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

전봉석 2019. 5. 9. 07:08

 

 

 

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

신명기 25:4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

시편 63:3-4

 

 

아이러니하게도 평화를 위해 전쟁을 한다. 중동 가자지구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더 많은 전쟁이 평화를 명분으로 자행된다. 또는 정도를 벗어난 인간애로 수많은 돈이 투입된다. 가령 죽음을 연장하고 생명을 연명하느라 소비되는 비용이 엄청나다. 매일매일 쏟아지는 뉴스가 우리의 실상을 그대로 드러낸다. 석가탄신일을 기점으로 보은군에서는 510일부터 12, <속리산 신() 축>를 연다. ‘신과 함께 EDM’, ‘신 시네마 천국등 다채로운 볼거리로 산신제’, ‘굿판을 벌여 자연문화유산(?)을 이어간다고 하였다.

 

도저히 풀리지 않는 것이 죄다. ‘머릿속의 악마는 우리를 조종한다. 사탄을 이길 재간이 없다. 그런 자들의 사투는 어떻게든 죽음을 연장하는 일인데, 한 해 평균 막대한 돈이 수명 연장을 위해 쓰인다. 일주일 내내 쏟아지는 뉴스가 되묻는 것 같다.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냐?’,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얼마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어찌 함께 꾀어 주의 영을 시험하느냐?’ 사도행전 5장, 설교 원고 초안을 잡아,‘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에서 오늘 우리의 실상을 보았다.

 

그야말로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시끄러운 길목에서 소리를 지르며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그 소리를 발하여 이르되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니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1:20-22).” 소리쳐 우리를 부른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이길 수 없는 것들이 있음을 알린다. 그럼에도 우린 통계나 여론조사에 의존하여 가늠할 따름이다. 교육을 통해 또는 심리 치료를 통해 해결될 수 있다고 자신한다. 그런데 점점 우리 곁에 두시는 아이들의 심령이 상하고 병들었다. ‘자녀 교육이란 명목으로 아동학대의 대부분이 가정에서 일어나고 있다.

 

성경은 이를 엄연히 어쩔 수 없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13:23).” 우리의 죄는 우리의 악을 악이라고 여기지 못하게 한다. 결코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구부러진 것도 곧게 할 수 없고 모자란 것도 셀 수 없도다(1:15).” 그럼에도 겉보기에 괜찮고 점잖을 떨고 교양 있게 굴면서 아닌 척 한다.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11:39).” 세상은 요지경이라. 각 지자체마다 볼거리 문화를 부추겨 서로의 엽기적인 행각을 문화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상품화한다. 그것으로 더 나은 삶의 질을 운운한다.

 

나는 아이에게서 느림과 더딤의 자유를 배우는 것 같다. 아이가 기도를 할 때면 더욱 귀를 기울여 그 말의 행간을 읽고 맥락을 살피느라 집중한다. 다 같이 집중하다 한 목소리로 아멘, 하면서 화답할 때의 안도와 평안과 감사가 감탄처럼 나온다. 어제는 어버이 날이었다. 이런저런 고마운 말 속에 평안을 바라고 빌었다. 결국 우리의 행함이 시간을 만들고 시간은 지정된 공간 안에서 유효하다. 평안이란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일에 휘말리지 않는 것이다. 주어진 시간 속에서 자유롭게 행동하며 살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평안하세요.’ 하는 인사는 그러므로 예사로운 게 아니다. 어쩌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아이의 느림과 더딤의 시간 속 같은 게 아닐까?

 

했던 말 또 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도 또 실수하는, 그러면서도 그 안에 내재된 영성은 그 어떤 영악한 자의 빈틈없는 실속보다 자유롭다. 조금 전, 여섯 시도 안 돼 뜬금없이 아이가 카톡을 했다. 오늘은 여덟 시 반에 가도 돼요? 책 좀 읽고 싶어요! 나는 아이의 뜬금없는 문자에 그래, 아침 든든히 먹고 와! 하고 답을 한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나는 모른다. 소위 아이의 의식의 흐름을 나는 주체할 수 없다. 엊그제는 유난히 바쁜 날이었다. 그래서 그랬나? 책 읽기에서 여유로움을 찾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이제 아이의 말이나 행동을 분석하지 않는다.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연연하며 시간을 쏟고 돈을 들이고 행동을 물릴 수 없다. 다만 그러는 중에도 하나님은 함께 하신다. 주께서 주도하신다.

 

날마다 모험인 것이다. 전날에 조금 반짝하더니 오후께 또 허리가 아파 끙, 하고 아내에게 짜증을 부렸다. 그래놓고는 혐오스럽다. 나는 나의 죄를 감당할 수 없다.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2:15).” 무심히 오고 가는 바람처럼 말과 말 사이에서 우리의 양심이 일깨운다. 지혜의 소리를 듣게 한다.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며 내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1:23).” 순간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이다.

 

돌아가는 세상 이야기가 어찌 남의 이야기이겠나? 정작 남의 잘못을 잘도 알면서 자신의 잘못은 모르는 게 우리의 한계다. 우리는 우리보다 강한 자의 도움이 필요하다.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11:21).” 내가 아이를 건사할 수는 없다. 나 하나도 늘 끌려 다니는 형국인데. 그런 가운데 우리가 주고받는 인사에서 평안하세요!’ 하는 말보다 간절하고 절실한 게 또 있을까? 부디 스스로 어쩔 수 없는 일에 휘말리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자신들이 주체할 수 없는 것에 얽매이지 않기를 비는 일이다. 그 시간과 공간이 자유롭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또 그만큼 시간을 줘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평안하려면 좀 가만있어야 한다.

 

온통 부유물이 떠다니는 영혼을 잠잠히 있어 맑아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일이다. 나는 아이의 정신지체장애가 늘 새로운 교훈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낀다. 예전에 어디 특수학교 아이들을 자주 만났던 경험이 큰 도움이 된다. 모든 장애는 열등한 만큼 열악하지만 발칙하기도 하다. 순발력이 뛰어나서 유머 감각이 대단하다. 자빠져서 웃음으로 농담을 던지는 경우는 댈 것도 아니다. 슬픔을 슬픔 그대로 두지 않는다. 고통을 고통스럽게 놓아두지 않는다. 가족들로부터 버려지고 사람들에게 치이면서 아이들이 터득한 놀라운 영성은 자신을 그리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과 직접 소통하는 것이다. 우쭐하지 않는다. 그것을 보란 듯이 자랑하지도 않는다. 그저 생활이다. 일상인 것이다.

 

이른 아침, 아이의 뜬금없는 카톡은 그래서 나를 배시시 웃게 한다. 일찍 글방에 와서 책을 읽고 싶다고? 녀석의 능청에 풋, 웃음이 난다. 정작 책을 주면 510분도 집중하지 못하면서! 기억력은 3초라 금방 말하고도 까먹기 일쑤다. 8시 반까지 갈게요, 하면 나는 그 시간 전에 가 있어야 하는데 녀석은 오는 시간이 10시든 9시든 중요한 게 아니다. 왜 아침에 일찍 눈을 뜨기 무섭게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그래, , 하고 호응하고 답하고 그 자리에 같이 있어주는 게 일이다. 예전에 특수학교 아이들도 그랬다. 무얼 준다고 한 말은 기가 막히게 기억하면서 자신이 무얼 준다고 한 약속은 까맣게 잊곤 하였다. 그러면서도 바짝 붙어 앉아 밀어내고 걷어차도 장난으로 받아 넘겼으니.

 

가끔 내 인생 하나가 거대한 퍼즐 같다. 그땐 그게 뭔지 몰랐는데, 그때 그 경험으로 오늘의 나는 아이를 마주한다. 내가 겪고 사는 어려움과 고통으로 짐작이나마 아이의 서러움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 말씀을 그렇게 다시 읽었다. “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25:4).” 주어진 일에 족한 것이다. 손해라 여기는 것들이 오히려 자유였다. 밭에 두고 온 한 뭇의 묶음을 가질러 가지 말라고 하셨던 어제의 말씀과 연결이 된다.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게 평안이었다. 평안하세요! 하는 인사는 그렇게 단순하고 순진한 기도였다. 어쩔 수 없는 일에 연연해하지 마세요!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일로 시간을 허비하지 마세요! 오늘 내게 두신 일을 하세요!

 

이는 그 단서가 하나뿐이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63:3-4).” 주의 인자하심이 나의 생명보다 귀하다. 내가 죽는 게 낫지 주의 인자하심을 잃고는 살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평안하세요!’는 우리의 주인 되신 주를 송축하며 사세요! 하는 인사였다. 다만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는 일이다. 나의 자아실현을 위한 삶이 아니었다. 얼마나 우리가 모순덩어리인지, 매주 쏟아지는 뉴스마다 아우성이었다. 너는 네 주머니에 두 종류의 저울추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넣지 말 것이며 네 집에 두 종류의 되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두지 말 것이요 오직 온전하고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온전하고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 날이 길리라(25:13-15).”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63: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