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

전봉석 2019. 5. 13. 06:59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신명기 29:29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

시편 67:2

 

 

우연처럼 아이의 글을 읽었다. 일주일 전에 올린 거였다. 죽고 싶다. 이렇게 살려고 산 게 아닌데, 하는 내용이 계속 맴돌았다. 예배 전 찬송을 하는데도, 말씀을 전하면서도 어떤 안타까움이 눈물처럼 고여 떠나지를 않았다. 어떻게 할까? 전화나 문자를 할까? 아는 체 하려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그냥 둘까? 모르는 체 해야 할까? 혼자 묻는 질문이 늘어날수록 답이 없었다. 예배를 마치고 성경공부를 하고 집에 돌아오자 맥이 풀렸다. 순간 어지럼증이 일어 주체할 수 없었다. 위경련이 온 건지, 내가 왜 이러지? 싶게 어지러워서 누워있다 일찍 잠이 들었다.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29:29).” 말씀 앞에 가만히 앉는다. 마음을 두고 서로 친밀하게 보낸 시간이 길었다. 유독 마음이 가는 아이 둘이 하나는 그러했고 하나는 저러했다. 다리에 마비가 와서 도로 집에 처박혔는데 그 원인을 찾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저 심리적인 요인인데 그건 그렇게 말해봐야 소용없는 일인 것이고. 하나님은 일을 감추신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25:2).” 우리로 말씀만을 의지하게 하시려는 것임을 성경은 알게 하신다.

 

우리는 죄를 이길 수 없고 사탄을 이길 수 없고 죽음을 이길 수 없듯이 율법을 감당하여 이길 수 없다. 당대에 의인으로 흠이 없던 자 욥이 증언하였다. “진실로 내가 이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9:2).” 누가 감히 자력으로 주의 성전에 거하며 주의 장막에 머물 수 있을까?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15:1).” 아무리 선을 구하고 의를 행한다 한들,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64:6).”

 

우리의 죄악이 바람처럼 우리를 몰아간다. 우리는 쓸려갈 따름이다. ,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67:2).” 오늘도 말씀 앞에 앉아 주체할 수 없는 나의 마음과 생각과 육신의 일을 주께 고한다. 주가 아니시면 우리는 살 길이 없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7).” 나는 그저 염려하고 한탄하고 자책하며 이도저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으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 딸 같은 아이였다. 자기는 선생님 둘째 딸이라며 붙임성 있게 굴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아무런 영향력도 끼치지 못한 것일까? 한 아이의 말처럼 나의 존재감이 그리 크지 않다는 데 위축되어 나는 더 가까이 다가가려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긴 저들 눈에 나의 빙충맞은 육신이 무슨 도움이 될까?

 

이내 먼저 연락을 하려던 것을 미루었다. 다그쳐 아는 체 하기에는 조금 뜬금없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런가. 몸이 힘들어한다. 왜 어지러운지, 속이 울렁거리는지 알 수가 없다. 오늘은 애도 올 텐데, 아파도 오늘 말고 내일 아파야 할 텐데.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지면서 안정제를 먹어야 했다. 나의 병적인 생각은 불안을 끌어들여 막돼먹은 걱정을 일삼는다. 그런 내게 오늘 말씀이라니! “주께서 사십 년 동안 너희를 광야에서 인도하게 하셨거니와 너희 몸의 옷이 낡아지지 아니하였고 너희 발의 신이 해어지지 아니하였으며 너희에게 떡도 먹지 못하며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못하게 하셨음은 주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29:5-6).” 지난 나의 생활이 모두 주의 은혜였으니, ‘주는 나의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를 어찌 전하여 아이들로 하여금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할 수 있을까? 나는 생각뿐이다. 말뿐이다.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

 

뭐라 하면 이젠 그냥 그러려니 하는 아이들에게, “곧 그 큰 시험과 이적과 큰 기사를 네 눈으로 보았느니라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3-4).” 곁에서 서로 같이 살아온 것을 지켜보았으면서도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주지 않으시면! 나는 아이와 성경공부를 하며 저들 아이들에 대해 기도를 부탁하였다. 그래도 같이 글방에서 청소년시절을 보냈고 이제 누구는 여기 남았고 누구는 떠나갔으니. 우리에게는 기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 감사하였다. 그래서 아이에게는 사실대로 말하고 특별히 기도해줄 것을 당부하였던 것이다. 또한 우리가 어찌 행해야 할지, 올바른 길로 인도하여 주시기를.

 

아이가 돌아가고 맥이 풀려 어지럼증이 일었던 것일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셀라)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67:1-2).” 나는 기도한다. 주께서 열어 보이시지 않으면 알 길이 없는 나로서는 구하여 주의 도우심을 바랄 따름이다. “내가 허물이 없으나 그들이 달려와서 스스로 준비하오니 주여 나를 도우시기 위하여 깨어 살펴 주소서(59:4).” 이런저런 사연을 추론해볼 수 있고 우리의 형편과 사정으로 이해도 할 수 있지만, 그런들! 이렇게 살고 있을 줄은 몰랐다는 아이의 글이 내내 나를 어지럽힌다. 그러게 좋다고 서로 동거하는 일에 대하여, 새삼 피우기 시작한 담배에 대해서도, 자신의 아집과 판단을 주장하며 말씀을 밀어낼 때에도, 얘야 그러지 마라. 그러했던 나로서 피치 못하게 광야 길을 돌고 돌았던 세월에 대해 일러준다고 하였지만 소용없는 소리였다.

 

가보고 후회하나 안 가보고 후회하나 그럴 바엔 가보고 후회 할래요, 하는 아이에게. 자기 인생에 그리 큰 영향력이 없는 사람이라며 대놓고 밀어내던 아이에게. 나는 어쩌면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발을 동동 구를 뿐이다. 그저 그러려니 하고 괘씸해하고 말면 그만인데, 아랑곳없이 내 속을 불편하게 하시는 이의 의도를 나는 알 수가 없어 무얼 어찌 해야 하는지 몰라 애만 태운다. “주께 피하는 자들을 그 일어나 치는 자들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사랑을 나타내소서(17:7).” 나는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께 피하리니, 갈 곳이 내겐 없다. 마음만 쓰일 뿐인데, 설마 그래서 어지럽고 온 몸이 아픈 것은 아닐 테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67:7).” 나는 오늘 시편의 말씀을 되뇐다. 결국 땅의 모든 끝이 주를 경외하게 하실 것이다. 아직 끝나지 않은 길이다. 나는 아이들을 생각하며 나의 연약하고 보잘것없음으로 더욱 주를 바란다. 아는 체 하며 또 이런저런 소릴 해봐야 무슨 소용일까.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3).” 하나님이여, 주가 하소서.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5).” 그리하여 저들 땅 끝에서 주를 경외하게 하소서땅이 그의 소산을 내어 주었으니 하나님 곧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로다(6).” 이를 알기까지 저 아이들이 너무 먼 길을 돌아가게 하지 마옵시고, 저들이 겪는 길들을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이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