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라
가시나무가 나무들에게 이르되 만일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너희 위에 왕으로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 하였느니라
사사기 9:15
그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라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은 마음이 즐거울지로다
시편 105:3
아이는 감기에 걸려서 오지 못했다. 나는 오후께 어깨가 너무 아파서 병원에 갔다. MRI를 찍어보자고 해서 그리하려다 질겁했다. 터널에 들어가는데 극한 공포심으로 순간 숨이 멎는 줄 알았다. 결국 식은땀을 흘리며 포기했다. 어깨에 무슨 주사를 놓았다. 밤새 고통스러워 잠을 뒤척거렸다. 어디가 아프다는 것은 가장 가까이 주께 나아가는 기회다. 끊임없이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된다. 그런 날이 있다. 뜬금없이 선생이 전화를 했고, 친구와 통화를 했으며 누가 부친상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친구는 대놓고 더 이상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공언을 하듯 말했다. 출석하는 교회 목사의 설교를 더는 들어주기 괴롭다는 소릴 더했다. 선생은 무슨 책을 출판하자며 말을 이어갔는데 나는 정중히 사양하였다. 늘 들으면 사는 게 죽겠다는 소리들뿐이다.
가시나무를 왕으로 모신 까닭이다. “가시나무가 나무들에게 이르되 만일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너희 위에 왕으로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 하였느니라(삿 9:3).” 그래도 좋다는 데야 별 수 있겠나. 병에 ‘걸리고’ 죽음을 ‘당하는’ 일에 대하여 대수롭지 않은 나의 친구와 선생이 안타까웠다. 나는 주변의 이야기에서 이처럼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께만 의뢰할 수 있는 나의 처지와 상황이 되레 복되었다. 아프다. 힘들고 지겨울 때도 있다. 화도 난다. 별 생각이 다 들 때도 있다. 그런데 그럼 그럴수록 나는 주를 찾고 주께 구하는 것이다. 저들 보기에는 내가 안 됐고 불쌍하게 여겨지는지 모르겠으나, 감람나무가 말한다. “감람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게 있는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나니 내가 어찌 그것을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한지라(9).”
곧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시 52:8).” 친구의 이야기에서 이해는 간다. 늙은 목사는 자꾸 정치적인 이야기를 설교에서 하는 모양이다. 설교가 신념의 선전도구가 된 것이다. 어딜 가도 넌 또 그와 같이 말할 거야. 목사가 싫다지만 실은 하나님이 싫은 것이지. 나의 말에 친구는 또 똑같이 말이 안 통한다는 듯, 네 목사님! 하고 말을 돌렸다. 선생에게 나는 목사가 아니라 여전히 문학도인 것이다. 출판사를 경영하면서 나름 날 위해 하는 말이겠으나 무슨 내용을 어디에 어떻게 출판을 해서 뭘 하겠다고! 나는 더 들을 것도 없이 정중하게 거절하였다. 돌아보면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고 귀하게 여기던 사람들이다. 긴 시간을 함께 했던 이들이다. 누구보다 서로를 잘 안다고 하지만 서로보다 서로를 모르는 사이도 없을 것 같다.
아픈 아이에게 여러 번 연락을 했다. 좀 어떤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나는 아이의 외로움이 안쓰럽다. 아프고 힘들 때 우린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야. 아이에게 말해주었다. 모름지기 다들 혼자 서는 날이 올 것이다. 어울려 함께 하는 이들을 자랑하며 그것으로 됐다고 여기는 친구와 선생이 안타깝다. 기어이 우리는 걸릴 것이고 당할 것이다. 더는 돌이킬 수 없는 때가 올 것인데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자신을 자부한다. 무화과나무도 거절하고 포도나무도 거절하였다. “포도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내 포도주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한지라(삿 9:13).” 당장 그게 나은 줄 알고, “이에 모든 나무가 가시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 위에 왕이 되라 하매(14).” 자신들을 찌르는 올무가 된 것을 저들은 언제쯤 알까?
모르겠다, 나의 처지가 되레 저들 눈에는 안쓰럽고 안타까울 것인데. 짜증나고 힘들어 괴로워하면서도 나는 이처럼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께 구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이것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 고통이 나의 영혼을 살린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나는 전심으로 주를 바라고 찬양한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이를 가장 실감나게 하는 때는 아플 때이다. 나는 MRI를 포기하고 식은땀을 흘리며 공포에 떨다 알았다. “패망에 패망이 연속하여 온 땅이 탈취를 당하니 나의 장막과 휘장은 갑자기 파멸되도다(렘 4:20).” 누가 죽음을 당하고 무슨 병에 걸리고, 이에 사로잡혀 더는 돌이킬 수 없는 때가 이를 것인데! 과연 그때에 저마다 무엇을 붙들까?
나는 내 입에서 탄성처럼 튀어나오는 주여, 하는 부름이 귀하였다. 아이가 말하길 기도하고 있어요, 하는 소리가 온당하였다. 누구는 저가 온전치 못해서 자신도 모르고 하는 소리라 할 것이고, 누구는 내가 병약하여 의존적으로 주를 부른다고 할 것이다. 아무렴 어떤가? 그래서 과연 ‘걸리고, 당할 때’ 저들은 무엇을 붙들 것인가? 끝까지 가봐야 아는 일이라면 이보다 더 두려운 게 있을까? 언젠가 임종을 앞두고 누가 한 말이 생각난다. 저는 암이라는 진단을 받았을 때 고상하고 우아하게 죽음을 맞을 것이라고 다짐했어요. 드라마나 영화에서처럼 나도 그럴 수 있을 줄 알았어요. 저는 이제 죽음을 문턱에 두고 두려움에 떨며 고백했다. 이제 와서 무엇을 의지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평생 믿는 사람으로 산다고 살았는데, 정말 하나님은 있을까요? 천국 같은 게 있을까요? 저는 지금 고통보다 의심이 더 두려워요. 그냥 이렇게 죽어도 되나요?
모두가 서야 할 그 자리를 예수께서 서셨다. 십자가는 다만 구원이다. 순교도,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방도도 아닌 구원 그 자체이다. 결국 모두는 혼자서 그 예수 앞에 서야 한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그 길은 고상하지도 우아하지도 않다. 영화에서 묘사하고 사람들이 꿈꾸는 그런 그림 같은 연출은 없다. 십자가는 구속이다. 이를 알고 저와 함께 에베소서를 읽은 것은 아니다. 나는 다만 성경에 있는 말씀을 들려주고, 저의 가는 남은 50일의 길에 동행하였다. 목사 안수를 두 번째 떨어지고 자포자기하고 있을 때였다. 모든 건 허투루 두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나는 밤새 끙끙 앓고 고통으로 쩔쩔매면서 선생을 생각하였고 친구를 위해 기도하였다. 내 처지가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하는데 저들을 두고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바라였다. 함께 어울려 하나님을 거역하며 살던 때를 떠올리며, 나는 용서 받은 자로서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저들을 위해 기도하였다.
부디 저들이 집요한 완고함이 주가 참고 기다리시는 날 동안에 깨어지기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때에도 내가 너희를 진멸하지는 아니하리라(렘 5:18).” 돌이켜 주의 용서를 구할 수 있는 자리에 이를 수 있기를. “어리석고 지각이 없으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이여 이를 들을지어다(21).” 나는 아파서 꼼짝도 못할 것 같은 어깨를 간신히 움직이며 이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한 자 한 자가 어느 때보다 소중하더니, 또한 견딜만한 힘을 주시는 데 감사가 드려진다. 이 땅의 모든 게 지나간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가. 고로 “그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라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은 마음이 즐거울지로다(시 105:3).” 이보다 더 소중한 게 또 있을까? 나는 이제 선생이 부여잡고 사는, 친구가 놓고 싶지 않아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더 나아가 저들 또한 거기까지다. 죽고 못 사는 사이란 없다.
오직 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자랑할 수 있는, 오늘의 나의 고통이 오히려 다행이다. 장마철이 다가오고 있으니 각오는 하고 있지만, 누구처럼 우아하게 또는 고상하게 나는 고통을 받아낼 자신이 없다. 그래서 주를 구하는 마음이 즐겁다. 그럴 수 있는, 예전의 내가 아닌 오늘의 새로운 나여서 다행이다. 아픈 게 일이라면 그 일을 사역으로 감당하면 되겠지. 고작 한 아이, 저 영혼으로 씨름하다 마는 목회라면 그 또한 천하보다 귀하다는데! 늘 돈에 웃고 우는 친구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었다. 평생을 죽을 맛으로 사는 선생에게 보여주고 싶은 소리였다. 더 힘들고 고통스럽고 별 볼일 없이 구차한 듯 이리 살 것이라 해도 나에게는 자랑할 수 있는 이름이 있었으니, “여호와와 그의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의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4).” 나는 다만 그의 얼굴을 구한다.
언젠가 우리 모두는 예수 앞에 서야 할 것이다. 누구는 종교적인 취향으로 살다, 누구는 낭만적인 현실에서 주를 바라다, 또 누구는 저주받은 고인물에서 나오지 못하고, 누구는 평생을 원수 마귀에게 둘러싸여 살다가. 만일 치유가 목적이고 구원이 목적이면 십자가는 실패다. 아무런 도움이 못 될 것이다. 다만 구원이라, 구속이라. 이를 세상은 내버린 것이고 우리는 주의 성품을 닮아가는 자리가 되었다. 이는 어떤 원칙이나 원리가 아니라 그 자체다. 그래서 나는 주의 도움이나 구원의 방법이나 치유의 손길을 바라는 게 아니라 주님을 바란다. 아프면 이 일은 선명해진다. 십자가면 된다. 주님이면 된 것이다. 곧 “그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라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은 마음이 즐거울지로다(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