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을 받을 것이니라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신명기 28:6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
시편 66:9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은 주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좋고 좋은 것이라 해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앞에 금은보화가 무슨 가치가 있겠나? 나는 아이를 통해 ‘우리의 장애’가 어찌하여 선물일 수 있는지를 배우고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는다. 탐구하지 않고 지적으로나 정서적으로 회의하지 않는다. 어린아이처럼 받아들임으로 하나님은 온전히 저에게 주어진다. 그냥 저 아이의 것이다.
꿈을 꿨어요. 아이의 말에 그 새 잠들었었나? 하고 되물었다. 그게 아니고 식사 기도를 하다 주위에 아픈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였어요. 목사님을 위해서도 기도했어요! 나는 아이의 말을 탐구하는데 아이는 그냥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리 느껴져서 그리 말하고 그리 구하고 그리 찬송하는 것이다. 아이는 장애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에 증인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토요일 오전 아이가 글방에 온다는 것을 토요일은 엄마와 시간을 보내도록 하여 대신 카톡을 하고 통화를 하였다. 전에 읽었던 헨리 나우웬의 <아담>(IVP)과 장 바니에의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IVP)를 읽었다. 장 바니에는 두 명의 정신지체장애인과 공동생활을 하다 라르쉬 공동체를 이끌었다. 헨리 나우웬은 거기서 ‘아담’을 만나 우리 곁에 오신 예수를 연상하였다. 그리고 요즘 나는 전에 읽었을 때와 달리 저들의 책에서 아이를 다르게 이해하고 ‘우리의 장애’가 값진 선물이 되었다는 것을 크게 공감하고 있다.
어버이날 겸 아내 생일을 기념하여 딸애가 점심을 샀다. 그리고 같이 천천히 걸어서 소래포구를 다녀왔다. 토요일 오후에는 사람들이 와글거렸다. 나는 길게 늘어선 차량과 사람들로 꽉 찬 길을 돌아서 서둘러 돌아왔다. 나의 불안이 아이를 이해하는 데 더욱 한 몫을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읽었던 한 줄의 문장을 내내 되뇌며 걸었다.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주어지지 않는다.' 믿음도 그러한 게 아닌가? 내 안의 의심과 회의와 갈등과는 상관없이 이미 받아들여지는 것이 믿음이지 않을까?
그래서 성경도 믿음을 선물이라 하셨다.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행 11:17).” 그러니까 말이다.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는가!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2:38).” 곧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롬 5:16).”
나는 이 선물을 달가워하지 않으며 성장했다. 그리고 언제부터는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젠 값지고 소중하다. 어떤 보배보다 귀하다. 그것으로 아이를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주를 섬긴다. 내게 두신 한 날을 소중히 여기며 혼자 있는 시간도 사랑한다. 왁자한 거리에서 나는 순간 두려움에 떨며 얼른 서둘러 그곳을 피할 수밖에 없는 처지이지만 그러므로 방종하지 않는다. 이내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신 28:6).”
오늘 말씀은 감사와 두려움을 동시에 던지는 것 같다. 복과 저주가 내 앞에 있다.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19).” 엄연히 나는 그럴 수도 있었는데, 절대 그리 되지 않도록 하신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시 66:9).” 나는 이를 확신하고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우리의 장애’를 선물로 받아들인다. 받아들임으로 주어지는 것이 더욱 많고 귀하였다. 누구는 신체적으로 누구는 정신적으로, 누구는 실패로 누구는 사람으로, 누구는 낙심으로 누구는 고충으로.
그 복의 근원은,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신 28:2-6).”
또는 저주의 근원으로,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를 것이니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또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소와 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15-19).”
말씀에 순종하느냐 순종하지 아니하느냐의 문제였다. 그런데 그 순종의 단서가 단지 형통하고 잘되고 풍족한 것이 아니다. 오늘 시편은 이를 근거로 ‘우리의 단련’을 제시한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우리를 끌어 그물에 걸리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매어 두셨으며 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시 66:10-12).”
이 목소리는 바울의 목소리와 닮았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나의 아버지가 돌이켜 주의 길을 걸을 때 그 가슴에 깊이 못이 박혔던 말씀이라던 목소리로도 들린다. 어찌 누군들 장애를 선물로 여기겠나? 고통과 어려움을 달가워하겠으며 고단하고 피로한 인생을 복으로 삼겠나! 한데 우리가 그런 가운데서도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은,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이제는 ‘앎이로다.’
곧 오늘 나의 관심이 나의 고통이 아니고, 또 아이의 장애도 아니고, 그로 인한 주변 사람들의 어려움도 아니다. 오히려 그와 같은 인내가 만들어내는 연단이다. 주를 바라는 손짓이 달라지는 것이다. 한 번 한 번 더해지는 어려움이 우리의 자세를 교정하고 바꾸어놓는다. 전에는 불평과 투덜거림이었던 것이 어느 순간 주를 바라는 통로가 되었고 주의 사랑을 알리는 신호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 아이와의 뜬금없는 대화를 마다하지 않는다. 문법적으로 맞지 않고 앞뒤 맥락이 없는 저의 글을 사랑한다.
그것으로 더욱 주의 사랑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내가 원해서 취하고 이루어낸 결과가 아니다. 나는 그럴 가치도 없는데 나로 그리 귀히 여겨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나는 휘적휘적 페달을 밟고 자전거를 굴리며 생각하였다. 어느덧 한 생을 이만큼 살아보니 어느 것 하나도 주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다. 그 중에 ‘나의 장애’가 참으로 귀한 선물이었다. 그것으로 아이를 이해하고 주를 더욱 사랑한다.
“온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낼지어다 그의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찬송할지어다(시 66:1-2).” 이를 어찌 억지로 시킨다고 할 수 있겠나? “와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을 보라 사람의 아들들에게 행하심이 엄위하시도다(5).” 나는 보았고, 그의 선물로 살아간다. 곧 “그가 그의 능력으로 영원히 다스리시며 그의 눈으로 나라들을 살피시나니 거역하는 자들은 교만하지 말지어다 (셀라)(7).” 그러므로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9).”
이에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의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2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