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형제 베냐민을 위하여 뉘우쳐 이르되 오늘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끊어졌도다
사사기 21:6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시편 117:2
모처럼 두 아이가 시간이 됐다. 하나는 직업훈련이 끝났고 하나는 종강을 하여 같이 보자는 약속을 지켰다. 오전에 만나 같이 공부를 하고, 성경공부도 하고, 점심을 먹고, 탁구를 치고, 당구를 치고, 노래방에도 갔다. 노는 게 힘들었는지 오후께 아이들이 돌아가고 나는 잠깐 누웠다가 잠이 들었다. 서로 돌보아 살피고 마음을 더하는 게 성도의 문안이다. 서로를 위하고 마음에 두어 주의 이름으로 부르는 관계가 교회이다. 서로의 마음씀이 고마웠다. 우리의 약함이 서로의 위로가 되었다. 그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생각한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고후 13:4).”
우리의 생각함은 단순한 고찰이 아니다. 주가 범사에 더하시는 총명이다. “내가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딤후 2:7).” 그러자면 우리의 노력은 자발적이어야 한다. 첫째, 읽어라.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먼저 간단히 기록함과 같으니 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엡 3:3-4).” 아이들과 성경을 펴고 하던 대로 말씀을 읽고 이 복음, ‘그리스도의 비밀’을 같이 나누었다. 둘째, 분별하여 드려라.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전날에 주일 예배로 왔다가 월요일에 또 온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족히 한 시간 반은 걸리는데 그리하는 것은 분별하여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시간이다.
셋째, 말씀으로 마음을 비춘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고전 4:6).” 행여 우리의 생활이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않게 곧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고 하나님은 우리를 말씀으로 붙드신다. 넷째, 찾아라.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잠 2:4-5).” 이렇게 하는 게 맞나? 싶으면서도 덤덤하니 찾으면 또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 경외하기를 깨달아 알게 하신다. 같이 이야기 나누는 말씀 중에 아이가 곧 선물이고 은혜인 것에 대해 은연중에 말하였다.
다섯째, 표현하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6-17).” 말씀이 우리 속에 거하면 피차 권하고 노래 부르고 감사한 마음으로 표현하게 된다. 여섯째, 기억하라. “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딤후 2:8).” 우리는 서로를 대하며 그러는 중에 예수를 생각하는 일이다. 주의 사랑이 아니면 서로를 돌보아주는 주의 마음을 알겠나? 마지막으로 일곱째, 전파하라.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4:2).” 서로 권하고 경계하고 경책하는 일이 중하였다.
그렇듯 아이들과 시간을 같이 하고 있을 때 하필 누가 문자를 하여 어벤져스:엔드게임으로 보는 기독교 중심 사상(?)에 대해 물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런 히어로 영화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모르겠다고 답을 하니, 그럼 고전 가운데 기독교 사상을 논할 수 있는 작품을 소개해달라고 하였다. 그럴 겨를도 없지만 그런 데 마음을 기울일 마음도 없었다. 스스로도 말하길 자신은 왜 그런 데 관심이 가는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하긴 선생은 누가 심정지로 죽었다가 몇 분 만에 살아났는데 그러는 동안 천국에 다녀왔다는, 무슨 책을 읽어보라면서도 크게 관심을 보였다. 또는 어디에 무슨 글을 써 보라는 둥 ‘종교적인 일’에는 관심이 있으면서 하나님은 멀리하는 것이다. 나는 그런 데 마음이 없다. 어떤 신비나 무슨 학문적인 접근으로의 사상 따위에는 말이다.
되레 나에게는 이처럼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신비다. 저 아이가 무슨 연유로 저 아이에게 마음을 쓰고, 그 마음씀을 소중히 여기겠나? 말이 쉽지 돈이나 마음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직접 같이 하는 시간이 기적이다. 일부러 밥을 사주겠다고 오고, 영어를 봐주고, 위하여 서로 기도하는 일이 어떤 히어로보다 영웅적인 행위다. 이를 한 마디로 정의하라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놀라운 현실이다. 은혜대로 한다. 그 분수대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롬 12:6).” 누구는 지식을 원하고 누구는 기적을 좇기만 우리는 다만 같이 한다. 택하심을 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 이는 우리가 임의로 행하는 게 아니다.
끊을 수 없고 끊어질 수 없는 사랑을 누리는 것이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그래서 누구들처럼 조급해하지 않는다. 무엇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그것은이미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엡 1:7).” 이를 아는 삶은 의를 덧입는다. 이 의는 우리의 수고로 얻어지는 게 아니다. 고찰과 성찰과 철학으로 얻어지는 게 아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덧입음으로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17).”
이미 천국에 사는 삶을 맛본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6).” 내가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20).” 그의 거룩하심을 덧입는 일이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2).” 그래서 우리는 그러는 시간에 풍성함이 어떤 것인지를 몸소 느끼고 배운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넉넉히 모자람이 없는 날이었다. 부디 그처럼 잘 자라주어 주 앞에 귀히 쓰임 받는 삶들이 되기를 바랐다. 하나님이 평강으로 지키실 것이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7).”
그러는 중에 우리 안에 영생이 있다.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4).” 나는 이처럼 말씀으로 말씀을 찾아 이끌리며 주께 감사하였다. 오늘 아침 말씀은 상대적으로 서로의 반목은 괴로움을 더할 뿐이라는 데 한숨을 더한다. 기껏 감정에 휘말려 서로 증오하고 보복할 때는 몰랐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형제 베냐민을 위하여 뉘우쳐 이르되 오늘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끊어졌도다(삿 21:6).” 그래도 그 안에 뉘우침이 있어 주의 긍휼하심을 보장한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시 117:2).” 주의 인자하심이 아니면 어찌 용서가 안 되는 게 사람이라. 결국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우리에게 부탁한 아름다움을 지키는 것이 성도의 삶이었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딤후 1:13-14).”
주일 지나고 월요일 하루, 모처럼 아이들과 만나 이런저런 시간을 보내면서. 그러는 동안 하나님이 돌보시고 이끄심을 체험할 수 있었다. 서로 으르렁거리며 변론하려 입을 열 때마다 분쟁과 다툼뿐인 사회에서 주 안에서 약한 자로 사는 게 얼마나 복인지! 그리스도도 약하심으로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을 일깨우시며. 강인하고 투철하여 무적의 함대로 적을 무찌르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고후 13:4).” 하나님은 우리의 약함을 가지고 하나님의 강하심을 나타내신다. 고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가운데 나는 할 수 있는 만큼 다할 뿐이다. 잘하고 못하고, 성공하고 실패하고는 우리 몫이 아니다. 주의 것이다. 하나님께 충성이란 약함 그대로 십자가를 지는 일이다.
표면적으로는 실패하고 졌으나 이미 승리하셨다. 이 모든 게 주의 손에 있다는 사실 앞에 안도한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렘 18:6).” 이를 고전적인 학문에서 어떤 대중문화의 유희를 통해 기독교 사상을 운운하며 설왕설래 하는 일에 나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을 감사한다. 실은 어떤 이단이 판치고 기독교계가 어찌 좌초하고 이 나라와 민족이 어떻게 되든지, 하나님의 주권을 마치 우리의 논리와 이성으로 해결하고 이해하려 드는 그 자체로 이미 승부는 결정이 난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우리 안에 더한다는 것은 우리의 자유함으로 증명될 뿐이다.
주께서 행하소서! 우리로 하여금 덜 소중한 것으로 더 위대한 것을 판단하지 않게 하소서! 이 나라가 뭐? 기독교가 뭐? 그 정체성을 운운하고 기독교적 사상을 정립하는 게 뭐? 언제까지 그런 데 기웃거리며 관심을 둘 것인지! 누가 죽었다가 천국을 다녀왔든 지옥을 다녀왔든, 그게 다 개꿈이든! 나는 누가 자꾸 문자로 말을 걸 때 그렇게 답을 하고 싶었으나 그만두었다. 다만 우린 하나님에 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한다.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할지어다(시 117:1).” 고로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