 변소를 마련하라고 하셨다. 요즘이나 방 안에도 변소를 두고 눈 똥은 한곳에 모아 흔적도 없이 퍼다 나르니까, 실제 그 주인이 누구인지 구분할 수 없다. 그런데 네 기구에 작은 삽을 더하여 밖에 나가서 대변을 볼것을 성경은 가르친다. 때에 그것으로 땅을 팔 것이요 몸을 돌려 그 배설물을 덮을지니성결은 몸으로 정갈하는 수고를 따른다. 그런데 이 문제는 구원의 원리로 연결되어 거룩을 도모하게 한다. 나아가 우리의 적군을 우리에게 넘기려고 행하심이다.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구원하시고 적군을 네게 넘기시려고 네 진영 중에 행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진영을 거룩히 하라 그리하면 네게서 불결한 것을 보시지 않으므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리라(23:13).” 이에 주가 우리를 떠나게 하지 않는 길은 불결한 것을 멀리하여 정결하게 하는 것인데, 똥은 날마다 처리해야 하는 일로써 한두 번 그러다 말면 되는 일이 아닌 것이다. 곧이곧대로 서로가 알면서도 모르는 체 하고, 성인된 자는 스스로 그 일처리를 해야 하는 것이다. 날마다의 일이고 수고이면서 잘 먹는 일만큼 잘 싸는 일도 매우 중요한 것이다.


말씀 앞에서 여러 생각이 오가며 그 깊이를 더하는 것도 똥의 어쩔 수 없는 연속성 때문이다. 사는 데 있어 필연적인 수고다. 그 숱한 똥을 서로 감추고 잘 처리하는 일이 경이롭게도 여겨진다. 여기서 드는 게 서로에 대한 동정심이 없다면 어쩔 뻔했나? 그래서 동정(同情)은 상대의 고통을 경감시켜주고자 하는 마음이다. 자기 일처럼 알아주고 그 처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가엾게 여겨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도와주는 실제의 표현이다. 이를 오늘 말씀에서 진영 밖으로 나가 똥을 싸고 흙으로 덮어 정결을 유지하려는 수고로 읽으면서 동시에 그리 하는 서로의 행위에 대해 알면서도 모르는 척 그러나 지지하고 응원하는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여기서 말을 바꿔, 나는 아이가 오면서부터 장애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배우고 있다. 오히려 정상인으로 여기는 사람들을 마주하고 대하는 일이 더 어렵다. 어제 대체공휴일 날, 누가 건너와 꽤 긴 시간을 너스레를 떨다갔다. 다음 달에 중국 어디 산으로 등산을 간다는 말로 시작해서 이 말 저 말 옮겨대는 저의 말에 나는 어지러웠다. 특히 정치나 종교 이야기에서는 같이 말을 섞어서는 안 된다. 들으려하지 않는 말은 무력하여 상대를 겨누기보다 자신을 겨눌 뿐이어서, 그저 차를 한 잔 내어주는 것도 내 일이려니 하고 그냥 두었다. 그러니까 나는 언제부턴가 정상인이라 여기는 이들을 대하는 데 더 어려움을 느끼고는 한다. 어쩌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일이 이상해져야가능한 것이다. 실제 어느 책에서 보니 앞으로 몇 년 후면 다운증후군이 사라질 것이라 하였다. 임신을 하고 앞서 검사를 한뒤 조기에 유산을 시킬 테니 말이다. 어쩌면 우리의 이상함은 성경적인 삶을 예표하기도 한다.

 

아내와 같이 오후께 동네를 멀리 한 바퀴 산책하였다. 자전거를 타고 소래포구를 가자고 했는데 허리가 아파서 자신이 없었다. 대신 천천히 느릿느릿 걸어서 평소보다 먼 반경의 둘레를 산보하고 점심을 먹고 돌아왔다. 나는 종종 내가 장애가 있다는 것을 잊고 산다. 그러다 어느 건물 앞을 지나는 나를 마주하면 그제야 인식을 한다. 불편함이나 어떤 고통은 익숙하여서 이제는 그렇지 않은 실제를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러다 '아이'가 오면서부터 정상적이지 못한 아이이상함은 나를 새롭게 가르치는 것이다. 그래서 장애를 가진 태속의 아이를 유산시켜 경감시키는 일은 누구의 고통인지 그 출처가 모호할 따름이다. 문득 드는 생각이 천국은 장애인이 없는 나라가 아니라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이 없이 하나가 되는 나라일 것이란 생각도 한다.

 

마르바 던의 어느 책에서 우리의 장애나 어떤 고통은 우리로 특별한 존재라는 인식을 갖게 한다고 하였다. 이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남들과 다른 어떤 내밀한 소통의 통로가 장애였다. 지난 주일날 아이가 대표기도를 할 때 저의 맥락 없는 기도내용에 오히려 우리 모두가 조용히 귀 기울였던 기억이 난다. 나는 대놓고 고백하였다. 여느 누가 기도할 때보다 더 적극적인 관여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이의 기도다. 나는 저의 내용이 중언부언이라 여기지 않는다. 최선을 다해 언어를 고르고 어휘를 조율하지만 앞뒤 다른 말과 말 사이에서 우리는 숨 죽여 주를 바라고, 모름지기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하고 아이가 기도를 마무리할 때 우리 모두는 안도하듯 더욱 큰 소리로 아멘하고 화답하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고전 12:22-23).” 주가 머무시는 지체는 이상하다고 여기는 몸과 마음에서다. 하나님이 내주하시기로 선택하는 장소가 가난과 장애와 소외의 자리였다.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24-25).” 부족한 지체에 귀중함을 더하신다는 말씀 앞에 겸허할 필요가 있다. 이는 똥을 싸고 처리하는 일과 같이 본디 개념이 아니라 실제이다.

 

우리에게 아이의 등장은 교회의 가장 귀한 지체이고 중심의 자리가 되어주었다. 기독교란 증인된 자들의 종교다. 승승장구 잘됨과 정상을 증거로 두면 그 교회는 세상과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시스템은 물론 지향하는 바가 각각의 행복추구권으로 국한된다. 하지만 성경의 여러 증인을 보면 실패와 낙오와 버려진 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요즘 가정예배로 같이 읽는 사사기에서 입다의 경우만 봐도 서출이라 모두의 외면을 받던 이를 들어 하나님은 역사하셨다. 예수님도 저들이 버린 돌이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2:20).” 나는 걸으며 나의 느린 느림으로 오랜 사물을 감상하였다.

 

우리의 온유함이란 실제 이상해져야얻을 수 있는 것이다. 가장 시간이 필요한 덕목이기 때문이다. 하루아침에 생성되지 않는다. 예수님은 직접적으로 언급하신 바 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11:29-30).” 저의 온유는 엄연한 반목과 배신과 오랜 괄시와 조롱으로 다져져온 마음이다. 이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5:5).” 사는 날 동안 가장 감사를 많이 지니고 배우고 나누며 사는 데는 장애가 특별한 선물인 것은 분명하였다. ‘이상하지 않은 사람들사이에서는 대수롭지 않는 것이 이상한 사람들에게는 그 자체로 소중한 감사다. 나는 지팡이를 짚고 아내와 먼 길을 걸으며 그런 생각을 하였다. 그래도 이처럼 내 발로 걸어 동네를 산책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이 시간은 그 자체로 마땅하였다. 어쩌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상한 사람으로 사는 일이다. 삶의 속도를 늦춘다. 모든 게 소유가 아니라 누릴 수 있는 감사의 순간임을 깨닫는다. 하나님의 시간을 같이 공유하는 것이다.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22:9-10).” 우리의 절박함은 되레 작은 것으로 감사를 이루게 한다. 삶이 주는 선물이 다른 것이다. 곧 다르게 살 수 있는 것으로 이미 큰 자유를 누린다. 이 자유는 사사로운 것을 더욱 사랑할 수 있는 자유다. 나는 천천히 걷다 허리가 아파 걸음을 멈출 때면 생각하였다. 그걸 걸었다고 등짝에 땀이 흥건하게 배일 때에 알았다. 이것으로도 이미 기쁘고 감사한 것이다.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16:16).” 이와 같은 말씀이 새롭게 다가왔다. 내가 싼 똥을 치우고 돌아설 때의 뿌듯함이 거룩에 한 걸음 더 다가가게 한다. 더럽다고 치부할 것이 아니다. 부끄럽다고 숨길 일도 아니다. 소위 정상인들의 세상에서 저가 정상적인 삶을 산다고 여겨, 중국 어느 높은 산으로 등산여행을 떠날 생각에 일요일마다 가까운 산을 등반하며 훈련하고 있다는 말에 실소를 터뜨렸다. 누구와 어떤 말을 나눌 때도 저의 정상적인 사고는 성경을 배격하고 진리를 외면하게 한다. 뭐라 더 하면, 너나 잘하세요! 하는 식으로 치부하고 만다. 어찌 다룰 수 없는 비정상이 분명하다. 그러면 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이에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3:8).” 내 안에 두시는 이와 같은 마음은 임의로 불어 손등을 스치고 얼굴을 감싸는 바람과 같아서, ‘이상한 아이와 같이 있을 때 이상한 나는 더욱 충만하여진다. 그리하여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 (셀라)(61:4).” 곧 나의 한 가지 소원은 주신 날 동안 주신 몸을 가지고 주시는 걸음을 다해 주의 은혜로 사는 일이다. “여호와여 주의 은혜로 나를 산 같이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30:7).”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27: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