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하니라
사사기 8:23
내가 평생토록 여호와께 노래하며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시편 104:33
내가 살아서 살아가는 날 동안에 내가 나의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기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 이러한 “나의 기도를 기쁘게 여기시기를 바라나니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로다(시 104:34).” 하는 오늘 시인의 기도가 내 것이기를. 곧 우리는 살면서 영적으로 벽에 부딪쳤을 때 또는 건강이 좋지 않아 어디가 아프고 힘들 때 비로소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렘 7:3).” 하신 말씀의 의미를 알게 된다. 그리하여 나의 몸이 주의 전이고, 살아서 삶을 다하는 것이 예배이며, 몸소 드려지는 성소였다는 것을.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모순된 일이지만 타락을 부추기는 것은 새로운 변화를 꾀할 때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까지 숱한 고초와 어려움이 따르지만 가장 어이없는 것은 잠시 안도하며 여유를 찾을 때이다. 그러할 때 ‘세상현자’는 다가와 ‘율법 선생’을 소개하고 그의 아들 ‘문화’를 알게 한다. 훨씬 타당하고 이치에 맞는 소리 같아서 ‘크리스천’의 가는 길을 뭉개고 어기적거리게 만든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새로 읽으며 그 의미가 참으로 신박함을 느꼈다.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0-21).” 말씀 앞에 붙들려 사는 게 복이다.
종종 우리는 죄를 질환이나 장애로 여겨 이겨내고 극복해야 하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고통이나 어려움을 피상적으로 여겨 ‘다들 그러려니’ 하는 정도에서 해석한다. 그런데 나는 자꾸 어디가 아프면서 또는 이 일 말고는 할 게 없어진 뒤에야 알았다. 건강하여 내가 뭘 어찌 할 수 있을 때는 몰랐다. 가령 한 아이는 자기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선생에게 ‘씨발’ 하고 욕을 했다. 아내는 참다못해 아이의 등짝을 후려쳤다. 벌써 몇 번째다. 아이엄마도 안다. 엄마에겐 손찌검도 한다. 아내는 아이를 야단치고 어르고 달래 또 그 기분을 풀어주었다. 나는 그러는 아내가 존경스럽다. 그 꼴을 못 보겠어서 나는 초등부 여자아이들 수업을 포기했다. 애도 자신을 어찌 할 수 없어서 그러는 걸 어떡해? 아내는 오히려 그 아이를 두둔하였다. 그리 저 아이를 품을 수 있는 것은 돈 때문이다. 아내는 솔직하였다. 고객이다, 생각하고 대하는 거야! 그럼 어떡해? 재차 물었다.
나는 어디가 자꾸 아파서 더 자주 더 가까이 주를 찾고 주의 이름을 되뇐다. 누구에게 말해주다가 나는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음을 고백하였다. 곧 우리의 절실함은 비로소 충실함을 맛보아 알게 한다. 제 성질에 못 이겨 선생에게 ‘씨발’ 하고 욕을 하는 아이를 품고 다시 또 용서하고 다독이며 위하는 것이 실은 돈 때문이라 표현한 아내의 절실함이다. 내가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만 의지할 수 있는 육신의 고통도 실은 다른 수가 없는 절박함 때문이다. 이것들이 우리로 충실하게 하는 것이다. 뒤집어보면 우리의 안이함은 적당한 여유에서 살만한 공간 가운데 빚어지는 타락이다. 엉뚱하게도 ‘뭐든 해보자!’ 하는 자기 노력이 신신학을 만들고 크리스천사이언스를 양성하였다. 지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신학과 이성적으로 만족할 수 있는 교리와 복음과 사상을 추구하는 쪽으로 말이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설득하지 않으신다. 양해를 구하지도 않으신다. 결국 하나님은 나와 일대일로 겨루시는 것이다. 그 갈등이 가혹한 것은 네, 하고 다른 데 정신이 팔려있을 때이다. 곧 영적 흉내만 내는 돌짝밭으로 그 척박한 영혼은 이내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그래서 완고함이란 스스로 부여하는 힘이다. ‘할 수 있어!’ 하는 자기주문인 것이다. 한데 성경은 그런 우리를 몰아세우신다.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다른 데 우리의 힘이 비축된 것이 아니다. “느헤미야가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느 8:10).” 싸워야 할 때 물러난다면 그 뭉개는 시간 동안은 갈등뿐이다. 좀 나을 줄 알았던 길에서 맴돌다 허송세월을 보내는 것이다.
하나님께 무엇을 바라고 부탁하는 삶이 아니다. 우리의 기도는 그런 게 아니었다. 오늘 기드온의 한 말이 깊게 울린다.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하니라(삿 8:23).” 곧 하나님이 하실 수 있게 그 자리를 내어드리는 일. 나의 공허한 감상과 낭만적인 꿈과 그렇듯 꿈꿀 권리를 과감히 포기하는 것. 안이한 신앙과 영적인 몽상과 때론 자아도취적인 신앙의 황홀경에서 깨어나는 일. 무슨 영적인 체험이니 치유니 은사니 권능이니, 이를 쫓아다니며 추구하는 나의 수고를 그만두는 것. 그렇지 않으면,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3).”
곧 우리의 가장 큰 난제는 우리의 열심이다. 나름의 수고다. 한다고 하는 노력이다. 완고함이란 자신의 돌짝밭을 한사코 개간하지 않는 일이다. 으깨고 뒤엎기가 힘들다. “그들이 밭을 지키는 자 같이 예루살렘을 에워싸나니 이는 그가 나를 거역했기 때문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4:17).” 곧 하나님과 대면하기보다 종교적인 열심으로 영성을 추구하는 게 더 쉽다. 종교인으로 사는 게 제자된 길을 가는 것보다 쉽다. 곧 우리는 종종 자신의 기질이나 재능이나 취향이나 성향을 들먹이며 하나님의 권능을 제한하려든다. 성향과 의지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다 깨질 때까지 하나님은 참으신다. 결코 나를 재촉하지 않으신다. 다만 기다리실 뿐이다. 고집 부리며 뚱해 있다가 ‘씨발’ 하는 아이의 등짝을 한 대 후려치는 아내의 손길처럼! “네 길과 행위가 이 일들을 부르게 하였나니 이는 네가 악함이라 그 고통이 네 마음에까지 미치느니라(18).”
자기 등쌀에 자기가 골병드는 형국이다. 자기애가 강한 시대다. 이를 부추기는 문화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그렇듯 나를 죽여 내가 죽기까지, 나로 개간하시고 갈아엎어 옥토로 만드실 때까지 하나님은 쉬지 않으신다. 부지런한 그 농부의 발소리에 내 영혼은 깨어나는 것이다. 나는 누구와 대화하다 오늘의 나의 어쩔 수 없음이 귀한 복인 것을 알았다. 아프니까, 없으니까, 필요하니까, 별 수 없어서! 우리는 좌절하는 게 아니라 비로소 주의 성소가 된다. 드려지는 예배의 하루가 되는 것이다. 종일 혼자 있으면서, 비 오는 날이라 어디가 자꾸 아파서, 마음은 까부라지고 몸은 고통스러워서. 나는 정말이지 할 수 있는 게 이제 주를 바라고 의뢰하는 것 말고는 할 게 없었다!
곧 “내가 평생토록 여호와께 노래하며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시 104:33).” 비록 쓸모없고 힘이 없어 하는 일도 없는 것 같지만 그제서야 하나님은 사용하신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조금은 알겠다. 그저 신세한탄을 하듯 팔자소관을 운운하며 어쩔 수 없이 꾸역꾸역 가는 길이 아니었다.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해 저 아이의 괴로움을 내 육체에 채우노라! 애도 어쩔 수 없어서 그러는 걸 어떡해? 하고 통회하며 주의 긍휼하심 앞에 아뢰는 아내의 기도처럼, 그런 것이다. 이 한 영혼을 위해 오늘 나로 여기에 두셨고 이런저런 어려움과 고통으로 내 몸에 채우게 하신 교회다.
‘자고로 슬픔은 혼자 찾아오지 않는다.’ “패망에 패망이 연속하여 온 땅이 탈취를 당하니 나의 장막과 휘장은 갑자기 파멸되도다(렘 4:20).” 알고 봤더니 엄마한테도 욕하고 심지어 엄마를 때리고 떼쓰고 억지를 써 자기 분을 이기지 못하였는데, 그것이 아이엄마의 성질이었다. 늘 다그치고 참견하고 몰아세워 윽박지르고 손찌검하며, 그리 아이를 키웠다. 저는 또 저의 남편에게 그리 대접 받고 살았고 실은 그 부모가 또한 그러하였다. 이제는 무슨 공식과 같아서 이상한 아이에겐 이상한 엄마가 있었다. 이상한 엄마의 남편은 이상했고, 저의 어린 시절은 온통 이상한 것투성이다. 패망에 패망이 연속하는 아이를 오늘 우리에게 보내시는데, 우리가 젊을 때 건강하고 힘이 좋을 때는 몰랐는데 우리가 절실하고 절박함으로 주밖에 의지하고 의뢰할 이가 없게 되어서야 알겠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는 심히 위대하시며 존귀와 권위로 옷 입으셨나이다(시 104:1).” 주를 의뢰하고 주만 의지하게 하시려고.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바람을 자기 사신으로 삼으시고 불꽃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3-4).” 오늘 우리로 그 길을 가게 하신다. 하여 “새들이 그 속에 깃들임이여 학은 잣나무로 집을 삼는도다(17).” 곧 “여호와여 주께서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그들을 다 지으셨으니 주께서 지으신 것들이 땅에 가득하니이다(24).” 이러한 고백이 오늘 우리의 것이 되었음을. 고로 “여호와의 영광이 영원히 계속할지며 여호와는 자신께서 행하시는 일들로 말미암아 즐거워하시리로다(31).”
내가 평생토록 여호와께 노래하며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나의 기도를
기쁘게 여기시기를 바라나니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로다
죄인들을 땅에서 소멸하시며
악인들을 다시 있지 못하게 하시리로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할렐루야(33-3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