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여호와께서 이를 행하셨나이다
그 여인이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 그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
사사기 13:24
이것이 주의 손이 하신 일인 줄을 그들이 알게 하소서 주 여호와께서 이를 행하셨나이다
시편 109:27
있어야 할 자리에 없었고,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했으며, 행하여야 할 것을 행치 않고 주저할 때에는 어김없이 두려움이 엄습한다. 오늘 본문에서 삼손의 아비 마노아를 보며 든 생각이다. 그때마다 들어야 할 것을 들려주고, 알아야 할 것을 알렸으며, 있어야 할 자리에 그를 불러 이르게 하였고, 두려워할 때는 지혜를 더해준 그의 아내를 보았다.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우리를 죽이려 하셨더라면 우리 손에서 번제와 소제를 받지 아니하셨을 것이요 이 모든 일을 보이지 아니하셨을 것이며 이제 이런 말씀도 우리에게 이르지 아니하셨으리이다 하였더라(23).” 이로써 “그 여인이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 그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마하네단에서 여호와의 영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하셨더라(24-25).”
때론 우리의 산만함과 주저함과 경솔함이 우리의 마음을 좌지우지하는 것 같지만 그런 우리의 마음보다 하나님이 더 크시다!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요일 3:20).” 얼마나 감사하고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말씀을 전하고 아이와 남아 성경공부를 하면서도 여러 번 되뇌었던 것도, 누구보다 내가 마노아 같은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때마다 의심이 회의가 갈등이 주춤거리고 주저하는 망설임이 들락거리는 게 나의 마음이지 않나! 그러하였고 그러하며 그러할 것을 나는 아이에게 솔직히 고백하였다. 그 대목은 에베소서 6장을 같이 읽고 성경공부를 할 때였다.
이 씨름은 나와의 다툼이 아니다. 괜한 갈등이 아닌 것이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그러니까 단지 개인의 성향이나 그렇듯 타고 난 기질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13).” 우리 힘으론 어림없다.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아이의 묵상글을 날마다 공유하면서 그 기도의 절실함을 알고 있었다. 하려고 하면 더 안 되는 게 신앙이다. 의식적으로 행동하고 생활하는 게 오히려 더 위험한 길이다. 오히려 자신도 알지 못하는 일이라. 영성이란 대놓고 그리 행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다만 우리는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14-17).” 깨어 있어, 말씀으로 허리에 띠를 띠고, 하나님의 의로 가슴을 보호하며, 말씀이 주는 평안으로 신을 신고, 그에 따른 믿음으로 방패를 삼아, 의심과 회의와 갈등을 소멸하고, 구원 받은 자로서의 투구를 쓰고, 성령의 이끄심으로 산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갖는 것이다. 늘 가까이 하여 묵상하는 일이란,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18).”
항상 곧 우리의 일상은 그러해서, “내가 입으로 여호와께 크게 감사하며 많은 사람 중에서 찬송하리니 그가 궁핍한 자의 오른쪽에 서사 그의 영혼을 심판하려 하는 자들에게서 구원하실 것임이로다(시 109:30-31).” 오늘 시편의 말씀이 부동의 자세를 분명히 하는 것 같다. 그런 거 보면 아이로 인해 아이가 많이 달라졌다. 늘 예배 시간에 늦던 건 옛말이고, 성경공부에 대한 열의도 시킨다고 하는 게 아니었다. 하필 주일 전날에 옥상에서 내려오다 큰일 날 뻔 하고, 그 일로 팔꿈치가 까지고 찢어져 여섯 바늘을 꿰맨 사고가 있었다. 종강을 하면서 친구들과 여행 가기로 한 계획이 무산되었다. 나는 잘 됐다고 말해주었다. 그렇잖아도 안 믿는 친구들과 며칠 여행을 간다는 것에 말도 못하고 어쩌나싶었는데. ‘그만하길 천만다행’이란 말은 은혜를 풀어 세속적인 언어로 서술한 것이다.
우리의 일은 다만 “그 여인이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 그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삿 13:24).” 하는 말씀에 축약된 것처럼 낳는 일이고 키우는 일이다. 낳고 자라면 주가 복을 주신다. 부디 말씀으로 바로 서가길. 하나님께로부터 귀히 쓰임을 받길. 안 믿는 가정에서 안 믿는 식구들의 믿음의 조상이 되고 주변과의 씨름에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맞서서 싸우기를. “이것이 주의 손이 하신 일인 줄을 그들이 알게 하소서 주 여호와께서 이를 행하셨나이다(시 109:27).” 내가 하는 일이란 그리 알려주고 들려주는 것이었다. 그런 거 보면 내 앞에 두시는 한 영혼으로 벅찬 일이다. 선생에게 적어 보낸 내용이 적절하였다. 목사 고시 때 면접에서 답한 말이 성령의 말이었다. 늘 되새길수록 내 몫의 충성이었다.
이제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고전 4:4).” 그러므로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2).” 그저 다만 행할 뿐이다. 주신 이도 거두실 이도 하나님이시다. 때론 불안과 주저함이 엄습하여, 이게 과연 맞나? 하는 회의와 갈등이 왜 없겠나! 정말 이러고 있어도 되나? 싶을 때 그때마다 어김없이 말씀으로 나를 붙드시니, 요한 사도의 웅변이 큰 힘이 된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8).” 행함이란 생각하고 따져 이치에 맞나 구상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생각하기를 멈추고 그저 또 미련하게 그 일을 준행함이다. 다시 말해 이해하고 알아서 행하는 게 아니라 행함으로, 그리 일상을 살며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안다.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는 것이리니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19-20).”
늘 보면 어느 때나 내 마음이 더 극성이다. 혼자 뭐라 하고 꾸짖고 정죄하기 일쑤다. 이는 정당함으로 포장하고 정직함으로 둔갑하여 이치에 맞는 논리적인 행실을 추구하게 하는데, 실제 그런 사람들을 보면 행함은 없고 생각만 많다. 누구 일에 또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도 말로는 열심히 설명하고 아는 것은 천상유수 같이 많으나 정작, <어린왕자>에 나오는 어느 혹성의 ‘지리학자’ 같다. 아는 건 많은 데 행한 것은 없다. 가본 적은 없으면서 그곳 지리를 꾀고 있다. 말은 많고 실천은 없는 것이다. 그런 우리에게 바울 사도는 단언하건대 자신의 행함을 나타낸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고전 4:3-4).” 이런 나를 심판하실 이는 하나님뿐이시다.
주신 날을 주어진 조건으로 사는 일이란, “내가 찬양하는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옵소서(시 109:1).” 내가 찬양할 때 하나님이 잠잠하지 않으시는 일이다. 누가 나를 공격하고 나조차 나를 괴롭힌다 해도, 기도할 뿐이라!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4).” 비록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여 나의 중심이 상함이니이다(22).” 그러나 나는 그것으로 주를 의지할 따름이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구원하소서(26).” 곧 이로써 “이것이 주의 손이 하신 일인 줄을 그들이 알게 하소서 주 여호와께서 이를 행하셨나이다(27).” 나는 이를 믿음으로 방패삼아, “내가 입으로 여호와께 크게 감사하며 많은 사람 중에서 찬송하리니 그가 궁핍한 자의 오른쪽에 서사 그의 영혼을 심판하려 하는 자들에게서 구원하실 것임이로다(30-3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