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는 순진한 자를 지키시나니
이와 같이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하나 같이 합심하여 그 성읍을 치려고 모였더라
사사기 20:11
여호와께서는 순진한 자를 지키시나니 내가 어려울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
시편 116:6
보면 동족끼리 더 치열하게 싸운다. 치졸하기 짝이 없다. 서로는 서로를 헐뜯고 욕한다. 결국 레위 사람 누가 첩으로 인해 쓸데없는 소요에 휘말렸고, 농락당해 죽은 첩의 사건은 모욕감으로 견딜 수 없는 것이었을 테고, 이에 온 이스라엘을 들쑤셔 같은 민족인 베냐민 족속을 치는데 온 힘을 기울인다. 적국인 블레셋도 아니고 애굽나라도 아닌 저들끼리의 전투 이야기인 오늘 본문은 우리나라의 분열과 증오와 다툼을 연상하게 한다. 예배 마치고 아이들이 먼저 돌아간 뒤 느닷없이 정치 이야기가 쏟아졌다. 좌파가 어떻고 ‘문빠’가 어떻고, 지금 우리 사회가 어느 지경에 이르렇고, 그게 다 누구 때문인데, 언제가 좋았고, 누가 훌륭하였으며, 어쩌고저쩌고. 듣다보면 다 어디 유튜브에서 들은 주장들이다. 옆 사무실 누가 건너와 뜬금없이 쏟아내는 말들도 그 말이 그 말들이다.
기껏 예배 마치고 할 소린 아닌 것 같아 몇 번을 저지하고, 우리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사회에서 편향된 주장에 휘말리면 안 된다고 말해줘도 소용이 없다. 나는 그래서 정치 이야기와 교리 이야기는 나누지 않는다. 결국 자기주장에 함몰된 생각으로 말이 끊이지 않고 혈기가 올라오며 급기야 서로를 저주하는 입술의 죄를 서슴지 않는 것이어서, 무서운 일이다. 어쩌자는 것인지. 그러니 서로 ‘6.25’라도 다시 벌이자는 소린지. “에워싸인 가운데에 앉은 자여 네 짐 꾸러미를 이 땅에서 꾸리라(렘 10:17).” 나는 말씀을 되뇌었다. 대꾸하지 않았고 돌아가는 길에 유튜브 시청을 자제하시라 말하였다. 개인방송이 활개치는 세상이다. 다들 입이 가볍고 귀가 가려운 것이다. 어설프기 짝이 없기는, 다들 어디서 귀동냥으로 들은풍월이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딤후 4:3-4).”
답답한 노릇이다. 자기가 믿는 것이 하나님을 반역하는 데 쓰인다. 더 악랄하고 치졸한 것은 종교적인 신념을 가미하는 것이다. 오늘 날 우리의 종교적인 판단이 교회를 망친다. 복음을 저해한다. 하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유대인들이지 로마가 아니었다. 뭐라 제지해도 듣지를 않는 게 정치와 종교 이야기다. 말이 너무 많다. 듣다 지쳐 대놓고 내가 먼저 일어섰다. 떠들어대는 말들로 그 무게에 눌려 죽을 지경이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하나 같이 합심하여 그 성읍을 치려고 모였더라(삿 20:11).” 그러니 잘한 일인가? 기껏 앞서 설교 말씀에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행 6:4).” 듣고 돌아서기 무섭게 누구를 비방하고 저주하는 일에 열을 올리는 꼴이었으니. 오히려 아이들이 일이 있어 먼저 돌아간 게 잘 된 것 같다. 부끄러운 일이다.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사회에 우리는 답할 필요가 없다.
‘한 손에 신문을 한 손에 성경을.’ 본 회퍼의 말처럼 우리는 다만 균형을 잡아야 하는 사람들이지 어느 쪽을 지지하고 누구를 적대시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언제는 또 그 권세를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라 두둔하더니. 나의 편협한 생각으로는 우리 종교인은 정치에 끼어들면 안 된다. 문화사업에 동참해도 안 된다. 존 번연의 탁월한 묘사처럼 ‘세속현자’의 아들이 ‘문화’이다. 내가 보기에 그 형제가 ‘정치’다. 다들 으르렁거리거나 타협하거나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에 함몰되고 만다. 우리에게는 오직 한 곬. 한쪽 방향의 길밖에는 없다. 거기에 누구를 들먹이고, 누가 우리 민족의 구원자였다는 식으로의 논지는 어리석을 뿐이다. 또한 다 그 주장이 유튜브를 떠도는 낭설이라. 가짜 뉴스를 재생산할 따름이다. 그걸 마치 자신의 주장인 것처럼 떠들어대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우리는 ‘오로지’ 단 ‘~만’ 또는 ‘~뿐’ 다른 것에 열을 올리고 자기주장을 일삼는 것은 옳지 않다. 이에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묵묵히 그 입 다무시라. 나는 그래서 몸으로 일하는 사람보다 입으로 일하는 사람들을 경계한다. 말품 파는 사람들의 고초는 그 영혼이 황폐해지는 데 문제다. 쏟아내고 쏟아내도 더 쏟아져 나오는 악의와 불의를 감당할 재간이 없다. 이쪽도 옳은 게 없지만 저쪽이 더 나쁘다는 식의 논조는 가당치 않다. 왜 고난을 육체에 채울까? 입 좀 다물고 묵묵히 준행할 따름이다. 그 입으로 차라리 주께 빌라. 사람들 설득하고 끌어 모아 같은 의견을 주장하는 사람들끼리 편을 가르고 욕지기를 해댄들? 서로 총부리를 겨눌 때 가장 모질고 잔인한 전투는 내전이다. 오늘 본문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스라엘 사람이 베냐민 자손에게로 돌아와서 온 성읍과 가축과 만나는 자를 다 칼날로 치고 닥치는 성읍은 모두 다 불살랐더라(삿 20:48).” 참혹할 따름이다. 그래 이제 좀 속 시원하신가? 가만히 듣다보면 그 속엔 다 자기 이익을 빼앗기지 않으려 혈안이 됐을 뿐이다. 아, 시인은 노래한다. “여호와께서는 순진한 자를 지키시나니 내가 어려울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시 116:6).” 순진하다는 것은 ‘오로지’ 그저 한 곬만 향할 뿐이다. 이 땅의 국적이 무슨 소용이겠나? 애국애족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되는가? 인류공영에 이바지 하는 게 목적이었으면 예수님의 죽음은 헛되다. 실패한 십자가다. 한심하고 처량한 신세일 뿐이다. 우리의 구원은 그게 아니다. 종종 옆 사무실 누가 건너와 떠들어대는 정치판 이야기가 다들 유튜브에서 본 것들이다. 근현대사에 대한 지식이란 것도 다 주워 들은 것뿐이다. 얄팍한 지식이 혀 끝을 가볍게 한다. 누구, 어느 박사를 찾아서 나더러 좀 보란다.
나원! 그런 거 보면 아이들 세계에서도 유튜브가 골치다. 어떤 우스갯소리나 희한한 놀이가 다 거기서 나온다. 요즘 애들은 심심할 겨를이 없다. 틈만 나면 유튜브를 본다. 그것은 공유하여 퍼다 나른다. 제어장치가 없다. 여과되지 않은 주장과 놀이가 난무하다. 노인들도 마찬가지다. 차라리 정규방송 뉴스를 보시라.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다. 자극적이고 내가 보고 싶고 듣고 싶은 것만 보려한다. 그리고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인다. 나는 그래서 유튜브를 보지 않는다. 페이스북 계정을 삭제했다. 일인방송을 반대한다. 유익할 게 없다. 그 밑에 달리는 댓글들의 조악한 표현과 즉흥적인 반응에 덩달아 부화뇌동할 따름이다. 성경공부를 하며 이를 경계할 것을 아이들에게 주의시킨다. 고리타분한가? 그 시간에 말씀을 보라. 그래 말씀만 보라. 말씀뿐이다.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시 107:20).”
그래서 누구를 지지하면 좀 더 나은 세상이 오는가? 누가 장로고 어느 교회의 지지를 받는다고 해서 세상이 좀 나아지겠나? 왜 교회를 그처럼 무리하게 확장하여 도로를 점유하고 사람들의 구설수에 오르는지. 그걸 마치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것처럼 자신들의 권력을 동원하여 교회를 돕는가? 서울시를 하늘에 봉헌하기를 바라실까? 너무 큰 대형 교회의 어마어마한 신도 숫자와 그 재력과 막강한 영향력을 빌어서 하나님은 일하시는가? 나는 자꾸 속상하고 화가 났다. 저가 누구이든 나는 그런 식의 주장이나 떠들어대는 논리를 혐오한다. 설령 그 말이 백 번 천 번 옳다 해도 그래서? 좌파는 사탄이고 우파는 천사인가? 하나님은 우파의 하나님이신가? 차마 손위 사람들이라 뭐라 할 수 없지만, 최소한 성경공부 때 나는 아이들에게 제발 그 입 좀 다물라고 권한다. 설왕설래하지마라. 말이 너무 많이 소요되는 시대다.
개인적으로 어떤 의견을 가질 수는 있다. 하지만 믿는 사람들이 거품 물 일이 아니다. 좌파가 문제이면 우파는 나은가? 누가 더 나은 것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를 가르는 사람들인까?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 나는 어느 쪽이냐고 물을 때 더는 그 자리에 있기를 거부한다. 일어나 부러 대화를 끊었다. 솔직히 나는 그런 게 왜 중요한지, 이제는 모른다. 우리는 모두 죄인들이다. 저쪽이 더 하고 이쪽이 덜한 문제가 아니다. 애통함으로 주 앞에 아뢰시라. 우리가 할 일이다. 어디도 지지하지 말 것과 종교적인 무엇을 운운하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이승만이 믿는 사람이고 박정희가 이만 해서 우리나라가 그래도 이 정도로 어쩌고저쩌고 그리 떠드는 사람들의 말에 덩달아 휘둘리지 마시라. 하나님의 은혜뿐이다. 누가 어떤 희생을 했기 때문이고, 비록 독재는 있었어도 뭐가 어떻고 하는 말들로 하나님을 조롱하지 마시라.
가만히 있어, “그의 말씀을 보내사 그것들을 녹이시고 바람을 불게 하신즉 물이 흐르는도다(시 147:18).” 부디 우리는 말씀만으로 말씀뿐인 순진한 사람으로 살자. 한참 떠들어대는 저에게 나는 그런 말조차 할 수 없었다. 말이 고픈 세대다. 억울한 게 많다. 마치 자신들이 이 나라를 세워온 줄 안다. 그러니 저들도 필사적인 것일 테고. 기어이 온 이스라엘이 일어나 베냐민 족속을 진멸하니 속이 후련하신가? 하나님이 기뻐하시겠나?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시 116:2).” 다마 우리는 주께 아뢰는 사람들이다. 거리로 나가 소신을 다하고 신념을 불사르는 사람들이 아니다. 누구를 지지하느라 저의 저주의 말에 환호하는 백성이 아니다. 애통함으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는 일이 교회고 우리의 사명이다.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1).” 이는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도다(5).” 곧 “여호와께서는 순진한 자를 지키시나니 내가 어려울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6).”
“내 영혼아 네 평안함으로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