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를 의뢰하고 그의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
날마다 그 말로 그를 재촉하여 조르매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
사사기 16:16
그는 흉한 소문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의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
시편 112:7
그리스도인이란 맡은 자의 직분으로 산다. 한데 그 마음이 다른 데 있어 “이 후에 삼손이 소렉 골짜기의 들릴라라 이름하는 여인을 사랑하매(삿 16:4).” 과연 그 마음의 괴로움은 자초한 일이다. “날마다 그 말로 그를 재촉하여 조르매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16).” 보면 모든 일이 그러하여 자기 직분의 일을 바르게 감당하지 못할 때 생겨나는 일이다. 묵묵히 주의 일을 준행하는 자로서, “그는 흉한 소문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의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시 112:7).” 결이 다른 일이다.
점심께 아이가 돌아가고 병원에 들렀다. 약을 타고 돌아왔다. 곧 장마가 시작될 거여서, 나무들은 푸르렀고 하늘은 무거웠다. 모든 산 것들의 사명은 주신 바 그 삶을 사는 게 곧 직분일 거였다. 저마다 주신 이의 뜻을 갈망함이다. 먼저 직분을 맡은 자로서 우리의 도리는,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롬 12:15-16).” 이는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일로 높은 데 마음을 두지 않고 낮은 데 마음을 두는 겸손이 그 첫 번째였다.
곧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 2:2-4).” 설교 원고를 풀어 다시 뼈대를 맞추며 원고를 작성하였다. 이는 나의 직분이다. 그 맡은 자의 의무는,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히 13:15-16).”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다. 곧 오늘의 나로 두신 이 한 날의 삶에서 묵묵히 그 생을 다해가는 것이 오직 선한 행함이다.
그러는 중에 아이를 생각하고 위하고 돌보는 일로, 그 직분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데 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1-12).” 그에 따른 실천은 엄연하여서 “이와 같이 집사들도 정중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 이에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맡게 할 것이요 여자들도 이와 같이 정숙하고 모함하지 아니하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딤전 3:8-11).” 세상 것에 인박히지 않으며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않고 그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간직하는 것이다.
실은 아이의 중언부언이 나는 두렵다. 아무런 성과는커녕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을 때는 걱정도 앞선다. 뭔 소릴 하는 건지! 아이와 통화를 하거나 아이의 글을 읽을 때면 가슴이 아리다. 그럼에도 우리 일의 우선순위는 분명하여서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행 6:4).” 알아듣기나 하는 건지, 어떤 성과나 변화가 있기는 하는 건지, 나는 알 수 없어 애통하는 심정으로 주께 아뢰는 일,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그런 의미가 아닐까? 저 아이를 보면 나 같다. 하나님은 일부러 내가 나를 마주하고 돌보게 하시는 직분을 주셨다. 나는 말씀을 두고 아이를 지도한다. 아침마다 성경구절을 보내고 하루를 격려한다.
곧 그러는 것은 그럼으로 나에게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실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시 107:20).” 말씀으로 말씀에 다다가게 하신다. 이는 “그의 말씀을 보내사 그것들을 녹이시고 바람을 불게 하신즉 물이 흐르는도다(147:18).” 그러므로 우리의 날들이 비록 서글프고 동정의 대상이 되고 심지어는 가소로울 따름이라 해도,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행 19:20).” 우리 안에서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함이 귀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요일 3:18-20).”
나는 이제 나의 그 어떤, 모든 게 다, 나의 마음보다 하나님이 크시다는 데 확신한다. 마음이 혹 나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좌절이 실망이 또는 어떤 우울감이 나를 엄습하고 꾸짖고 불안하게 한다 해도, 하나님은 나의 이 마음보다 크시다. 병원에 들러 이런저런 소릴 듣고 좀 더 두고 보자 하는 소리 외에 달리 방법이 없는 처지에서도, 스데반 집사의 설교와 마지막 기도를 읽으며 성령 충만함을 사모하게 되었다. 그것으로 주를 의지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여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시 115:11).” 저는 나의 도움이시요 방패이심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이로써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 29:25).” 남의 시선과 이목에 연연할 게 없다.
어떤 성과나 기대에 부응하는 삶이 아니다. 오히려 이제는 두려워할 것을 두려워할 줄 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바란다.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 13:6).” 그러니 이 땅의 그 무엇도 어찌하리요! 더는 나 자신을 위해 사는 삶이 아닌 것이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7-8).”
이처럼 설교 원고를 뼈대를 세우듯 말씀을 따라 원고를 작성하고 있는 일이 새로웠다. 그러니 무엇으로 사는가? 나는 다만 전할 뿐이라. 저들이 듣든지 아니 듣는지 주의 말씀을 붙들고 전하는 자로 산다. “인자야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있으며 전갈 가운데에 거주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말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도 그 말을 두려워하지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심히 패역한 자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겔 2:6-7).” 그 반응에 놀랄 것 없다. 가령 초등부 아이 하나가 어쩐지 글방에 오지 못했다. 알고 보니 그 아빠가 ‘거긴 가지 마!’ 하고 아이를 제지한 것인데, 집에서 읽으라고 조그만 성경을 주었고, 아이 원고에 옮겨 적힌 잠언의 한 구절을 읽은 모양이었다.
그래봐야 아무 소용도 없는 것 같은데, 잠언을 한 장 읽히는 건 하지 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내게 말씀은 엄연히,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 이 또한 내가 해야 하는 나의 직분이었다. 종교적인, 종교인이어서, 하는 따위의 저들 공격에 맞설 게 없다. 묵묵히 사명을 완주하는 것뿐이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어떤 이유로 그처럼 노골적으로 반대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것도 엄연하여서 그 모든 게 일시적일 따름이다. 고로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 같이 나도 나의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벧후 1:13-14).”
저들이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 우리는 다만 신령한 은혜로 산다.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고후 9:10).” 곧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처럼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셨다. 그러므로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내가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딤후 2:6-7).”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과 떡을 주신다. 늘 사는 게 쪼들리고 힘에 겨운 것 같지만 그때마다 누리고 모자람이 없이 여기까지 인도하셨음을 확신한다. 이제 남은 생은 생명의 면류관을 바라고 달려가는 것이다.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결국 오늘 삼손의 행실과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와 같은 말씀이 나로 하여금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더하고 계신다. “그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함이여 의인은 영원히 기억되리로다(시 112:6).” 주만 바라자. 의인은 그 죽음에도 소망이 있다.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각오로 가자. 하나님이 나를 도우실 것이다. 하지만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는 믿음이 우선이다. 나는 욥의 고백을 사모한다. 저가 나를 죽이시더라도 나는 그를 의뢰한다니!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그럼에도 묵묵히 가던 길을 재촉하는 게 귀하였다. 오후 내내 설교 원고 뼈대를 작성하고 성경을 찾고 말씀 가운데서 씨름하는 일이 귀하였다. 나의 사는 직분이다. 내게 두신 삶이라.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12: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