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이스라엘의 곤고로 말미암아 마음에 근심하시니라

전봉석 2019. 6. 21. 07:21

 

 

자기 가운데에서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로 말미암아 마음에 근심하시니라

사사기 10:16

 

그러나 그들은 그가 행하신 일을 곧 잊어버리며 그의 가르침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내며 사막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도다

시편 106:13-14

 

 

악순환처럼 우리의 죄는 되풀이 된다. 불현듯 치고 들어올 때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는데, 이게 교묘한 것이라.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것이다. 어김없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3:5).” 나름의 이치와 설득이 그럴듯한 것이다. 아내와 친구도 그게 얼마나 좋은 기회냐며 나의 주춤거림을 딱하게 여겼다. 실은 선생이 또 전화를 하여 책을 좀 내자는 것인데 어떤 주제로 시 50편 수필 10편을 묶어 싣고, 선인세로 얼마. 우선 10편을 보내주면 계약금조로 그리 구체적인 제안을 하였다. 전날에는 그저 하는 소린가 싶더니 구체적인 구상까지 말하며 종용하는데, 이게 선뜻 거절할 수 없는 거였다.

 

가정예배에 앞서 그런 이야기를 하였더니 딸애도 그렇고 해보라고 한다. 좋은 기회(?)라는 것인데, 나는 이를 어찌 설명해야 할까? 주시는 마음이 썩 기쁘지가 않은 것이다. 또한 거기에 매달려 기를 쓰고 관심을 모아야 하는데, 그런들? 그것으로 떴다 하자, 그 또한? 만일 저이가 묵상 글을 모아 책으로 묶자했으면 모를까, 새삼. 모름지기 나는 그런 게 뭔지 잘 안다. 공들여 애쓴다는 게 말이 좋아 보람이지, 그러한 보람을 어디에 쓰려고? 선생은 한 걸음 더 들어가 운운하기를 네가 목사로 목회를 하는 데 있어서도 얼마나 좋은 기회냐? 내가 네 실력을 잘 아니까 이런 제안도 하는 거야! 하는 소리에 마음이 더 어려웠다. 전에 같으면 이를 칭찬으로 듣고 우쭐하였을 텐데, 안 믿고 주를 멀리하는 저의 입에서 목회를 운운하다니! 이를 가족들에게조차 어찌 설명해야 할지. 내켜하지 않자 아내는 대뜸 한심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1:16).” 왜 그랬는지 알겠다. 문득 <천로역정>에서 세속현자의 아들 문화의 지혜(?)를 떠올렸다. 선생 말은 하나도 틀린 게 없었다. 아픈 아이(!)를 소재로 또한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으로서, ‘공황장애를 모티브로 하여 우리 사회를 고발하고 그 현실을 비춰주자는 논리였다. 누구보다 잘 쓸 수 있고, 그렇듯 터널이 무너지는 현상에 사로잡혀 사는 입장에서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시대에 대해 논하는 것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겠나하는 것인데. 불신앙과 신앙은 간발의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나는 내 안에 두시는 불편한 마음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다들 말하길 좋은 기회라 하지만 다들 그것을 위해 발품을 팔고 말품을 팔아 밥벌이를 한다. 그러느라 주의 음성에 귀 기울이지 못한다. 여력이 없는 것이다.

 

잘 팔려 떴다 하자. 그것으로 돈이 되고 다 늦어 화제의 인물이 됐다 하자. 선생 말처럼 그것으로 목회에도 도움이 된다? 사람 그렇게 순수하지 못하다. 나는 그리 착하지 않다. “백성이 모이는 것 같이 네게 나아오며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으로는 이익을 따름이라(33:31).” 말씀이 나를 이끄시듯 정말 그게 주의 인도하심이면 더 편하고 자연스러운 마음을 더하실 것이다. 내가 애써 수고하는 것으로 목회를 이뤄 가시지는 않는다. 다만 나는 주목하기를,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으로는 이익을 따름이라.’ 나는 안 그럴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없다. 도리어 가장 빨리 변개하고 배교할 위인이다.

 

그들은 네가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하며 음악을 잘하는 자 같이 여겼나니 네 말을 듣고도 행하지 아니하거니와 그 말이 응하리니 응할 때에는 그들이 한 선지자가 자기 가운데에 있었음을 알리라(32-33).” 이런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을 보면 확실히 예전의 나는 아니다. 성경은 엄연히 타협하지 말 것을 분명히 하였다. “자식들은 나무를 줍고 아버지들은 불을 피우며 부녀들은 가루를 반죽하여 하늘의 여왕을 위하여 과자를 만들며 그들이 또 다른 신들에게 전제를 부음으로 나의 노를 일으키느니라(7:18).” 참으로 교묘한 것은 하나님을 운운하지만 사회를 등에 업고 문화의 길을 따라 세속현자의 말대로 하는 경우가 되겠다. 엄히 말씀하신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나를 격노하게 함이냐 자기 얼굴에 부끄러움을 자취함이 아니냐(19).”

 

오늘 아침, 생각이 많은 내게 말씀은 또 일갈한다. “자기 가운데에서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로 말미암아 마음에 근심하시니라(10:16).” 그래도 돌이켜 주께 호소하는 듯 하지만 우리의 곤고함이 오히려 주님을 근심하게 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러나 그들은 그가 행하신 일을 곧 잊어버리며 그의 가르침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내며 사막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도다(106:13-14).” 오늘 날의 악이란 대놓고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과 은밀하게 하나님을 능멸하는 일이 혼재되었다. 전자는 그 구분이 엄연하여 알겠는데 후자는 사람을 흔들기 딱 좋다. 나는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한 것이 화근이 되었음을 알았다. 내 안에 여전히 우쭐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여호와께서 여러 번 그들을 건지시나 그들은 교묘하게 거역하며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낮아짐을 당하였도다(43).” 이러한 말씀이 오늘 나의 마음에 울림이 된다는 것은 주의 음성이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실 때에 그들의 고통을 돌보시며 그들을 위하여 그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크신 인자하심을 따라 뜻을 돌이키사 그들을 사로잡은 모든 자에게서 긍휼히 여김을 받게 하셨도다(44-46).” 그러하였던 여정을 기억한다. 누가 어떤 책을 냈는데 내 생각이 났고 내가 훨씬 나을 것인데 저의 책이 석 주 만에 12만부를 판매하였다며, 선생의 부추김은 집요하였다. 그러자니 나는 또 그런 일에 마음을 둘 여력이 없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고전 11:27).”

 

말씀 가운데 붙들려 사는 일 외에 다른 데는 마음을 두지 말자. 혼자 그리 다짐하였다. 다들 뭐라도 해봐, 하는 소리는 나더러 어떤 성과를 내라는 소릴 텐데. 나는 목회를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어떤 성과로 승부를 보는 게 아니다. 나는 죽을 쒀도 상관없다. 밥이 되던 죽이 되던 엄연히 그것은 내 몫이 아니다. 주의 일이란 주의 성과다. 다만 나는 그가 두신 자리에서 두시는 일을 묵묵히 감당하면 될 일이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살후 2:11-12).” 나는 말씀이 두렵다. 성공하지 못하고 아무런 보람도 없이 죽을까봐 두려운 게 아니다. 보란 듯이 사는 게 목표도 아니다. 그런 마음을 거둬내시기까지 하나님은 얼마나 나를 오래 참고 기다리셨나?

 

저 애 하나로 족하다. 이 몸 하나로 벅차다. 결코 나는 성공적인 목회를 운운하며 어떤 미래를 꿈꾸지 않는다. 앞서간 믿음의 사람들 가운데 단 한 사람도 나는 그런 이를 보지 못했다. 브레이너드는 스물아홉에 인디언 선교사 5년 세월을 마감하고 폐렴으로 죽었다. 그를 간호하던 조나단 목사의 딸아이도 허망하게 폐렴에 걸려 죽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오스왈드 챔버스는 쉰 살이 되기 전에 죽었다. 저는 책 한 줄 남긴 게 없다. 하지만 나는 저의 묵상과 그 말들을 성경 다음으로 사랑한다. 그야말로 예수님은 서른셋의 나이에 아무런 성과도 없이 십자가에 달렸다. 선생의 눈으로 보면 모두는 실패하였다. 꿈도 펼치지 못하고 죽었다. 그런데 저의 죽음까지도 복음의 통로가 된다.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은 그 길로 다니거니와 그러나 죄인은 그 길에 걸려 넘어지리라(14:9).”

 

이런 일을 깨달을 수 있는 게 의다.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은 그리로 다닌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나는 그저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로 족한 것이다. 가장 큰 위로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는 것이다.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8:10).” 하게 하실 이가 또한 힘도 주실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세상을 기웃거리며 세속현자의 말을 따를 때 얼마나 경악하시는지 모른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16:15).” 더는 그리 살 수 없다. 그 길을 따라갈 수 없다.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그들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들에게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들이 나와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15:24).”

 

그러므로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사 여러 나라로부터 모으시고 우리가 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찬양하게 하소서(106:47).” 고로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양할지어다 모든 백성들아 아멘 할지어다 할렐루야(4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