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
그가 이르되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가난하건 부하건 젊은 자를 따르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룻기 3:10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
시편 119:87
그저 사느라 사는 게 전부였을 삶들인데,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오늘 말씀은 이에 따른 교훈을 더하시는 것 같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67).” 어찌 고난을 달갑게 받을까나만, “이에 시어머니가 이르되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될지 알기까지 앉아 있으라 그 사람이 오늘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 하니라(룻 3:18).” 곧 그 흐름이 자연스러워졌다. 전에는 억지스러워 애를 쓰고 기를 쓰고 죽기 살기로 매달려야 했을 것인데, ‘오늘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 우리 주님이 오늘 나를 위해 그리하지 않으시겠나? 가타부타 내가 용을 쓸 게 아니었다.
좀 웃기는 적용이지만 초딩 중딩 애들이 여름이라 더워진 날씨에 7, 8월은 글방에 오지 않기로 했다. 이러저러 해서 하기들 싫어하고 나 역시 억지스럽게 끌고 가는 건 아닐 거라 여겨 그리하자고 했다. 그랬더니 맞춤하니 그 시간까지 아이가 있게 되었다. 복지관에 들러 바리스타 실습을 하고 아이가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 글방으로 왔다. 오고 가는 길이며 그 하루 일정을 돌봐야 하는 가운데, 네가 이 시간을 차지하려고 저 애들이 안 오게 되었구나! 하고 혼잣말을 했다. 저절로 그리 되는 게 있겠나만, 하나님의 주도하심에 맡긴다는 것은 종종 너무 자연스럽고 아귀가 딱 들어맞아 거 참 희한하다싶을 정도이다. 결코 억지스럽지가 않다. 이때 “룻이 시어머니에게 이르되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리이다 하니라.” 그리고 “그가 타작 마당으로 내려가서 시어머니의 명령대로 다 하니라(5-6).” 우리는 다만 그 순리에 따를 뿐이다.
어느새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들을 지킨 것이니이다(시 119:56).” 곧 내가 주도한 게 아니다. 우리는 그저 가만히 그리 행하였을 뿐이다.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시니 나는 주의 말씀을 지키리라 하였나이다(57).” 그것은 고난당하기 전에는 몰랐던 일이다. 여전히 아등바등 기를 쓰고 살고 있는, 곁의 사람들을 볼 때면 때로 마음이 저며서 찡하다. 선생이 같은 책 두 권을 보냈다. 문장을 보면서 네 생각이 나더라, 네 게 더 좋았는데, 다시 썼으면 좋겠다, 하는 의미를 담은 거였다. 마침 옆 사무실에 딸애 나이와 동갑내기가 있어 읽어보라고 한 권을 주었다. 설교 원고를 마친 뒤 앞부분을 잠깐 읽어보다 덮었다. 아이가 오고 같이 점심을 먹고 성경공부를 하고 이래저래 책장을 넘길 수 없었다.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시니’ 하는 표현을 이제 나는 소중히 간직한다. 분깃이란 내 몫의 한 몫이다. 그렇지 내 아버지의 믿음과 어머니의 순종을 분깃으로 받았다 할 때의 분깃이다.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여호와가 나의 분깃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덧대어 계획하고 일삼고 힘겨워할 거 없다. 할 수 있는 만큼 할 뿐이고 그 정도만 맡기신다. 종종 나는 우습게도 어느 큰 교회에 목회가 아니어서 다행이다. 여러 사람을 대하고 함께 해야 하는 게 아니어서 또한 감사하다. 내가 할 수 있는 정도로 족한 것이다. 여기서 주께 바라는 것은 어제 가정예배 때 같이 읽은 솔로몬의 기도처럼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분별하게 하옵소서(왕상 3:9).” 하는 것이다. 늘 보면 하나님은 언제나 나의 하나님 되신다. 남의 하나님이 아니고 어디 박물관에 걸려 있는 어마어마한 값의 전시작품이 아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분깃, 내 몫. 고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막 12:27).” 오늘 내가 느끼고 누리고 온 몸으로 만질 수 있는 실제의 하나님.
그 하나님은 먼저 늘 나를 찾아오신다. 아무리 죄악 된 길에 있다 해도,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4:10).” 무엇을 이루시기 위해서도,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7:1).” 그리고 지도하시려고,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12:1).” 소외된 영혼을 찾아서도,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16:8).” 심지어 대적하는 자에게도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행 9:4).” 어리석은 삶에 빠져 있을 때도,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마 9:9).”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막 2:14).”
이와 같이 먼저 나를 찾아오시는 그 분, 나의 분깃, 나의 몫. 그 하나님은 나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 3:17).” 나는 선생이 보내온 책과 점심께 온 아이와 여름이란 핑계로 오기 싫어하는 아이들을 쉬게 하였던 일에서도, 그 가운데 찾아오시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느꼈다. 여러 결의 마음이 뒤섞여 하나로 이어졌다. 어느 것은 내 것이 아니었다. 저절로 나와 함께 있는 마음으로 ‘듣는 마음’이란 스며져 묵상 가운데 있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 1:2).” 그럴 수 있는 게 고난이었다면 고난도 내게 유익이라. 때로는 “내가 연기 속의 가죽 부대 같이 되었으나 주의 율례들을 잊지 아니하나이다(119:83).” 그럴 수 있는 것은 “나의 영혼이 주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오나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81).”
누가 박사 학위를 따고 준비하는 동안 썼던 이면지를 잔뜩 가져다주었다. 아이는 피곤한 듯 게슴츠레 눈을 뜨고 책을 소리 내어 읽고 있었고, 나는 그것을 정리하며 개중에 깨끗하고 쓸모 있는 것을 순서대로 추려 설교 원고 초안 출력지로 다음 것은 주보를 위해, 더 나은 것은 설교 원고 일주일 묵상지로 그리고 가장 별로인 것은 평소 연습지로 분류하며 고요하였다. 한심하기도 하겠으나 평온하였다. 아이에게 소리 내어 글을 읽게 하였다. 어떻게 할까, 하고 시간 계획표를 짜려다가 그만두었다. 금세 돌아서면 까먹고 뭘 해야 할지 묻는 아이의 상태를 쯧쯧, 혀를 차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살고 있었다는 데 놀라울 따름인 것이다. 그 모든 것에는 ‘듣는 마음’ 곧 ‘묵상’이 필요하였다. 하나님은 허투루 그 어떤 상황도 사사로이 다루시지 않는다. 아이가 돌아가고 녹초가 되어 소파에 누웠다가, <중학생 A>라는 영화를 보다 울었다. 사는 게 다들 고달프다.
자고로 묵상이란,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큰 사자나 젊은 사자가 자기의 먹이를 움키고 으르렁거릴 때에 그것을 치려고 여러 목자를 불러 왔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들의 소리로 말미암아 놀라지 아니할 것이요 그들의 떠듦으로 말미암아 굴복하지 아니할 것이라 이와 같이 나 여호와가 강림하여 시온 산과 그 언덕에서 싸울 것이라(사 31:4).”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게 묵상이다. 묵상은 일상이다. 성경만 끼고 앉아 읽고 또 읽고 여러 번을 통톡하는 게 아니다. 사자가 그 움킨 것을 결코 빼앗기지 않으려고 으르렁거리는 것과 같다. 또한 “나는 제비 같이, 학 같이 지저귀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 내 눈이 쇠하도록 앙망하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압제를 받사오니 나의 중보가 되옵소서(38:14).” 종일 종종걸음 치며 구구거리고 먹이를 쪼아 삼키고 나르는 새들의 부지런함처럼! 나는 그렇듯 그르렁거리고 으르렁거리며 내게 두시는 이 순간, 오늘 한 날의 나의 분깃, 나의 하나님으로 듣는다.
아, 그러할 때 시인의 노래는 가히 진실하였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시 19:9-10).” 고로 “나의 말이 주께서 언제나 나를 안위하실까 하면서 내 눈이 주의 말씀을 바라기에 피곤하니이다(119:82).” 그 피곤함은 피하고 싶은 게 아니다. 싫어서 마다할 고단함이 아니다. 잃을 수 없는 생명이다. 그리하여 “교만한 자들이 거짓으로 나를 엎드러뜨렸으니 그들이 수치를 당하게 하소서 나는 주의 법도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78).” 아멘.