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손을 얹으소서
온 이스라엘과 그 장로들과 관리들과 재판장들과 본토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 제사장들 앞에서 궤의 좌우에 서되 절반은 그리심 산 앞에, 절반은 에발 산 앞에 섰으니 이는 전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하라고 명령한 대로 함이라
여호수아 8:33
주의 오른쪽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인자에게 주의 손을 얹으소서
시편 80:17
시간이 아물게 한다. 자연적인 치유능력이 대단한 것 같다. 우리의 육신도 마음도 생각도 그 복원력이 탁월하다. 애써 수고하는 것보다 때론 가만두는 것이 훨씬 더 나을 때가 있다. 어디서 읽었는데 산불이 났던 자리에도 사람이 수고를 하여 가꾸고 복원하던 곳보다 자연적으로 그냥 내버려둔 곳이 훨씬 빨리 재생하여 본래의 모습을 찾았다고 한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그 자체로 놀라운 것이다. 어디가 아플 때, 또는 무슨 일에 신경 쓰고 집중할 때 전에는 보지 못하였던 세계가 드러나는 것 같다.
아무래도 주일인데, 계속 아프면 안 되겠다 싶어 물리치료를 받으러 갔다. 병원에 가면 늘 아픈 사람 천지다. 토요일 진료는 더욱이 복잡하여 온통 저마다의 고통으로 일그러져 신음하고 있었다. 아프던 어깨는 건드렸더니 더 아팠고, 만일에 그 팔을 쓰지 못하면 산송장과 같겠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찜질을 하고 고주파를 쐬고 초음파 전기 진동으로 건드리니 안 아프던 곳까지 통증이 오는 것 같아 괴로웠다. 한 시간 남짓 치료를 끝내고 나오자 아내와 딸애가 왔다. 실은 <알라딘> 영화를 보려고 했는데 보리밥으로 점심을 먹고 돌아왔다. 그러는 동안 넌지시 딸애에게 선을 보겠나, 물었더니 한결 자유로워진 마음으로 이런저런 말까지 덧붙이며 활력을 되찾았다. 식중독으로 고생했던 아들도 좀 나아졌다며 연락이 왔다.
나는 교회로 다시 올라가 쉬었고 아내와 딸애는 토요일 거리를 쏘다녔다. 가만있으니 살 것 같은데 산다는 일이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는 일이겠나. 그럼에도 얻게 된 한 가지 사실은 그렇게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것이다. 이 땅에서의 모든 게 유한하다는 데 안도하였다. 곧 들어갈 본향이 있다는 데 감사가 느껴졌다. 고통으로 일그러졌던 순간도 그것이 영원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기쁘고 즐거운 일도 그리 지속되는 게 아니어서 도리어 나았다. 나는 중2 아이에게 카톡을 하여 그러저러한 마음은 알겠으나 이러저러하니 좀 더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조석 간으로 변하는 이 땅에서 그래도 함께 한 시간이 소중하여서 말이다. 결정은 본인이 하겠으나 나는 마음이 쓰여 그리 전달하였다.
이에 하루는 일용할 것으로 적당하였다. 고통도 쉼도, 안도도 이에 드는 마음 씀도, 수고도 자유도 모두가 그만하여서 감사하였다. 일찍이 모든 것들이 그러하였다. “온 이스라엘과 그 장로들과 관리들과 재판장들과 본토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 제사장들 앞에서 궤의 좌우에 서되 절반은 그리심 산 앞에, 절반은 에발 산 앞에 섰으니 이는 전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하라고 명령한 대로 함이라(수 8:33).” 이는 ‘하라고 함이라.’ 돌아보면 모든 게 적당하고 적절하였다. 엊그제 묵상한 말씀처럼, “사람이 힘센 자의 떡을 먹었으며 그가 음식을 그들에게 충족히 주셨도다(시 78:25).”
이 떡은 나의 수고에 비하면 과분하고 애써 얻은 결과로 보기에는 송구하다. 일용하다는 것,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 6:11).” 나는 어제 하루 이 의미가 새삼스러웠다. 우리가 수고하여 얻는 결과의 것이 아니었다. 딸애가 마음이 편안해져 이제 그 앞에서 선 자리를 운운할 수 있고, 우리의 육신은 고통스러웠다가도 그만한 힘으로 지탱할 수 있도록 ‘오늘 우리에게’ 주신 것이었다. 주기도문에는 일곱 번의 청원이 나오고,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세 번 언급되는데 하나님의 거룩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기를 기도한다. 기도는 그저 내가 원하는 것을 빌고 바라는 게 아니었다.
다만 그때마다 같이 활동하는 세력에 대한 경고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8-9).” 가령 나에게 두신 불안증은 이를 여실히 확대 재생산하여 느끼게 하면서 가중시키는 것이다. 그러니 예민할 수밖에 없다. 지레 겁을 먹고 지레짐작으로 상황이나 사람을 판단하려 들고, 일어나지도 않은(않을) 예기불안을 가동시켜 병적으로 두려움에 떨게 한다. 이처럼 다 알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것이었으니, 이 또한 유용하니까 내게 두시는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는 하루였다. 연약함을 알면 알수록 온유하여진다. 그 심령이 가난해진다. 애통하는 것이다.
불안이 가중될 때 나의 모든 신경세포는 주를 바란다. 도우심을 구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름을 느낀다. 살려주세요, 하는 애원이 저절로 튀어나오는 것이다. 그런 마음에서 긍휼히 여기심을 누리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도 취한다. 그래서 뜬금없이 중2 아이에게 ‘그렇게라도’ 마음을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내가 괴로우니까 저로 인하여 애통해하는 것이다. 이것이 긍휼이었다. 괘씸하고 불쾌하고 배은망덕하여 ‘내가 저한테 어떻게 했는데?’ 하는 서운함이 들끓지만 화평을 구하는 것이다. 마음이 청결하여진다는 것은 하나님만 보는 것이다. 그 애 때문이 아니라 그 애를 내 안에 두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는 일이었다. 한참 뒤, ‘생각해볼게요!’ 하는 짧은 답이 건너왔을 때의 황망함이라니.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다는 것은, 그 정도까지도 그럴 수 있다고 저희를 이해하고 용서하고 나를 다시금 돌아보는 일이었다. 말은 이렇게 해도 나는 마음이 상했고 화도 났고 속상했으며 억울하기도 하였다. 대놓고 박해를 당하는 시대를 살지는 않는다. 자처하는 것이다. 의를 위하여 아이의 싸가지 없는 태도에 불쾌하고 감정이 상하면서도, 그래서 주를 바라는 일! 끙, 하고 통증에 겨워 돌아누우면서 하나님 아버지! 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에서도. ‘기뻐하며 즐거워하라.’ 이를 입증하는 하루였다. “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시 68:3).” 이는 예수님이 가르치신 팔복의 키워드였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2).”
이런 몸으로, 그런 여건에서, 저런 지경에서도, 종종 하루의 일용할 고통과 만족과 여러 뒤섞인 감정들 중에서도, 그럼에도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는 것이 복이었다. 마치 해변으로 놀라가자고 하는데도 집 앞 시궁창에서 노는 걸 더 좋아하는 어리석음처럼 때론 나의 감정이 또는 만족이나 고통이 수렁 같을 때도 있지만.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13:44).” 그래서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5:30).” 그렇듯 내가 나를 도려내는 고통이라 해도 더 나은 것을 위하고 바라는 것이었다.
한 날 한 날이 일용할 것으로 일용하였다. 기쁨이란 그렇듯 잔인할 정도로 진지하였고, 무모할 정도로 벅찬 것이다. 그게 뭐라고 가진 걸 전부 포기하면서까지 취할 것이며, 백체 중 하나를 없이하면서도 얻을 것인가.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새삼 귀하게 다가오는 하루였다. 이것도 내게 지우신 십자가다. 이때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25).” 나의 이런저런 모든 여건과 사정과 상황이 그러므로 일용하였다. 주의 손을 내게 얹으신 하루였다.
“주의 오른쪽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인자에게 주의 손을 얹으소서(시 80:17).” 시인은 이어서 다짐한다.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에게서 물러가지 아니하오리니 우리를 소생하게 하소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18).” 주가 나를 붙드시면 내게 어떤 어려움이 온다 해도, 구원을 얻으리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켜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1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