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이 있나이다
여호와의 종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을 치고 여호와의 종 모세가 그 땅을 르우벤 사람과 갓 사람과 므낫세 반 지파에게 기업으로 주었더라
여호수아 12:6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시편 84:5
한 날의 삶이 늘 다채롭다. 하는 것도 없는 사람 같은데 그 안에 두시는 마음이 항상 새롭다. 그때마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음이 복이었다. 뭐라 한들, 주께서 주셔야 이룰 수 있는 일이었으니, 안 믿는 자는 죽어도 못 믿는다. 오히려 이와 같은 믿음을 경계한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행 24:5).” 가령 바울을 두고 우리는 저의 가르침과 그 깨달음을 성령의 일로 보는데 누구에게는 그저 전염병과 같을 뿐이다. 우리는 다만 주를 바라고 그의 의와 진리를 따를 뿐이다.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벧전 3:13).”
한 쪽에는 ‘진리 추구’와 한 쪽에는 ‘진리’를 두고 어느 쪽을 바라냐고 물을 때 저들은 진리 추구를 삶의 가치로 여긴다. 왜냐하면 그렇듯 자기 의로 추구해 가는 쪽에 가치를 두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주셔야 하는 것으로 진리를 삼는다. 그래서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14-16).” 우리의 두려움은 다르다. 우리 안에 이 소망에 대해 묻는 자에게 대답할 말을 준비하며 산다.
아침에 아이가 일찍 올라와 글을 썼다. 다른 날보다 바로 복지관으로 가야 해서 11시 반에 점심을 먹여 보냈다. 가는 길을 검색하고 노선을 설명해주었다. 내 안에 두시는 이와 같은 마음의 출처는 주의 것이다. 나는 확신한다. 내 마음이 아니다. 중2 아이가 오지 않을까, 하고 내내 기다리던 마음도 말이다. 누가 어떻고, 왜 저렇고, 하는 데 드는 마음 씀은 주의 것이다.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내가 저를 위해 주를 바랄 것인가. 한 녀석은 그렇게 졸업 후 취업재수까지 하며 대기업에 입사했다. 그러나 말이 좋아 영업부서지 늘 하는 일이 업체 관리하며 아버지 나이뻘 되는 영업점 사장들을 상대로 술상무 노릇을 하는 꼴이다. 무슨 단합이니 무슨 회식이니 하면서 하루가 멀다 하고 술에 절어 산다. 현대사회는 접대 문화가 영업의 핵심이다. 저에게 진리니 복음이니 하는 소리는 그저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가 되었다.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마 23:35).”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오기까지, 그러므로 오늘 우리 사회가 이나마 은총과 긍휼 가운데 거하는 것일 텐데. 뭐라 말을 해주어도 그저 그러려니 할 뿐이다.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행 2:23-24).” 말씀 앞에 가만히 거할 수 있는 게 복이었다.
아등바등 다들 열심을 다해 산다. 그러니 애는 애들대로 어른은 어른들대로 그 삶이 고달프고 피곤할 따름이다. 엊그제 이틀에 거쳐 <행복 목욕탕>이란 영화를 보았다. 얽히고설킨 사람과 사람의 인연이 안타까웠고, 아옹다옹 다투며 시비하는 모습이 고단하였고, 서로를 받아들이고 새로 맺어가는 관계가 다채로웠다. 그렇듯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은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걸 내어준다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허사인 것이어서, 나는 요즘 거의 매일 ‘아이’와 같이 있으면서 아이만이 정상인 것 같아 놀랍다.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마 10:26).” 다들 잘 사는 정상인들 같지만 감추인 모든 것이 드러날 것이다.
오후께 친구와 통화를 하고 모처럼 이런저런 수다를 떨다, 내 안에 여전한 세상에 대한 그리움이 있다는 데 놀랐다. 신앙이 결코 달관(達觀)이 아님을 알았다. 우리는 결코 우리가 추구하는 진리로 사는 게 아니다. 주시는 바, 보이시는 것을 바라고 의지하며 살 뿐이다. 나는 이제 사소한 일에 집착하지 않고 멀리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고 여겼는데, 이런저런 남의 말을 별식으로 알고 낄낄거리는 내가 여전하였다.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잠 18:8).” 통화를 끊고 난 뒤 바로 부끄러움이 밀려와 회개하였다. 그런 것이다. 날마다 싸움이다. 안이한 신앙 여정은 없다.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이는 결코 막연한 설교가 아니다.
아차, 하는 순간에 휩쓸려가는 것이다. 누가 정치의 선두로 나서며 기독교가 연일 조명 받는다. 불교계의 반발로 사려 깊지 못했다며 앞으로 배우겠다는 저의 기사에 소름이 돋았다. 그게 우리의 한계가 아닐까? 신앙을 신념으로 여겨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추구해야 하는 것으로 삼은 게 아닌가? 무슨 드라마가 시작되면서 저들이 모여 고사를 지내고 돼지머리에 돈을 꽂고 절을 하는 게 문화로 읽히는 사회에서, 성경은 우리에게 들려준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 4:19).” 그러하여 그러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나약함으로 주께 고하는 일,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 5:29).” 이를 붙들고 사는 게 참으로 귀하였다.
설교 원고 초안을 잡고 관련 성구를 찾아가며 되돌아보았다. “너는 그들로 하여금 통치자들과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준비하게 하며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딛 3:1-2).” 범사에 우리가 나타낼 것은 온유함이다. 온유함이란 엄마 품에 안긴 아이 같아서, 나는 다만 하나님으로만 감사하고 만족할 따름이라.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행 5:32).”
오늘 시편의 말씀이 그러해서 소중하게 다가온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시 84:5).” 이를 아는 것,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1).” 내 안에 두시는 마음이 곧 선물이었다. 귀한 증거였다.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2).” 누구와 통화를 하고 이런저런 세상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정신이 번쩍 드는 일! 그래서 돈을 벌고 출세를 하고 승승장구 이 땅에서 부귀영화를 누렸다 한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3).” 이로써 감사가 감사하였다. 주의 제단에서 참 쉼을 얻는 일이었으니,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셀라)(4).”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