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전봉석 2019. 6. 5. 07:14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거기에 회막을 세웠으며 그 땅은 그들 앞에서 돌아와 정복되었더라

여호수아 18:1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시편 90:1

 

 

살면서 사는 날 동안에 항상 죽음을 염두에 두고 대비하며 사는 게 복이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90:12).” 나는 종종 말하길 정작 우리가 더는 꼼짝할 수 없는 지경에 놓였을 때, 곧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 과연 무엇을 붙들 수 있을까? 즐겨듣던 복음송가? 늘 바라고 구하던 기도? 성도와의 교제? 이내 죽음을 맞이하는 가장 고독한 때에 말씀밖에 더 있겠나? 스스로 자기 날 계수함을 배워서 지혜로운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면! 여기저기 속절없이 터지는 사건사고 가운데 갑작스레 죽음을 맞았을 저들을 생각하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붙들 수 있을까? 그 순간에 누구를 의지할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이제 남은 평생 같이 가는 동반자가 생겼다 생각하시라며, 의사는 혈압 약을 처방해주었다.

 

골골하면서도 친구는 주말 아침에 일찍 운동을 가고 요즘 자신이 어떤 식이요법으로 건강을 관리하는지 장황하게 설명하였다. 아무래도 이제 낚시도구는 처분을 해야겠다. 누가 돌아앉았고 어디가 아파서 날마다 병원 신세를 지고 산다는 둥 이런저런 말도 오갔다. ‘우리 날 계수함지혜로운 마음으로 등식하고 있는 오늘 말씀 앞에 여러 생각이 많아졌다. 사는 날 동안 과연 우리는 무엇을 붙들고 달려가는가?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3:10-12).” 부활에 이르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아버지가 보내온 히브리서 강해 원고를 교정보는데 이제 겨우 30여 장을 보았다. 문장을 정돈하고 다듬기는 어려웠다. 긴 구어체의 문장을 문어체로 바꾸는 데도 진력이 났다. 아버지와 통화를 하며 몇 가지 말씀을 드렸다. 두껍게 먹을 씌워 강조할 경우 문장부호를 남용하지 마시고, 문장은 짧게 쓰시고, 인용 성경 구절은 어찌 다루시고. 나의 말은 잔소리처럼 길어졌다. 아버지는 한참 듣다 나중에 원고를 가지고 설명해달라고 하시고는, 출판을 하려고 하는 건 아니니까 너무 애쓰지 말고, 천천히 해라. 나는 그런저런 말씀을 드리다 문득 무안한 마음이 들면서 감사하는 마음이 일었다. 일흔여섯, 목회 일선에서 은퇴하여 여기저기 어디 기웃거리지 않는 삶이어서 감사하였다. 모아놓은 재산이나 노후대책이 없는데도 무난하고 넉넉한 살림이어서 감사하였다. 무엇보다 그 무료한 시간이 이어지는 노년의 때에 말씀 붙들고 씨름하는 것이 나는 가장 감사하였다. 어디 조사에 따르면 노인의 대부분이 무료함으로 질식한다.

 

저마다 탑골공원에 모이고 경로당에 모여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무료하게 달래고 있는 것인데. 그래서 곁을 같이 하는 사무실 누구는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댄스동아리와 어디 산악회와 졸업한 고등학교 총동문회장을 맡아, 그야말로 여기저기 기웃거리느라 여념이 없다. 며칠 허리띠를 동이고 끙끙거리며 오가며, 나이 생각을 안 하고 무리했더니 탈이 났다며 앓는 소릴 하였다. 늙을수록 혼자 있으면 안 돼요. 자꾸 옛날 생각만 나고, 하나둘 또래가 먼저 떠나면 우울해지기만 해서. 그러니 움직일 수 있을 때 정신없이 바삐 움직여야 해요. 하며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그리 말할 때, 나는 저의 수고가 그리 바람직하지 않음을 말해주고 싶었으나 그만두었다. 또한 노인의 가장 큰 난제는 자기 말이 옳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 두 구절의 말씀을 음미한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거기에 회막을 세웠으며 그 땅은 그들 앞에서 돌아와 정복되었더라(18:1).” 우리에 두신 한 생의 땅을 정복하는 일에 대하여, 그것이 그저 죽어라하고 번 돈이면 뭐하고 한때 몸짱이니 건강을 과시하며 살았다 한들 뭐하나? 거기에 주의 전을 세웠던가? 우리는 우리에게 두신 생을 정복하는 게 아니라, ‘그 생은 그들 앞에서 돌아와 정복되는 것이다. 내 것이 아니다.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90:1).” 나는 나의 아버지의 남은 생을 응원한다. 학문이 높지 못하고 사회적인 이력이 어떠하지 못하다 해도 평생을 말씀 붙들고 살고, 이제 남은 생을 다해 말씀을 따라 글을 쓰고, 소박한 마음으로 목회하는 자식들에게 남겨줄 설교 원고로 삼으신다는 말에 감동하였다. 글을 좀 써봐서 알지만 책 읽기나 글쓰기는 고역이라. 더듬거리며 자판을 치고 미리 메모하고 준비한 자료를 들춰보며 생각을 집중하는 일은 고단하다. 고단한 데도 바로 그 고단함으로 즐거워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

 

누가 읽는다고! 어디에 유용하게 쓰인다고! 누가 알아줄 것도 아닌데! 그러나 그 과정이, 그러고 있는 시간이 가장 값지고 소중한 것임을 나는 이제 확신한다. 여가를 즐기고, 노년의 무료함을 달래며 어떠한 취미생활을 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며 여유롭게 즐겁게 여생을 다한다 한들? 결국 그 앞에 놓일 죽음은 혼자 가야 하는 길이다. 끝까지 이를 외면하고 미루고 늦추느라 기를 쓰고 사는 삶이 오히려 민망할 따름이다. 또한 불현듯 찾아오는 누구들의 죽음 소식을 접하면서,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90:12).” 이와 같은 바람이 얼마나 값지고 소중한가! 단지 내 몸이 내 몸이 아니고, 내 생이 내 생이 아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6-17).”

 

늙으신 나의 아버지가 틈틈이 골방에 앉아 말씀을 펼쳐 설교 원고를 정리하고, 열어 보이시는 계시를 따라 말씀을 연구하고 집필하는 일이 나는 참 귀하고 다행이다. 늙어서도 어디 정치적 야망을 놓지 못하고, 또는 무슨 보람과 업적을 기리며 죽을힘을 다해 나라를 구하겠다는 노력보다 백 배 천 배 값지고 소중하다. 하나둘 어디가 아픈 게 굳어지면서 묻지도 않았는데 위로랍시고 들려주던 의사의 말에도 나는 그저 풋, 하고 웃음지어 보일 수 있어 감사하다. 할 일이 없어 책을 읽는데 이제 그 책이란 게 전에처럼 소설이나 시를 찾아 낭만을 꿈꾸는 게 아니라 말씀을 풀어가는, 로이드 존스 목사의 글로 한말 또 하고 또 한말 또 하는 저의 설교가 읽힌다. 그러고 보니 내가 또 감사한 것은 어느 신학자의 새로운 주장이니 무슨 학설이니 하는 따위의 글에는 흥미가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누가 어찌 살아왔느니 하는 자전적인 이야기에도 말이다.

 

아버지에게 자서전을 권하려다 그만둔 것도 그 때문이다. 나는 나로 기억되지 않길 바란다. 이처럼 써서 모은 것을 출판할 생각도 없다. 무엇을 기려 기념하고 추모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젊을 때 무턱대고 승낙하였던 시신기증이나 장기기증은 참 잘한 일 같다. 내가 누구의 설교 글을 좋아하는 이유는 온통 그 안에 성경 이야기뿐이어서이다. 지루하고 따분한, 이미 다 아는 아버지의 설교 원고를 다시 읽으면서 틈틈이 교정을 보는 것은, 그것으로 무얼 어찌 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그 자체로 이미 충분하였다. 지금 쓰는 이 글처럼 쓰고 버려져 잊힌다 해도 무방한 것은, 이 순간만큼은 없어질 수 없는 영존하신 이 앞에 올려지는 것이었으니! 족하다. 그것으로 이미 충분하였고 과분하였다.

 

결국 혈압 약을 먹게 됐다는 말에 아내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나의 몸으로 생을 마주한다. 늙음은 단순히 낭만이 아니다. 그럼에도 화평을 누린다는 이 사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5:1).” 이는 엄연한 구별이다. 아무나 누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에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5:2).” 사랑을 받았어야 그 사랑 가운데도 거한다. 이런 글이 뭐가 재미있겠나싶다가도 어느 때부터 이런 글만 읽히는 것이었으니, 참 그 복이 내게는 귀할 따름이다.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90:1).” 고로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12).” 이는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2).” 앞서 모든 게 주의 것이라.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4).” 결국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10).” 그러므로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1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