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입다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육 년이라 길르앗 사람 입다가 죽으매 길르앗에 있는 그의 성읍에 장사되었더라
사사기 12:7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로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시편 108:1-2
모든 우여곡절 끝에는 죽음이 있다. 입다는 죽었다. 그의 딸은 앞서 6년 전에 죽었다. 입다가 죽고 입산이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다. 저는 아들 삼십 명과 딸 삼십 명을 두었다. 입산이 죽고 스불론 사람 엘론이 사사가 되었다. 엘론이 죽고 압돈이 사사가 되었다. 그에게는 아들 사십 명과 손자 삼십 명이 있어 어린 나귀 칠십 마리를 탔다. 압돈이 죽어 장사되었다. 불교에서 죽음은 열반에 들었다고 한다. 열반은 산스크리트어로 ‘너바나’다. ‘불어서 꺼진다’는 뜻이다. 모든 생명은 촛불과 같이 불어서 꺼질 날이 온다. 이를 예레미야의 문장으로 축약하면, ‘어리석고 무식하다.’
“사람마다 어리석고 무식하도다 은장이마다 자기의 조각한 신상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가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것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렘 10:14).” 사느라 애써 수고하는 것을 우상처럼 여겨 떠받들고 의미를 부여하지만 수치를 당하는 것은 이내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다. 하나님께는 숨길 게 없다고 성경은 이른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6-7).” 우리의 사귐은 인격적이다. 도구와는 사귈 수 없다. 다만 쓰일 뿐이다. 도구로의 사람은 자신의 죄에 대해 그리 심각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8).”
저들과 다른 우리는 찔림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이를 자백하고 용서를 구할 줄 안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9).” 안 믿는 이들에게 이런 우리의 행위는 미련하고 어리석어보일 뿐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10).” 고로 인격적인 사귐이란 우리 속에 그의 말씀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요즘 말씀을 보내어 우리를 치유하시고 다스리신다는 데 매료되었다. 곧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심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이는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시 107:20).” 나는 아들이 대사관에 재계약되어 필리핀에 더 머물게 되었을 때, 부디 이와 같은 말씀이 함께 하시기를 위해 기도하였다. 그냥 마음이 조금 이상했다. 싫지는 않는데 좋지도 않았다. 다들 잘 됐다 하고 아내까지도 좋아하는데 나는 자꾸 시무룩하였다. 보고 싶은데, 하고 입을 삐쭉거려봤자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갔다 와! 하고 딸애가 무심코 던진 말에 그러고 싶으나 그럴 수 없는 처지가 서러워서 눈물이 핑 돌았다. 부디 나의 마음에 “그의 말씀을 보내사 그것들을 녹이시고 바람을 불게 하신즉 물이 흐르는도다(147:18).” 그래서 나는 의연한 척 사는 사람을 더는 신뢰하지 않는다.
사는데 우려곡절 없는 사람은 없다. 서로 시시비비를 가리느라 허비되는 세월이 절반이라. 누가 옳고 그르고 하는 다툼이 얼마나 소모적인가 하는 것을 오늘 입다의 이런저런 사연을 통해 듣는다. 사는 데 있어 저마다 안 그럴 수 없는 문제라면 부디 너무 오래 치우치지 않기를. 먼 길을 돌아가지 않고 무모함으로 헛된 날을 더하지 않기를. 그것은 그저 황폐할 뿐이어서 “내가 산들을 위하여 울며 부르짖으며 광야 목장을 위하여 슬퍼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불에 탔으므로 지나는 자가 없으며 거기서 가축의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며 공중의 새도 짐승도 다 도망하여 없어졌음이라(렘 9:10).” 나는 마음이 그러저러한데 아랑곳없이 부산하게 돌아치는 세상에서,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마 23:38).” 모든 것은 지나가고 끝이 있다. 입다는 죽었고 저의 이야기만 남았다.
부디 나의 구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별의 영을 부어주시기를. “지혜가 있어서 이 일을 깨달을 만한 자가 누구며 여호와의 입의 말씀을 받아서 선포할 자가 누구인고(렘 9:12).” 세상은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고전 3:12-13).” 그러므로 오늘의 연단이 곧 우리의 인격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사귐이란 그와 함께 고난에 동참하는 일이겠다. 곧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고후 1:7).”
그리하여 저마다의 우여곡절은 불과 같아서 사르고 태워서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고전 3:14-15).” 이런 말씀 앞에 붙들려 오늘 내게 두시는 것의 의미를 묵상한다. 괜히 혼자 찔끔거리는 마음이야 누구에게 위로를 얻을 수 있을까? 그래서 하나님 외에 나의 서러움을 토로할 대상은 없다. 하나님과 관계 되지 않은 모든 일은 불행일 뿐이다. 설령 그것이 성공으로 출세로 명예로 이어져 삶의 보람을 제공한다고 해도, 입다는 죽고 입산도 죽고 엘론도 압돈도 ‘불어서 꺼졌다.’ 모든 끝은 하나로 모인다. 그러하다면 가장 현명하고 지혜로운 삶이란 어떤 것일까?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이는 바울의 문장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그리 들은 것이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그저 신세한탄으로 이어져 흐르는 생이 아니라, 이와 같은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으로 여겨 그의 몸 된 교회를 나의 육체에 채우는 일. 하루를 더해서 살아가는 일이란 그러하였다. 억지로 행복을 추구하는 일도 아니고 시늉하여 남부럽지 않게 사는 것도 아니었다. 부디 주의 말씀 아래 거하는 것. 세상에 현혹되지 않기를. 그 끝의 끔찍함을 아는 게 지혜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들을 밟으실 자이심이로다(시 108:13).” 우리가 우리의 대적을 무찌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여호와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양하오리니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보다 높으시며 주의 진실은 궁창에까지 이르나이다(3-4).” 이를 보고 듣고 느끼며 사는 날 동안 주의 말씀으로 살아가기를. 세상은 이를 알 수 없으니, “인자야 네가 반역하는 족속 중에 거주하는도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라(겔 12:2).” 그러니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주의 마음이 필요하여서,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로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 108:1-2).”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으로 ‘새벽을 깨우리로다.’ 이는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우리가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시며 환난 때에 우리의 구원이 되소서(사 33:2).” 하루하루 그 하루마다 주께서 나를 깨우치사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50:4).” 부디 이제 사는 날마다 말씀을 보내시고,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도울 줄 알게 하시기를. 그리하면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애 3:23).” 곧,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로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